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을 살아가는 당신들에게 던지는 재떨이 같은 영화
# 이런 이야기/네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장에선 멜로드라마를 못 써 쩔쩔매고 있는 시나리오 작가와 요요를 파는 사내의 기묘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둘째 장은 무도덕한 55살의 천민자본가와 절망적 쾌락에 빠진 여대생의 원조교제를 그린다. 셋째 장은 극단적인 허무주의자인 37살의 대학시간강사가 그 자신이 저주한 속물적 생활에 빠져들면서 모든 게 엉망이 돼간다는 이야기다. 마지막 장에서 다시 시나리오 작가가 등장해 이 혼돈의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는다.
#감독에 따르면/
"제목의 "세기말"은 형용사나 수사가 아니다. 그 자체의 고유한 의미다. 바로 1999년을, 오늘의 서울을 들여다보자는 거다. 네장으로 나뉘어 있고, 10여명의 주요인물이 등장한다. 그들의 비중은 거의 비슷하다. 나는 그들이 보여주는 삶의 단면을 모아 하나의 벽화처럼 만들고 싶었다. 그게 <세기말>이다. 각 장에 붙은 소제목 "모라토리움" "무도덕" "모랄헤저드" "Y2K"는 내가 오늘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각 인물은 모두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마지막에 가서 모두의 연관이 드러날 것이다.
이 영화의 핵심적인 이미지는 두 가지인데 그건 모두 시각적 체험에서 비롯됐다. 하나는 무너지는 건물이다. 남산 외인아파트가 무너지는 형상에서 난 우리 삶의 중요한 것들이 지닌 운명을 연상했다. 다른 하나는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정자들이다. 얼핏 보면 똑같은 생명체들의 군상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들 가운데 강한 것, 약한 것이 각기 다른 이미지를 지닌 채, 서로 싸우고 죽어가고 방황하고 있다. 충격이었다. 난 그게 우리 삶이고 우리 드라마라고 느꼈다. 난 이 이미지를 한편의 영화로 말하고 싶었다.
<세기말>은 기승전결에 의존하지 않는다. 각 캐릭터의 임팩트가 전면에 나설 것이다. 그리고 대사가 중요했던 <넘버.3>와는 달리, 비주얼과 신해철의 음악이 그 임팩트에 가담한다. 살인장면이나 차로 질주하는 장면 등 몇 가지 신은 드라마의 리듬과는 관계없이 그 자체로 매우 하드하게 그리려고 한다. 이 영화는 장르영화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희비극이다. 왜냐하면 그게 내가 바라보는 지금 이곳의 삶이 그러니까. <세기말>은 아주 웃기고 아주 우울한 그런 영화다." / 씨네21 219 특집 1999 가을 한국영화 기대작
# <넘버.3>의 송능한 감독이 이번엔 1999년 서울의 추악한 일상에 현미경을 들이대며 당신들은 어떻게 살고 있냐고 신랄하게 묻는다. "관객을 향해 내던지는 재떨이 같은 영화, 아주 웃기고 아주 우울한 영화"가 감독의 의도다. 로버트 알트먼의 <숏컷>처럼 몇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지만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모아지는 구성이 독특하다. 시나리오 작가가 보낸 며칠, 천민자본가와 여대생의 원조교제, 교수.시간강사.기자들이 어울려 벌이는 문란한 생활이 각장의 중심 이야기를 차지하며, 그들 주변을 불길하고 우스꽝스럽고 끔찍한 사건들이 스쳐간다. <넘버.3>류의 걸쭉한 입담은 여전하지만, 화면은 더 강렬해졌고 캐릭터는 더 리얼해졌다. 셀프 카메라, 인터뷰 등이 동원된 형식이 분방하며 점프컷, 핸드헬드, 스테디캠 등의 카메라워크도 다양하게 구사됐다.
포인트: 독설과 풍자의 재미, 강하고 도발적인 영상, 그리고 이재은의 발견. / 씨네21 229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