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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고려 거란 전쟁’ 배우 지승현, 연기,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정재현 사진 백종헌 2024-01-12

“거란이 쳐들어왔는데 결방이 웬 말이냐.” “나라(고려)가 위기인데 연회가 다 무어냐.” 2023년 연말 KBS2TV가 시상식 중계를 이유로 <고려 거란 전쟁>을 2주간 결방하자 시청자들이 보인 반응이다. KBS가 공사창립 50주년을 기념해 야심차게 내놓은 대하사극 <고려 거란 전쟁>은 최근 시청률 10%를 넘기는 등 많은 시청자들의 성원을 받고 있다. 정통사극 최초로 넷플릭스 스트리밍을 시작했고, 아직 방영 중인 드라마임에도 2023년 KBS 연기대상에서 대상(최수종)을 포함해 7관왕을 차지했다. 이중 화제성을 독점하며 드라마의 인기를 견인한 이는 단연 양규 장군으로 분한 배우 지승현이다. 전장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수십만명의 거란 대군과 맞서 싸우며 고려인 포로를 구출하는 데 온몸을 바쳤던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 그는 역사서에 단 몇줄의 기록만 남아 <고려 거란 전쟁> 방영 전까지 다수의 한국인에게 친숙하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러나 형형한 기개와 단단한 카리스마로 양규를 소생해낸 배우 지승현의 놀라운 저력에 힘입어 이제 양규는 이순신, 강감찬 못지않게 온 국민이 기억하는 전쟁 영웅으로 자리하게 됐다. 그 공로로 지승현은 지난해 KBS 연기대상에서 연기와 인기를 모두 인정받아 우수상과 인기상을 수상했다. <고려 거란 전쟁>의 16회 방영 직후, <씨네21>과 배우 지승현이 처음 만났다. 평생 연기에 충성해온 데뷔 18년차 배우 지승현의 <고려 거란 전쟁> 이야기와 지금껏 그가 연기한 수많은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 연일 뉴스와 라디오, 라운드 인터뷰를 돌며 양규 장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인터뷰를 거듭하며 양규에 관해 새로 깨닫게 되는 부분도 있나.

= 시간을 되돌려 다시 연기하라고 해도 더는 못할 만큼 양규 장군과 진득한 시간을 보냈다. 장군을 내 안에서 시원하게 털어내는 중이다. 보통 한 작품을 끝내면 시원섭섭한 마음이 드는데, 이번엔 정말 시원한 마음이 든다. 많은 분들이 양규 장군에 관해 알게 된 것 자체로 기분이 좋아 섭섭한 마음이 들진 않는다.

- 이전에도 사극 출연 경험이 없진 않았지만 <고려 거란 전쟁>은 깊은 명맥에 비해 점점 제작이 품귀해지는 KBS 대하사극이다. 작품에 임하는 무게감이 전과 다르던가.

= 솔직히 말하자면 대하사극이라고 하여 느끼는 부담은 전혀 없었다. 그보다는 내 배역인 양규 장군에 연기로서 힘을 싣고픈 욕심이 있었다. 국궁, 승마 등 액션 연습을 철저히 했다. 진짜 양규처럼 보임으로써 이분을 알리고 싶었다

- 덕분에 국민 모두가 양규를 기억하게 됐다.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 “양규 장군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목표다”라고 선언했는데.

= 내가 양규 홍보대사다. 양규는 이순신, 강감찬 등의 인물과 비해봐도 화려한 전훈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내가 쓰고 연출한 드라마는 아니지만(웃음) <고려 거란 전쟁>을 통해 한 성웅을 세상에 알렸다는 뿌듯함이 있다. 작품 공개 전부터 촬영장에서 스탭들에게 “빨리 양규 장군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우직한 양규의 결기

- 제작진으로부터 배역 낙점의 이유에 대해 들은 적있나.

= 김한솔 감독님이 양규 장군의 캐스팅 후보군 중 내 이름을 보고 ‘이 사람이 양규다’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내 목소리가 양규를 표현하기에 제격이라고 판단하셨다고 전해 들었다. 사실 저음의 목소리 때문에 데뷔 초창기엔 캐스팅이 잘 안됐다. 주인공의 20대 친구를 연기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너무 ‘형’이었다. (웃음) 오히려 중년에 접어드니 목소리가 좋다는 칭찬을 많이 들어 감사하다. 목소리 덕분에 <고려 거란 전쟁>도 만났고 말이다.

- <고려 거란 전쟁>의 초반엔 강조(이원종)와의 관계가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서로 다른 길을 걷지만 둘은 각자를 향해 깊은 신뢰를 보이는 듯하다.

= 양규가 강조의 뒤를 이어 서북면 도순검사가 되지 않나. 당시 서북면은 고려의 최전방이라 지리적 요충지였다. 그 지역을 통솔하는 요직을 물려줄 정도니 강조와 양규는 평생 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고 느낄 줄 안다고 상정했다. 이원종 배우와도 “우리는 브로맨스다”라고 합의했다. (웃음) 이원종 선배가 현장에서도 정말 많이 이끌어줬다. 무거운 갑옷을 입을 때 몸을 풀 수 있는 갑옷 체조도 선배로부터 배웠다. 아마 양규는 강조가 반란을 주동하리라는 걸 짐작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조에게 “결심하셨습니까?”라고 넌지시 물을 수 있었다. 드라마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역할 준비를 위해 사료를 찾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발견했다. 강조가 죽은 이후 거란의 왕이 강조가 쓴 양 항복하라는 거짓 편지를 위조해 양규에게 보냈다. 그때 양규는 흥화진에서 “나는 왕의 명에 따라 싸우지, 강조의 명에 따라 싸우지 않는다”며 답신을 보냈다. 양규는 강조가 그런 편지를 보낼 리가 없다는 걸 알았던 것이다.

- 한편 양규는 드라마 전체에 걸쳐서 또 다른 명장인 김숙흥(주연우)과 함께한다. 유일하게 양규만이 야생마 같은 김숙흥을 구슬리는 것을 보면 어쩌면 양규도 젊은 시절 김숙흥 같은 구석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하게 된다.

= 정확히 같은 생각을 했다. 김숙흥은 젊은 양규고, 양규는 성숙한 김숙흥이다. 양규가 귀주로 김숙흥을 보내는 대사인 “귀주에도 너 같은 미친놈이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여기엔 미친 내가 있으니 귀주는 미친 네가 가라”는 의미였다.

- “쏴라” 못지않게 자주 등장하는 양규의 대사는 “무운(武運)을 빈다” 아닌가. 혼란한 시절을 사는 이들에게 위 문장에 함축된 감정의 무게는 남달랐을 것이다.

= 최고의 축복이자 무거운 인사다. 결국 그 속에 담긴 진의는 “살아서 돌아오시오”다. 처음 이원종 배우와 그 대사를 주고받을 때 선배의 연기에 담긴 에너지를 크게 느꼈다. 그래서인지 상대 배우와 “무운을 빈다”는 다섯 음절을 주고받을 때면 늘 장중한 감정과 에너지를 전하게 된다.

- 양규가 치른 모든 전투는 데이터만 놓고 따지면 무모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양규는 포기하지 않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고려인 포로를 구출해내려 사력을 다한다.

= 극 중에서 묘사되지 않는 1차 여요전쟁 당시 어쩌면 양규는 전장에서 아버지를 잃었을 것이라 상상했다. 양규는 한 차례 거란군의 잔인함과 가족의 죽음을 목도했기 때문에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길 절실히 바랐을지도 모른다. 6회 흥화진 공성전 장면에서 양규가 고려인 포로를 방패 삼아 진격하는 거란군에 활을 쏠 때 눈물이 났다. 그땐 “내 아들이 포로로 잡혀 있어도 나는 활을 쏜다”는 극한의 마음으로 연기에 임했다.

- 전쟁마다 활을 쏘느라 피딱지가 내려앉은 양규의 손 분장도 화제를 모았다.

= 처음에 감독님에게 늘 활을 쏘는 사람의 손이 성치 못할 테니 손도 분장을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을 때 감독님이 무척 좋아하셨다. 그래서 흥화진에서 보내는 시간의 경과만큼 문드러진 양규의 손이 탄생했다. 꼭 언급하고 싶은 이름이 있다. 차상훈 분장감독님이 정말 고생하셨다.

- 양규가 전사하는 16회의 단병접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300보, 200보, 100보 그리고 10, 9, 8, 7의 처절한 카운트다운. 김한솔 감독은 이 장면에서 거란군에 엄청난 공포를 선사하는 양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전했다. 화살과 칼을 맞아가며 야율융서(김혁)를 향해 진격하는 양규의 마지막 혈전을 어떻게 만들어갔나.

= 드라마 현장은 아무래도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런데 마지막 게릴라전만큼은 정말 제대로 준비하고 싶었다. 그래서 액션 스쿨에서부터 무술감독님을 비롯해 촬영팀, 제작팀이 모두 함께해 디테일한 합을 맞춰갔다. 나의 액션이 100합이었고, 주연우 배우의 액션이 80합이었다. 양규가 머리를 맞은 후 “100보!”를 외친 장면부터는 원테이크로 찍었다. 모든 카운팅엔 “저 새끼를 죽이리라” 하는 양규의 결기가 서브 텍스트로 깔려 있다. 양규는 카운팅 중 ‘여섯’에서 김숙흥을 바라본다. 이때도 “숙흥아, 형이 여섯 걸음만 더 가면 거란 놈들을 죽일 수 있어”라는… (울컥하며 이내 눈물이 고인다) 마음을 담았다. 갑자기 눈물이 나네.

- 하필 거기서 죽어가던 김숙흥이 “형님”을 외치는 바람에 장면이 더욱 구슬퍼졌다.

= 주연우 배우의 아이디어였다. 감독님도 매우 좋아하셨다.

연기라는 행복

- 한창 배우로서 일이 안 풀리던 시절 떡볶이 가게를 차릴까 고민했다고 들었다.

= 사전 제작이었던 <태양의 후예>(2016)를 다 찍은 직후 방영을 기다릴 때 당시 논의 중이던 작품들이 전부 무산됐다. 공개 이전인 <태양의 후예>를 제외하면 작품이 없었던 터라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다행히 <태양의 후예>가 크게 성공해서 이후로 많이들 나를 찾아주셨다.

- 연기를 포기할까 고민하던 때에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 (활짝 웃으며) 연기가 너무 좋다! 현장으로 출근할 때의 새벽 공기와 밴 속에서 라이트 하나 켜놓고 대본을 볼 때의 안락함을 사랑한다. 그때가 내가 생각하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고, 죽기 직전에도 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할 것이다. 관객, 시청자와 연기로 소통하는 것도 큰 원동력이다. 커리어를 지속할수록 연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 최근 쉼 없이 차기작이 이어졌다. 작품 사이의 휴식기엔 무얼 채우고 무얼 비우나.

= 지난 3, 4년간 쉼 없이 맞물려 작품을 찍었다. <고려 거란 전쟁> 촬영을 끝낸 지금에서야 조금 휴식을 갖는데 난 며칠만 쉬어도 힘들다. 쉬는 시간에도 연기가 하고 싶다. 평소 취미랄 것도 거의 없다. 데일리 루틴이라고 해봐야 아침에 헬스장 가고 독서하는 것 정도다. 일상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관찰이다. <한국인의 밥상> 같은 프로그램을 보며 우리네 사람들이 살아가는 풍경을 관찰하고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좋다. 단역 생활을 할 때 오래 쉬어서 괜찮다. (웃음) 단역을 전전하던 때 일기에 써내려간 문장이 있다. ‘자유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보지 않은 사람은 자유의 무서움을 모른다.’ 최근에야 감사하게도 끊임없이 작품을 찍을 수 있었지만, 무명배우 시절이 길었기 때문에 아직도 현장이 가장 좋고 또 고프다. 연기가 취미면 좋겠다.

- <고려 거란 전쟁> 13회에서 전술을 짜는 양규의 대사가 배우의 숙명과 맞닿은 대사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감춰야 하는 것은 철저하게 감추고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줘야 하네.” 양규의 바람과 달리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는 일은 의도와 다르게 감추고 싶은 점이 증폭돼 드러나기도, 막상 보이고 싶은 것들은 잘 발현되지 않기도 하니 말이다.

= 그걸 잘해내는 것이 연기자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걸 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연기를 잘한다고 평가받을 수 있지 않을까. 카메라 앞에 서면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부분이 보인다. 연기를 사랑하지만 매 현장이 쉽지만은 않다. 낯선 동료와 정신없는 현장에서 다양한 감정을 연기해야 하지 않나. 감추고 싶은 부분은 잘 가둬둔 채 내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게 배우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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