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전에서 열린 작은 페스티벌에 다녀왔다. 여름이 한창이라 햇살이 뜨거웠고, 전날에는 비까지 왔다고 하던데. 그늘도 없는 잔디밭에는 어제 내린 비에 물기가 촉촉했고, 쨍한 햇살 때문에 뭐랄까 찜통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리허설하는 내내 해가 길게 늘어져서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였다. 마치고 무대를 내려오자 티셔츠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야외 공연도 꽤나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좀 쉽지 않겠군’ 했는데 막상 저녁이 되자 거짓말처럼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날 밤은 참 좋았었다. 잔디밭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음식도 먹고 음악도 들으며 여름밤을 누리고 있었다. 분위기 때문인지 연주를 하면서도 즐거웠다. 한겨울에 온천욕을 하면서 코끝으로 전해져 오는 찬바람을 즐기는 것이 각별하다던데, 이날의 분위기는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머리 위로 가을의 바람을 느끼는 기분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가을은 그때 이미 한발 다가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영원할 것 같은 더위가 사그라들고 어느덧 여름이 지나가고 있음을 느낀다. 여전히 한낮의 햇살은 쨍하지만 저녁이 되면 꽤나 시원하고 때때로 쌀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날씨를 보니 곧 가을이 오려나보다. 입추는 예전에 지났고, 처서 역시 지나갔다(이 글이 독자에게 닿을 때면 백로를 지나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눈치를 빠르게 채지 않으면 어느새 가을 한가운데 덩그러니 던져진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벌써 수십번의 계절을 겪었지만 그 변화의 순간을 정확히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그저 한발 늦게 알고 느낄 뿐이다.
이럴 때면 어린 시절 들려주시던 어른들의 말씀이 생각난다. 감기 조심하고 따뜻하게 하고 다니라는. 환절기엔 밖에 나갈 때 옷을 잘 챙겨라,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을 귓등으로 듣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아이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러길 당부하곤 한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그러지 않으면 감기로 고생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나 역시 갑작스런 날씨 변화에는 대처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 아직도 어른들은 나보다 한발 빠르게 조심하라는 말씀을 하신다!
태도뿐 아니라 절기에 대한 내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한때는 왜 가을이 오기도 전에 입추가 있으며 입춘이 지났는데도 왜 봄은 오지 않는지 의심한 적도 있었다. 음력이라서 그런 걸까, 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그것도 아니었고.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절기가 신통하게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그저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절기에 맞추어 꼬박꼬박 계절의 눈금이 그어지는데 나만 몰랐던 거다. 먼저 잠든 아이의 이불을 다시 챙기고 다음날 아침을 생각하는 세심함이 그때는 없었고, 지금은 조금은 생긴 정도의 차이랄까.
소위 삶의 지혜라고 하는 것들이 오랜 시간 누적되어온 경험의 결과이고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 역시 경험이 아니면 알아차리기 힘든 것 같다.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데도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적어도 지금의 내가 더 현명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과거의 난 생각이 좀 깊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더 낙관적이 되어가는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떻게든 될 거야 하는 태도가 힘이 될 때도 있지만 속으론 더 많이 걱정되는 것이 보통 아닐까? 너무 걱정하는 것이 사람을 지치고 약하게 하기 때문에 그런 말과 행동을 할 수는 있겠지만….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리고 늘 해오던 것처럼 밖을 나섰을 때 저절로 느끼게 되는 가을 기분은 청량하기도 하지만 서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주 먼 과거의 사람들에게는 곧 다가올 겨울이 길고도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다르겠지만 어쩌면 그런 두려움이 아직까지도 본능적으로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준비하지 못한 채로 새로운 계절로 들어갔다가 또 어떤 일을 만나게 될지. 설레면서도 두려움이 큰 것이 이즈음인 것 같다.
언제나 환절기는 나에게 고역스러운 시간이었다. 날씨가 변하면서 덥거나 추웠던 것이 덜해지는 까닭에 좋았던 기억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생기는 일교차에 늘 감기를 달고 살았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좀 누그러졌지만 그사이 내가 건강 체질로 변해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유독 하늘이 높고 청명하던 가을 날씨가 밤이 되면 차갑게 돌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거기에 대해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 어쩌면 예전에도 알고 있으면서도 속았는지 모른다.
학생 시절에 가을 축제를 준비하던 때가 생각난다. 가을이 완연한 한낮의 교정에서 땀 흘리던 때가 그립다. 밤이 되면 추워질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일하느라 바빠서 가벼운 옷차림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일도 하고 즐겁게 놀기도 했다. 그러다가 덜덜 떨면서 밤 늦게 돌아오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최고의 순간은 항상 다 준비하지 못한 채로 맞게 되는 때에 있었다. 비록 다음날 재채기를 하고 몸이 축 늘어지더라도, 계절이 변하는 순간 속에서 우리는 빛나고 있지 않았을까. 물론 지금은 그렇게 하면 너무 힘들 것 같지만.
<두 계절> - 윤덕원
하루가 다르게 차가워지는 밤
꿈같던 여름날은 지나고
마지막까지 다정했던 그대는
이젠 멀어져가네
옷깃을 여미며 혼자서 걷는 길
오늘도 햇살은 빛나지만
굳이 끝까지 친절했던 까닭에
설마 했던 마음은 다시 또 제자리에
세상 모르고 혼자 봄이었네
나만 모르는 계절을 살았었네
햇살이 따듯해도 속지 마라
그늘에서면 서늘해지는 계절
웃으며 말하는 모습이 낯설어
하늘을 보면 어느새 높아 허전한 사람
나의 계절이 봄을 지날 때
당신의 계절은 겨울쯤이었나
차갑게 말라버린 그 겨울 내내
끝없는 비가 내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