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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별점이 문제인가?
2000-03-14

<세기말>

<쇼생크 탈출> <그린 마일>의 감독 프랭크 다라본트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비평을 혹독하게 비판하면서 자신은 대중을 위해서 영화를 만들지 비평가를 위해 만들지 않는다고 일갈했다. 그런데 정작 다라본트 감독의 영화적 후견인이자 파트너인 소설가 스티븐 킹은 “판매는 잠시지만 평은 오래 지속된다”며 대중의 열광에도 불구하고 비평가의 지지를 그리워했다. 다라본트와 킹의 상반된 논평은 비평과 저널리즘에 대한 창작자들의 애증을 각기 대변한다. 그렇다해도 킹의 논평은 다소 뜻밖이다. 베스트셀러 작가나 흥행감독이라면 대중과의 밀월과 상업적 성공에 흠뻑 취해 있게 마련인데 말이다.

<씨네21>도 지난5년 동안, 비판의 침이 상대방 얼굴에 튀는 좁은 충무로, 난류와 한류가 섞여 흐르는 비평과 창작 사이의 해협을 통과해오면서 적잖은 시시비비에 휘말려야 했다. 특별히 기억되는 사건의 첫째는, <런어웨이>를 이정하씨가 주평에서 신랄하게 꼬집은 게 논란을 부르면서 이정하씨의 절필로 마감됐던 일이다. <홀리데이 인 서울>을 표절이라 했다가 제작자인 강우석 감독으로부터 ‘취재원과 언론매체 사이의 절교’를 선언하는 팩스 공문을 받았던 기억도 있다. 최근에는 <세기말>에서 20자평을 비꼬았던 게 설왕설래를 불렀다. 나는 개인적으로 <세기말>을 대단히 재밌는 영화라고 생각하고 있고 작품 전반의 냉소와 비판의 강도로 보면 영화비평에 대한 그 정도의 논평은 당연하다고 본다. 사실 여기서 시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건 별점이나 20자평이 아니라, 권력은 많고 권위는 없는 지금 한국 영화비평문화 자체일 것이다. 영화저널리즘은 누가 뭐래도 절대 별점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가장 대중 저널리즘다운 방식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단순화의 위험은 있지만 방대하고 복잡한 정보를 소화하기 좋게 가공해서 제공하는 건 저널리즘의 기본역할이다. 저널리즘 비평은 좋고 나쁘고의 분명한 평가, 자극적이고 재치있는 표현을 무기로 삼고 있는 게 사실이다. 문제는 구름떼처럼 모여드는 영화 군중 사이에서 저널리즘 비평이 활개치는데 비해, 상대적으로 이론과 학술비평이 부실하다는 것이다. 팽창하는 대학영화과와 영화제들, 영화단체, TV방송, 저널리즘으로 동분서주하는 영화평론가들은 영향력이 지대한데 비해 공부할 시간은 절대 부족한 것과도 관련있다. 가령 '창비'와 '문지'가 지난 30년간 문학에서 했던 역할처럼, 동질적인 이론가들이 주축이 된 학술비평지들이 영화비평문화를 두껍게 할 필요가 있다. 가령 “일간지나 주간지가 무시했던 작품인데 계간지가 명예회복시켜주었다.”는 식의 질서가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