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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2001-05-29

진주만

Story

파일럿을 꿈꾸는 소년 레이프와 대니. 전쟁 후유증으로 종종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둔 대니를 레이프는 형처럼 감싼다. 세월이 흘러 최고의 공군 파일럿으로 장성한 레이프(벤 애플렉)와 대니(조시 하트넷). 레이프는 신체검사장에서 만난 간호장교 에블린(케이트 베킨세일)과 사랑에 빠지지만, 영국 공군에 자원해 2차대전에 참전한다. 그리고 전사소식이 날아든다. 진주만으로 함께 배치된 대니와 에블린은 친구와 연인의 죽음을 위로하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그러나 에블린이 임신을 확인한 날 밤, 레이프는 살아 돌아오고 이튿날 새벽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이 혼란에 빠진 세 연인을 덮친다.

Review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똑같은 스타일로 그리는 게 중요해. 일단 유명해지면 계속 그런 식으로 나가야 해.” 이 말은 천재 낙서화가의 일대기를 그린 <바스키아>에 나오는 대사지만, 현대 할리우드에서도 통하는 지혜다. 감독이나 배우가 스튜디오에 전속됐던 클래식 할리우드와 달리 계약으로 헤쳐모이는 시스템 아래서 감독들은 한눈에 인지할 수 있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구축해야 한다. 그것이 곧 상품가치이기 때문이다.

<나쁜 녀석들>(1995·세계 박스오피스 1억6천만 달러), <더 록>(1996·3억달러 추산), <아마겟돈>(1998·5억5천만달러 추산)에 이어 <진주만>에서 네 번째 도킹한 제리 브룩하이머-마이클 베이 콤비는 1990년대 할리우드산 최고 브랜드의 하나다. 이 브랜드의 상품 특징은 스피드와 에너지와 화염에 대한 사춘기적 집착. 베이 영화의 카메라는 절대 가만있는 법이 없으며 단순한 전-후진 정도로는 만족을 모른다. 팬과 틸트를 한몫에 해치우는 카메라가 그 자체도 움직이고 있는 피사체를 향해 달려들 때, 관객은 스쳐 비껴가는 둘 이상의 동세 중간에서 몸이 붕 뜨는 흥분을 느낀다. 이 흥분이야말로 나이키의 날렵한 꼬리나 샤넬의 엉킨 두 고리와 같은 브룩하이머-베이 영화의 ‘로고’다.

과연 그들의 ‘미다스 손’은 신세기에도 영험할 것인가. <진주만>은 그간 승승장구한 공식을 1억4500만달러라는 단일 스튜디오 사상 최대의 예산으로 강화하고 그 위에 PG-13등급의 휴먼 드라마를 덧입히고자 한 야심작이다. 언뜻 간과하기 쉽지만 초특급 대박액션영화에는 항상 액션 이외의 묘약이 있는 법. <진주만>은 <더 록>의 연기 카리스마, <아마겟돈>의 유머가 해낸 역할을 우정과 로맨스에 맡겼다. <브레이브 하트>를 쓴 랜달 월레스의 각본은 우정과 로맨스를 삼각형 안에 모은다. 연인이 죽은 줄만 알고 그 친구와 둥지를 틀었는데 연인이 난파로부터 살아 돌아온다는 ‘이노크 아든 스토리’의 수천 번째 개정판이다.

<진주만>의 구성은 문단나누기 연습용 예문처럼 뚝뚝 끊어진다. 전반 1시간20분가량 1940년대 영화풍의 연애와 우정이 흘러가고 나면, 논스톱으로 약 25분, 통틀어 무려 40여분에 걸친 진주만 폭격이 영화의 센터피스 노릇을 하고 다음 50분은 미국의 명예회복을 위한 복수전에 할당된다. 좀더 자세히 보면 서두의 레이프가 참전한 공중전, 중간의 항공모함급의 진주만 공습 시퀀스, 결말의 도쿄 공습이 액션영화 <진주만>의 거멀못 구실을 하는 셈. 700개의 다이너마이트에 4천갤런의 가솔린을 투약했다는 진주만 폭격장면은 앞서 공들여 그린 ‘관포지교’며 순애보를 깡그리 잊게 만들면서 ‘계산된 카오스’의 귀재로서 마이클 베이의 면모를 과시한다. <진주만>에서 베이는 카메라의 조급증을 전작보다 억누른 대신 폭파와 아비규환, <스타워즈>식 격추게임의 파상공세로 배팅한다. 컴퓨터로 뽑아낸 기뢰의 시점숏은 근사하고, 일요일 새벽 한가롭게 펄럭이는 빨래들 위로 일본 전투기들이 먹이를 채려는 솔개처럼 저공비행하는 이미지는 <인디펜던스 데이>에서 외계인 모선의 그림자가 워싱턴 시가지에 드리워지는 장면만큼이나 소름을 일으킨다.

그러나 “한편 만들 때마다 감독으로서 성장하겠다”는 마이클 베이의 야심은 진주만 상륙작전에 성공한 것 같지 않다. 결말이 뻔한 실제 스토리를 갖고 서스펜스를 조율하고 터뜨리는 솜씨만 봐도 <진주만>은 나란히 국내 개봉하는 에 못 미친다. 박스오피스에서도, 로맨스 플롯부터 러닝타임에 이르기까지 자주 비교된- 혹은 벤치마킹한- <타이타닉>만한 괴력을 발휘하긴 힘들어 보인다. 문제는 관객의 말초신경과 감정을 동시에 장악하는 손아귀 힘의 차이. 러브스토리와 재난내러티브를 한 가닥으로 엮어낸 <타이타닉>과 달리, 감정의 그래프와 액션의 능선이 절정에서 만나지 못하는 <진주만>은 객석의 감도가 뚝 떨어진다. ‘뜻깊은’ 영화임을 꾹꾹 눌러 강조하기 위해, 진주만 공습과 두리틀 대령의 도쿄 공습이 갖는 현대사적 중요성을 핵심 체크해주는 내레이션도 낯간지럽다. 시종일관 진지하고자 한 이 영화의 의도되지 않은 유머는 전형적인 베이식 오버액션들로부터 나온다. 오우삼에게 비둘기가 있다면, 마이클 베이에게는 오렌지색 석양 위로 날아가는 전투기의 비장한 실루엣과 슬로모션으로 출동하는 ‘진짜 사나이들’의 정면 롱숏이 있다. 애완견은 어떤 아수라장에서도 죽지 않으며, 총격으로 넝마가 된 성조기는 애잔하게 파도에 흔들린다.

전시에 나왔다면 모병 캠페인영화로도 손색없을 만큼 미국인의 애국심에 불을 지피지만, <진주만>은 공격 당일까지 외교 테이블에 나온 일본의 비신사적 태도를 짚고 넘어갈 뿐 적을 야만적이고 비열한 인종으로 몰아붙이는 촌스러운 무리수는 두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을 짜증나게 하는 것은 성조기 펄럭이는 의례적인 애국 메시지가 아니라, 착륙도 연료도 불안한 ‘자살 작전’을 강행하면서 “나는 미국인이다”라는 한 마디로 극중 인물들과 관객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는 논리의 게으름이다. 상상 가능한 모든 형태의 불꽃과 폭음으로 감각을 맹공하는 <진주만>에 보너스가 있다면, 극장을 나서는 순간 그토록 번잡스럽던 세상이 몹시 고요하게 느껴진다는 점. 우리가 탐닉하는 나쁜 영화들의 계절이, 남세스러운 쾌락의 한철이 또다시 돌아왔다.

김혜리 기자 [email protected]

500만달러어치 애국 효과...<진주만> 함상 이벤트

블록버스터답게 <진주만>의 홍보는 요란했다. 60년 전 일본군들이 일요일 새벽을 틈타 기습해왔던 바로 그 진주만에 정박해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핵 항공모함 스테니스호를 통째로 빌려 지난 5월22일 저녁(현지시각) 예산 500만달러짜리 이벤트를 열었다. 참석자는 미태평양함대 사령관, 전 국방부 차관 등 군 고위관계자와 2차대전 참전용사 가족, 마이클 베이와 벤 에플렉 등 <진주만> 관계자 및 할리우드 인사들, 그리고 미국 전역과 전세계에서 불러온 취재진 600명과 추첨으로 뽑은 일반인 등 모두 3천여명.

이 이벤트의 메인 메뉴는 <진주만>의 함상 야외시사회였지만, 시사회 전후의 행사들은 온통 미국인의 애국심과 자긍심을 고취하려는 것들로 채워졌다. 가수 페이스 힐이 미국 국가를 부르고, 미 해군합창단이 ‘아메리카’를 외치는 곡들을 연달아 합창하고, 진주만 생존자와 이 영화에 나오는 두리틀 편대원들이 백발의 모습으로 단상을 채웠다. 그러는 사이에 폭죽이 터지고, 참석자들은 기립박수를 보내고…. 공식적인 행사가 끝난 밤 11시부터는 갑판 위와 배 안에서 두 차례 성대한 파티가 열려 댄 애크로이드, 쿠바 구딩 주니어 등이 춤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진주만의 상쾌한 밤공기가 파티에 더할 나위없이 좋은 조건을 제공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진주만>이 애국심을 마케팅 포인트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행사였는데, 참석자 중 이런 ‘상술’에 불쾌감을 표시하는 이들이 보이지 않는 건 묘했다. 이념과 자본이 행복하게 결합하는 미국사회의 한 특징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막상 <진주만>의 함상 시사가 끝난 뒤 박수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500만달러어치의 효과를 발휘할지 낙관하기만은 쉽지 않아 보였다.

호놀룰루=임범 기자/ <한겨레> 문화부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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