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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 '리코리쉬 피자'

청춘과 사랑에 대한 가벼운 질문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는 숙제와도 같다. 황홀경에 이르는 영화적 밀도와 장면의 완성도는 언제나 경탄을 자아내지만 같은 이유로 점차 벽이 높아져만 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언젠가부터 폴 토머스 앤더슨 영화의 중력은 점점 무거워졌고 그만큼 선뜻 발을 들이기 쉽지 않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신작 <리코리쉬 피자>는 조금 다르다. 1970년대로 돌아간 이 영화는 15살 소년의 성장영화 같기도 하고, 젊은 청춘남녀의 로맨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영화의 공기는 무대로 삼은 히피 정신의 자유분방함으로 가득하다. 잠깐 쉬어간다고 했지만 명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펀치 드렁크 러브>처럼 폴 토머스 앤더슨의 가볍지만 잊을 수 없는 감초 같은 영화. 뜨겁고 설레고 불안한 청춘의 나날은 어떻게 시대를 관통하는가. 폴 토머스 앤더슨이 지나온 궤적을 중심으로 <리코리쉬 피자>가 남기고 가는 그리움의 잔향을 전한다.

완벽주의자 폴 토머스 앤더슨이 돌아왔다. <팬텀 스레드>(2017) 이후 5년 만이다. <리코리쉬 피자>는 그의 9번째 장편영화로, 히피 정신으로 가득찬 1970년대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한 청춘물이다. 전작 중에서는 <펀치 드렁크 러브>(2002)와 가장 가까운데, <팬텀 스레드>와는 아주 다른 톤을 띤다. 그러고 보니 <팬텀 스레드> 개봉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마스터>(2012)를 떠올리며 극장을 찾았지만 의아한 듯 놀라며 영화를 봤다. ‘심리학적’이란 것 말고는 딱히 공통점이 없었다. 어쩌면 이 문제가 그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관통하는 것 같다. 우린 늘 예측한 장르의 선을 넘는 그의 신작들과 마주친다. 이를 다재다능하다고 해야 할지, 오만하다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그는 단 한번도 실패한 적 없고, 단 한 차례도 순응한 적 없는 연출자란 점이다.

1973년 로스앤젤레스, 알라나(알라나 하임)와 개리(쿠퍼 호프먼)는 고등학교에서 함께 사진을 찍으면서 만난다. 25살의 사진 촬영 스탭과 15살의 아역배우 출신 학생은 단번에 운명적으로 이끌린다. 젊음이 꽃피는 교정의 산책로를 따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화면이 그들의 교차된 감정을 담는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다. 감독의 입장에서 이번 작품의 선택지는 꽤나 무겁고 광활했을 것이다. 하지만 <팬텀 스레드>의 성공 이후로 폴 토머스 앤더슨은 완전히 처음으로 돌아가는 의외의 선택을 했다. 신인배우들이 전반을 장악하는, 흡사 <마스터>와 같은 강한 사건이 없는, 스토리가 무작위로 뒤섞이는 가벼운 방식을 택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시시덕거리는 분위기가 영화 내내 이어졌다.

레퍼런스의 혼합

주인공은 두명이다. 알라나 역할은 감독과 이전에 함께 뮤직비디오 작업을 한 적 있는 밴드 ‘하임’의 막내인 알라나 하임이 맡았고, 개리 역할은 감독의 영화 5편에 출연했던 배우 필립 시모어 호프먼의 아들인 쿠퍼 호프먼이 맡았다. 둘 다 영화계 가까이에서 성장했지만, 이 작품이 그들의 데뷔작이다. 실제로도 그렇고 극중에서도 차이가 많은 연상연하 커플이지만 해당 사항이 부각되진 않는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대사가 아니라면 강조되지 않을 정도다. 그외에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일반인 배우들이 다수 등장한다. 이들은 여름날의 캘리포니아를 경험한 적 있는, 지역 출신의 비전문 배우들이다. 대표적으로 알라나의 가족과 폴 토머스 앤더슨의 실제 가족도 화면에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특히 작은 배역을 맡은 스타들의 활약이 눈에 띈다. 그들이야말로 영화의 진짜 ‘감초’(리코리쉬)다. 배우 윌리엄 홀든을 연기하는 숀 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연인이었던 존 피터스 역의 브래들리 쿠퍼, 정치인 조엘 웍스를 연기하는 베니 사프디 등이 차례로 등장해서 할리우드 주변부의 뒷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그중 홀든 역의 숀 펜은 자주 ‘도곡리 다리’란 단어를 내뱉는다. 한국전쟁 소재의 영화 <원한의 도곡리 다리>(1954)에서 따온 말로, 홀든의 대사도 해당 영화에서 빌려왔다. 이 밖에 잭 니콜슨의 아들, 스티븐 스필버그의 딸, 마이클 자키노의 아들이 차례로 잠깐씩 출연한다. 카메오 중 제일 재미있는 역할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아버지가 맡았다. 그는 개리에게 물침대를 파는 남자로 나타나 강한 인상을 남긴다.

수많은 참고자료가 사용되는 혼합의 방식은 폴 토머스 앤더슨에게 있어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다. 데뷔작인 <리노의 도박사>(1996) 촬영 당시부터 그는 최종편집 권한인 ‘파이널 컷’을 고집했는데, 그 덕분에 고유한 연출 스타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세 번째 장편 <매그놀리아>(1999)를 찍을 당시 프로듀서였던 밥 슬레이는 편집 분량에서 15분의 1 정도를 잘라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폴 토머스 앤더슨은 그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했고, 그는 자신의 주장이 옳았음을 보였다. 그렇게 다소 비순응적인 태도가 마치 연출법의 일종처럼 그의 영화 내부에 자리 잡는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편집증적 작업방식은 유명하다. <팬텀 스레드>의 경우, 프리프로덕션 과정에서 “내 일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패션 세계를 배우는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는 집요하게 해당 분야를 연구했다. 이런 성향 탓에 그는 한때 스탠리 큐브릭과 비교되기도 했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관계’를 키워드로 해석이 진행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지배구조 해석이 내러티브의 중심이다. 그런데 이 구조는 겉보기에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연출법뿐 아니라 플롯마저도 ‘신경증적’이다. <부기 나이트>(1997)의 오프닝 장면을 보자. 수많은 군상이 등장하는 길고 화려한 스테디캠숏에서 화면에 비치는 것은 주인공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군상들이다. 말 그대로 시각적 자료가 그의 주변부를 드러내며 출발한다. 이러한 구상은 계획도 어렵지만 실현은 더 대단하다. 이후에도 탐미적인 그의 연출은 계속된다. <매그놀리아>의 오프닝 시퀀스, 약 2분30초간 공간을 부유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앞으로 이 영화가 펼칠 세계관의 모습을 함축한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도시전설을 아우르려는 듯, 폴 토머스 앤더슨의 시선은 모호하고 넓게 그리고 분명하게 다층적인 세계의 표피를 해체한다.

<펀치 드렁크 러브>에 이어 <데어 윌 비 블러드>(2007)에 이르러 이런 식의 자의적인 미장센이 주춤한다. 대신 배역과의 대화가 늘어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내러티브에 대한 집중도도 높아진다. 화려하고도 격렬한 스테이징은 그사이에 어느 정도는 축소된다. 그런 면에서 <팬텀 스레드>는 초기와 달리 분위기가 전환된 영화라 바라보아야 옳다. 감독은 당시에는 “좁고 높은 전형적인 런던 주택에서 촬영하면서 크레인이나 스테디캠을 사용하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분명히 무대의 물리적인 한계가 영화를 한층 고전적으로 바꾸어놓은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데어 윌 비 블러드>와 마찬가지로 <팬텀 스레드>는 시각보다 내러티브에 더 집중하는 영화다. <리코리쉬 피자>는 어떠한가. 단언컨대 이번 영화도 초기 방식에 더 가깝다. 패스티시적 기법을 다시 불러온 듯, 주인공들은 군중의 세계를 떠다닌다.

출렁이는 기억과 감정들

영화의 내용으로 돌아가자. 10살이나 어린 청소년이 진취적으로 돌진한다. 이때, 상대방 여성은 적당히 거절하며 거리를 두려 애쓴다. 그렇다고 둘의 모습이 연인이 아닌 것도 아니다. 플라토닉한 이성 관계에 더 가깝다. 사람들 앞에서는 “연인이 아니야”라고 말하지만 곧이곧대로 듣는 이는 없다. 아니, 이러한 상황이야말로 진짜 첫사랑의 모습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물 흐르듯 흐르는 관계의 애매모호함이야말로 이 영화의 숨겨진 주제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제 개리가 판매하는 ‘물침대’의 본질이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마치 모두의 관계를 형상화한 결과물인 듯, 이 물질은 출렁거리고 있다. 과거의 기억을, 시간을, 그리고 육체의 감정을 고정되지 않는 물컹물컹한 상태로 바꾸어놓는다. 돌이켜보면 이 영화에서 시간은 물 흐르듯 흘렀다. 그녀를 만나고 금세 하루가 지나 다음날이 되었고, 다시 몇달이 흘러 그들은 뉴욕에 머물게 된다. 그사이에 개리는 배우라는 직업을 사업가로 바꾸었고, 그건 알라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개리 대신에 배우 일을 시도했고, 그러다 정치계에 발을 들였다. 그 덕에 개리는 업종을 전환해서 핀볼게임에 뛰어들었다. 이 모든 장면들이 부드러운 탄성을 가지고 시간의 주름을 헤집어놓는다. 역시 <리코리쉬 피자>는 근래 영화들보다는 초기작에 더 가깝다.

과하다 싶게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주요 플롯과 관련 없는 내용에서 유명 배우가 강조되고, 이들이 일으킨 우연한 바람이 주인공의 선택까지 뒤흔든다. 그리고 어느새 처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지점에 인물들이 놓여 있다. 이번에 감독은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파노라마 시퀀스 숏을 자주 보여준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한번 건너 다시 등장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렇지만 이 트래킹숏은 과도한 과시로 이어지지 않는다. 아마도 폴 토머스 앤더슨은 자신의 시각적 스타일이 주제와 연결돼 있음을 증명하려 했던 것 같다. 미학적 스타일은 반복되지만, 화려함을 위해 소비되지 않는다. 다만 서서히 쌓여서 거대한 의미 구조를 형성할 뿐이다.

<팬텀 스레드> 이후 모두가 폴 토머스 앤더슨의 다음 영화를 궁금해했다. 그런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그는 지인들을 대거 끌어안고 펑키한 러브 스토리를 풀어놓는다. 그렇지만 그의 로맨틱 코미디는 일반적인 장르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유명한 레퍼런스들을 넓게 펼쳐서, 한꺼번에 토핑을 뒤섞어서 제공한다. 복잡하게 흩어진 모티브를 따로따로 음미할 필요는 없다. 대신 한손에 쥐고 가볍게 삼키면서 질문해야 한다. 당신은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있는가, 혹은 우리가 생각하는 진짜 세상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되물어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전에 그가 보인 비관론적 전망이 이곳에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가벼움’이야말로 <리코리쉬 피자>에 덮인 보이지 않는 주요 재료일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상호 보완적 존재들이다. 이 낭만적인 하모니야말로 영화의 진짜 핵심이다.

<리코리쉬 피자> 트리비아

1970년생인 폴 토머스 앤더슨은 1973년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자전적인 추억보다 상상으로 채운 부분이 많고, 플롯 대부분에 역사적인 상황을 이용했다.

첫째, 제목 ‘리코리쉬 피자’는 산페르난도 밸리에 위치한 레코드 가게 이름에서 따왔다. 남부 캘리포니아에 존재했던 레코드 체인 이름으로, 1987년에 ‘샘 구디’로 명칭이 바뀌었다.

둘째, 물침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발명되어 1971년에 특허받은 물품이다. 주인공은 마치 선지자처럼 물침대의 유행을 예측했다.

셋째, 영화 속 석유 파동은 1973년 10월에 일어났다. 아랍 산유국을 중심으로 석유 수출이 금지되어 가격이 치솟았으며, 당대 사건이 ‘제1차 오일쇼크’라 명명되었다.

넷째, 핀볼게임은 슬롯머신의 일종으로 불법 도박기구 취급을 받았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1939년 이후 줄곧 금지되었다. 핀볼의 합법화는 1976년에 이뤄지는데, 확률 게임이 아니란 점이 밝혀지며 금지령이 철회됐다.

다섯째, 존 피터스와 관련된 일화는 허구이다. 미용사 출신으로 알려진 이 폭력적인 괴짜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스타 탄생>(1976)을 제작하며 프로듀서 직함을 얻었다. 감독은 집요하게 그의 주변부를 파고들었지만 유명세에 적합한 일화를 찾지는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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