공연 마지막 회차가 끝나고 그날 바로 작업실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한달간의 공연의 부산물이 작업실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이대로 퇴근했다가는 다음주 일정을 소화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여러 팀들과 연습하느라 꼬인 배선들을 새롭게 배치하고, 공연장에서 돌아와 엉망으로 놓인 악기들과 물품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놓여 있는 바닥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무대 위를 멋지게 꾸며주던 소품들은 작업실에 들어오니 갈 곳이 없었다. 공연 직전에 발매한 CD 박스들과 티셔츠, 그리고 배송용품들도 정리하지 않으면 안됐다. 공연의 여운이 남아 있는 늦은 밤 작업실은 그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15년을 이어온 밴드의 작업실에는 많은 것들이 남아 있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정리를 하지만 여전히 무엇인가가 남는다. 일단 슬쩍 봐도 각종 활동의 데이터가 쌓여 있는 CD와 하드디스크 뭉치들(절대로 버릴 수 없지만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한때는 열심히 사용했지만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장비들, 그리고 절대로 버릴 수 없는 팬들의 선물과 편지들이 보인다. 공들여 만들었던 공연 포스터와 제작물들도 이제는 한눈에 확인할 수 없을 만큼이고, 인터뷰가 실렸던 신문 잡지들도 전부는 아니지만 아직 보관하고 있다. 자연인들이 그러한 것처럼 밴드에게도 이사할 때마다 정리해서 버려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잘 보관해야 할 것 같기도 한 것들이 있는 셈이다.
그중에서도 매번 멤버들이 언제 버릴 거냐고 물어보는 개인 물건이 있는데(이번 정리 과정에서도 혹시 버릴 생각이 없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만화 잡지인 <팝툰> 연재분이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 격주간-월간으로 나왔던 이 잡지의 팬이었던 나는 초기의 몇권을 제외하고 모든 회차를 다 소장하고 있다(전권 소장 후에 크게 이사를 5번 하면서도 버리지 않았다!). 아직 이동하는 길에 잠시 들러 책을 구입할 만한 서점이 조금은 남아 있을 때였다.
합주나 공연하러 가기 전 서점에 들러 구매하는 것이 당시의 나에게 큰 기쁨을 주는 의식이었다. 책을 둥글게 쥐어서 비닐 포장을 뜯어낼 때 나는 새 책의 냄새란…. 아무리 울적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2주에 한번 주어지는 큰 기쁨이었다. <팝툰>은 중간에 월간으로 변경되기도 했다. 삶의 큰 기쁨이 반감되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무기한 휴간을 발표했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버릴 것이냐 보관할 것이냐의 갈림길에 서게 만드는 애증의 물건이 됐다.
<팝툰>은 나에게 매달 잡지로서의 기쁨을 준 것 외에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브로콜리너마저 1집의 <속좁은 여학생>을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작업은 끝났지만 제목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곡의 제목으로 <팝툰>에 연재 중이던 만화 <속좁은 여학생>의 제목을 빌려온 것이다. 토마 작가님에게 메일 답장을 받았을 때는 뛸 듯이 기뻤다. 무명의 인디밴드의 부탁을 친절하게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작가님 메일에 썼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제 와 말씀드리자면 파란닷컴에 연재하던 <남자친9> 때부터 팬이었습니다, 엉엉. 가사 내용은 만화의 줄거리와는 크게 상관없지만 제목이 미묘하게 멋진 표현이라 가사에 어울리는 멋진 제목이 되었다. 사실 <팝툰>을 처음 구독하게 된 것도 토마 작가님의 연재 소식을 들었기 때문인데, 아무튼 그렇다는 이야기.
좀 웃기긴 하지만 아쉬움을 느낀 적도 있다. 물론 편집부가 그것에 대해 미안해할 이유는 없겠지만…. <팝툰>은 ‘인터뷰 코너’에서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던 밴드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의 조까를로스와 장기하와 얼굴들의 장기하를 연속으로 인터뷰했다. 이렇게 한창 인디신의 인물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으니 곧 나에게도 한번쯤 인터뷰 제안이 올 수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아, 진심으로 팬인 잡지와 인터뷰하면 어떤 기분일까, <속좁은 여학생> 같은 노래가 나오게 된 사연을 이야기해야겠군, 재미있게 본 작품이 너무 많은데 뭘 꼽아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지만 나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왠지 이것도 만화 속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이 들긴 하는데, <팝툰>은 그 뒤로 거짓말처럼 무기한 휴간에 들어가게 된다.
찐 팬과 함께할 소중한 기회를 잃어버린 채 <팝툰>이 무기한 휴간에 들어간 지도 10년이 넘게 지났고, 어떻게든 그 시간 동안 밴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보니 다시금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온라인으로 만화 콘텐츠가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전이라 그런지 인터넷 검색을 해봐도 자세한 정보나 호별 내용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제 가지고 있는 책을 다시 들춰보지 않으면 기억나지 않는 것들은 없는 일이 되는 걸까. 요즘은 모든 것이 다 온라인에 있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지만 또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남아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직도 가끔 책을 뒤져보는 나같은 사람이 있으면 <팝툰>은 사라지지 않은 것인가 싶기도 하고 책을 버리고 나면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 싶기도 하고.
처음 밴드 활동을 하고 나서 잡지나 신문 인터뷰에 실린 자신을 보며 ‘헉 내가 이런 곳에’라고 생각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많이 지나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남는 이야기니 말을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내용이 기억나지도 않고 다시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클럽에서 같이 공연한, 좋은 곡을 연주하던 밴드가 생각나서 검색해봐도 웹페이지 조각만 나올 뿐이다. 한참을 잘 활동해왔지만 언제부터인가 무기한 휴업 중인 동료들을 떠올려본다. 이제 마지막입니다, 말하지 못하고 웹사이트가 없어지고 SNS 계정이 업데이트되지 않고 새로운 책이, 음악이 발표되지 않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은 왠지 쓸쓸한 일이다.
아무튼 나는 지금은 무기한 휴간 중인 잡지의 팬이(었)고 거기 연재되던 만화를 아주 좋아해서 작가님께 허락을 구하고 노래 제목을 빌려왔는데, 그 곡이 브로콜리너마저의 <속좁은 여학생>이라는 잊힐 뻔한 이야기. <속좁은 여학생> 단행본은 아직 구입할 수 있다.
<속좁은 여학생> _브로콜리너마저
마음에 없는 그런 말 하고
돌아서면 더 힘들지
그런 건 너무 가슴이 아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오늘은
길었던 하루가 다 지나도
뭘 했는지도 모르겠어
그래 이런 건 너무 가슴이 아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오늘은
있잖아 내가 만약에 내가
너에게 가슴 아픈 말을 했다면 잊어줘
미안해 내가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하고 전화를 할까 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