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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최종병기 그녀
김혜리 2017-07-05

※<엘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랄발광 17세>

네이딘(헤일리 스타인펠드)은 내게 동조해주지 않는 세상에 화가 난 17살이다. 소녀는 타인을 상처주는 표현을 포함해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말로 쏟아냄으로써 본인의 괴로움을 세상에 퍼뜨리려 한다. 설상가상으로 잘난 오빠에게 유일한 친구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내 인생 망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망치련다”는 자세로 좌충우돌에 박차를 가한다. 비장한 소녀에게 꼭 필요한 것은 불행의 목격자. 그러나 네이딘에게 적임자로 점찍힌 브루너 선생(우디 해럴슨)은 녹록지 않다. 쉽게 연민하지도 꾸짖지도 않는 그의 대응은 네이딘의 폭주를 이상하게 와해시켜버린다. 뛰어난 두 배우가 만들어내는 극명한 리듬의 대조는 <지랄발광 17세>의 큰 즐거움이다.

06/11

무단 침입한 괴한에게 집에서 성폭행을 당한 미셸(이자벨 위페르)은 범인이 사라지자 부서진 세간을 쓸어담고 속옷을 버리고 욕조에 몸을 담근다. 그리고 초밥집에 주문전화를 걸어서 묻는다. “홀리데이 롤에는 뭐가 들었죠?” 이튿날엔 성병 감염 여부를 검사하고 호신용 최루 스프레이를 사고 도어록을 바꿔 단다. 경찰에 신고하거나 심리상담을 신청하는 일은 없다. 영화의 1/3을 남기고 범인의 정체가 밝혀진 다음에도 미셸은 복수와 처벌을 도모하긴커녕 사도마조히즘의 게임을 주도한다. 상식을 넘어선 이 행동에는 극히 특수한 과거가 연관돼 있다. 39년 전 평소 멀쩡한 시민이었던 미셸의 아버지는 마을 주민을 다수 살해해 프랑스 전국을 뒤흔들었고 그날 이후 어머니와 미셸은 평생을 저주와 모욕 속에 살아왔다. 결과로서 미셸은 경찰과 언론을 멀리하게 됐고,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도 언제든 공격당하면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를 방어해야 하는 입장에 익숙해졌다. 이를테면 <케빈에 대하여>의 에바(틸다 스윈튼)와 유사한 상황이지만, 사춘기 이전에 트라우마를 겪은 미셸에게서 나타나는 결과는 가해자의 어머니인 에바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범인 추적에 나선 미셸은 한 직원에게 회사 컴퓨터들을 몰래 뒤지라고 지시한 뒤 다음 조치는 직접 하겠노라 말한다. “미친놈은 내가 잡아. 내 전문이지.” 이 대사로 미루어보건대 생애 두 번째로 괴물과 조우한 미셸에게는 평범한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치명적인- 마조히스틱한- 호기심과 오기가 있다. 성폭행이라는 사태를 맞아 그녀가 원하는 바는 정의 실현이나 보복과는 조금 궤를 달리한다. 이번에야말로 멀쩡한 인간 내부에서 악마가 언제 어떻게 튀어나오는지 똑똑히 지켜보고, 사태의 주도권을 차지해 평생 그녀를 따라다닌 희생자 역을 영구히 청산하겠다는 의지에 가까워 보인다. 영화의 원작 소설 <오…>(Oh…, 2007)의 한 대목이다. “나는 그가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기를 바랐다. 다시 대결하고 싶었다. 온 힘을 다해 발로 차고 주먹을 날리고 깨물고 머리칼을 쥐어뜯고 벗겨서 창문에 묶어놓고 싶었다.” 미셸은 복역 중인 아버지의 죽음을 안 직후 자동차 충돌 사고가 나자 놀랍게도 문제의 강간범에게 도움을 청한다. 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은 미셸이 남자 안의 괴물과 구면이라는 점이다. 공격당한 여성의 저항이 지배욕을 부추기는 상황이 오지 않으면 괴물은 깨어나지 않으리라는 가설에 패를 걸고 허를 찌름으로써 ‘게임’의 서브권을 넘겨받는 것이다. 한편 <엘르>는 강간범을 좇는 스릴러 서사와 나란히 미셸을 둘러싼 인간관계를 스케치한다. 친구인 동업자 안나를 제외하면 그녀 주변의 모든 인물이 미셸을 저어하면서도 그녀의 경제력과 권위에 의존하고 있다. 전남편, 생활력 없는 아들과 뻔뻔한 그의 여자친구, 실속 없는 연애와 성형에 빠진 어머니, 둔감한 불륜 상대 등은 하나같이 미셸의 눈에 한심 무인지경이지만 미셸은 자신이 주재하는 영역에서 그들이 이탈하기를 원치 않는다. 모두를 초대한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고양이처럼 집 곳곳을 누비며 상대에 따라 유혹하고 공격하고 경악시키는 미셸은 거의 희열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엘르>의 대다수 주변 인물들은 미셸에게 짐이자 필요한 존재이고 이 극점에 가장 최근 그녀의 자장(磁場)에 뛰어든 강간범이 있다. 미셸은 성폭행의 피해자로서 범인을 법과 물리력으로 처단하는 데에 무관심하다. 대신 성폭력 안으로 들어가 폭력적 성의 주도권을 탈취하는 쪽을 택한다.

06/12

<엘르>를 거절했다는 할리우드 1급 여성배우들의 사유는 예술적 모험심 부족이 아니라, 주인공과 영화가 성폭행을 대하는 파격적으로 모호한 태도가 위험하다는 판단이었을 터다. 남성지배적 세계의 권력 구조에 크게 기인한 끔찍한 범죄인 강간을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에피소드인 양 취급하고 그 결과물로 발생한 에로티시즘까지 즐기는 설정은 강간과 관련된 일부 남성들의 미신과 클리셰를 공고히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위험하다. 앞서 추측해본 미셸의 심리적 기제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미셸의 불합리한 충동과 상호모순된 속성을 단일한 퍼스낼리티로 흡수하고 변명 없이 납득시켜버리는 이자벨 위페르의 권위가 없었다면 <엘르>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배우에게는 관객이 동의하거나 연민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연기하는 인물의 현존을 믿고 용인하게 밀어붙이는 거의 폭력적인 힘이 있으며 배우 자신도 때때로 이 힘을 인지하고 무기로 쓰는 것처럼 보인다. 원작이 미셸의 1인칭 독백으로 이야기를 실어나른다는 점을 고려하면 보이스 오버 한줄 없이 <엘르>를 끌어가는 위페르의 완력은 가공할 만하다. 한발만 헛디디면 관객이나 연기자를 착취할 가능성이 높은 <엘르> 같은 작품에 흔쾌히 뛰어들려면 감독을 향한 200%의 신뢰 혹은 배우 자신의 캐릭터 장악력에 대한 확신이 필요할 텐데 위페르의 경우 어쩐지 후자였을 것 같다. 과연 폴 버호벤 감독은 뉴욕 링컨센터에서 가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천하태평하게 회고했다. “이자벨과 나는 캐릭터, 심리, 본질에 대해 아무 대화도 안 했다. 당일 촬영에 어떤 색깔의 옷을 입을지, 여러 인물이 있는 장면의 동선을 어찌할지 정도만 이야기했다. 그녀의 직관을 그냥 믿었다. 미셸도 여자니까 이자벨이 더 잘 알 테고….”

06/13

이자벨 위페르와 폴 버호벤을 삼각형의 꼭짓점으로 놓는다면 나머지 괄호에 들어갈 이름은 <피아니스트>를 연출한 미하엘 하네케다. 버호벤도 유럽 거장의 영향을 묻는 질문에 페데리코 펠리니루이스 브뉘엘을 거명하고 현대 작가로서는 하네케를 제일 좋아한다고 밝힌 바 있다. “나는 그런 영화 도저히 못 찍는다”고 부언하면서. 관객의 눈에도 차이가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퍼니게임> <피아니스트> <하얀 리본>은 영화를 보다보면 인간성의 일부를 이루는 어둠에 도달하지만, 버호벤은 아예 인간이 그렇고 그런 존재임을 전제해놓고 영화를 시작한다. 팝콘 무비 작가인 버호벤은 개탄하거나 사색하는 대신, 폭력과 에로티시즘의 스펙터클을 실컷 펼쳐놓은 다음 관객이 방금 무엇을 즐겼는지 깨닫게 하고 아울러 “사실 감독인 나도 이런 것들을 좋아한다”는 태도를 드러낸다. 많은 오락영화에는 지워져 있는, 이와 같은 자각의 순간이 어디서 오는지는 짚어내기 어렵다. 때로는 <로보캅> <스타쉽 트루퍼스> 같은 지독히 노골적인 알레고리- 전자는 예수, 후자는 파시즘- 이며, 반대로 <쇼걸>(1995)처럼 아메리칸드림을 세일즈하는 게 아니라 진심 신봉하는 스트레이트한 성공담일 때도 있고, 더 많은 경우는 쉬워 보이지만 아무도 모방하지 못하는 게 버호벤의 영화적 톤이다. 늘어놓고 보니 9·11 테러가 발생한 후 미국에서 폴 버호벤의 할리우드영화가 재평가받고 트럼프 집권 이후 그를 그리워하는 미국 평자들이 여기저기 보이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버호벤의 아이러니는 세속적이고 가볍다. 자신도 영화가 지목하는 부박한 쾌락의 추종자이기 때문이다. 1938년에 태어나서 7살까지 나치 점령기의 네덜란드에서 성장한 버호벤은 당시 원체험을 들어 “나는 죽음과 폭력에 놀라지 않는다. 좋아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것들이 인간의 정상상태라고 느낀다”라고 취향을 설명한 적이 있다. 프랑스 감독 자크 리베트는 망한 영화의 대명사로 일세를 풍미한 버호벤의 <쇼걸>을 호평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비뚤어진 멍청이들(assholes)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에 관한 영화이고 그것이 버호벤의 철학이다.” <엘르>에도 해당하는 말씀이다. 오늘 다시 본 <쇼걸>은 기억과 딴판으로 재미있고 통쾌하다. 내가 귀가 얇거나, 당시 댄서들의 몸에 떠다니던 모자이크에 눈이 흐려졌거나, 버호벤이 부지중에 시대정신을 앞질러간 감독이었거나 셋 중 하나인가보다.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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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외딴집

<내 사랑>은 실존화가 모드 루이스의 생애를 실제보다 로맨틱하게 그린 예술가 영화이자 이례적인 러브 스토리다. 선천성 관절염과 그림을 향한 열정을 한몸에 지닌 모드 루이스(샐리 호킨스)는 그녀를 독립된 성인으로 대하지 않는 가족을 떠나 무뚝뚝한 생선 장수 에버렛(에단 호크)의 입주가정부가 된다. 두 사람이 동거하는 집은 <룸>의 세트만큼 비좁다. 침대 들일 자리도 없어 한 매트리스를 나눠 쓰는 지경이다. 자기만의 방을 가진 적 없던 여자와 타인을 곁에 두는 방법에 철저히 무지한 남자는, 이 콩깍지처럼 비좁은 공간에서 숙명처럼 조금씩 가까워진다. 우연히 발견한 페인트로 선반을 칠한 날부터 모드는 오두막의 벽과 계단을 꽃과 새, 환희와 의지로 채워나간다. <내 사랑>의 제작진은 가로 3m, 세로 3.6m의 야외 세트를 짓고 벽을 뜯어내지 않은 채 협소한 공간을 감수하며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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