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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바디 페이머스> 본 아저씨의 꼬리에 꼬리를 문 단상
2002-05-23

정열, 대중매체, 진정성, 그리고 안트워프

● 도미니크 데루데르 감독의 <에브리바디 페이머스>는 질박한 외모의 17살 소녀 마르바가 스타 가수로 탄생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서사의 굵은 줄기는 텔레비전이 주도하는 현대의 쇼비즈니스 세계를 질주하고, 작은 줄기는 딸의 성공을 위해서 뭐든 할 각오가 돼 있는 무능하고 무모한 전통적 아버지의 부정(父情) 행각을 좇는다.

1. 아름다운 자연에 넋을 잃거나 아름다운 건축물 앞에서 감탄사를 연발하는 데는 아무런 윤리적 자의식이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아름다운 여성 앞에서 호들갑을 떠는 것은, 미스 코리아 대회를 둘러싼 논란에서 보듯, 더러 윤리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 거기에는 사람의 외모에 공개적으로 미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그 사람의 인격을 훼손한다는 판단이 깔려 있을 것이다. 말할 나위 없이, 외모(만으)로 사람의 값어치를 판단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렇다면, 지적 능력(의 표현이라고 생각되는 교육적 배경)(만)으로 사람의 값어치를 판단하는 것은 그것보다 덜 부당한 일일까?

1.1. 영화 속에서 마르바가 극적 반전을 거쳐 신데렐라가 되는 것은 외모라는 기준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린 (집단적) 정열의 힘이다. 비록 그 정열을 끌어낸 것은 요행의 여신에게 도움을 받은 방송 제작자의 연출 능력이었지만. 그리고 톱스타(쿨한 용어로는 ‘디바’라고 한다지?) 데비가 다 떨어진 인생의 해고 노동자 윌리에게 끌리는 것은 지적 능력(의 표현이라고 생각되는 직업의 위세)이라는 기준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린 (개인적) 정열의 힘이다. 정열은, 적절한 오리엔테이션을 거치면, 기존 가치체계의 경직성을 눅여주는 약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정열은, 제어되지 않을 때, 최악의 중우(衆愚)정치를 풀무질하는 검은손이 될 수도 있다.

2. 속된 말로 ‘뜨기’ 전의 연예인들이 매니저나 방송사 프로듀서에게 성을 ‘상납’한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나는 알지 못한다. 영화를 보니, 우리 사회만이 아니라 벨기에에도 그런 관행(이나 적어도 그런 관행에 대한 소문)이 있는 모양이다. 마르바는 옷을 벗으라는 데비의 매니저 마이클의 요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이성과 잠자리를 할 때 뭔가 역겨움이, 자기 혐오감이 치밀어 오르지 않을까? 자신이 윤리적으로 글러먹었다는 느낌말고, 미적으로 어긋나 있다는 느낌 말이다.

3. 대중매체가 관리하는 현대에는 누구나 유명해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유명하다는 것은 돈을 쉽게 버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메시지 가운데 하나라면, 그것을 아주 틀린 생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구나 유명해질 수 있다는 것은 possible의 영역이지, probable의 영역은 아닐 것이다.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곧잘 대중의 누선(淚腺)을 건드려야 하고, 대중의 누선을 건드리려면 뭔가 이색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별난 빛깔’은 브라운관이라는 세트 안에서 세심하게 연출돼야 한다. 마르바를 한순간에 스타로 만든 것은 그녀를 향한 헌신적 부정이 브라운관을 매개로 사람들의 누선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데비의 음반 판매량에 가속이 붙은 것은 그녀의 피랍이 텔레비전 뉴스를 탔기 때문이다. 이 사건들은 둘 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대니얼 부어스틴이 얘기한 바 ‘가짜 사건’이다.

3.1. 가짜 사건이 완전한 무(無)에서 창출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도 최소한의 질료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질료가 자극적일수록 사건의 창조가 손쉬워진다. , , 같은 앨범을 통해 컨트리뮤직의 신화를 만들고 있는 루이지애나 출신의 여가수 메리 고셔의 경우도, 브라운관 앞 대중의 누선을 자극할 만한 동성애, 가출, 알코올중독, 마약복용, 복역 등 성장기의 극적인 질료를 갖추지 않았다면, 오늘날 그녀에게 비쳐지는 스포트라이트가 이토록 집중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불우’라는 상징재를 보유한 그녀의 영광이 동성애나 사회적 부적응에 대한 체제의 관용을 조금도 늘리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것들은 단지 현재의 밝음을 더 찬란하게 만드는 과거의 어둠으로, 일종의 데커레이션으로 소비될 뿐이다. 메리 고셔의 양지가 따스할수록, 동성애자와 사회 부적응자의 음지는 더 춥다. 그런 사회적 소수파에게 우리의 메리가 건네는 연대의 진정성은 이런 콘트라스트를 더 두드러지게 만들 뿐이다.

4. 한 유럽 저널리스트는 중국이나 일본에 견주어 한국이 유럽인들에게 어떤 정형화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많은 동아시아인들에게는 아마 벨기에가 그럴 것이다. 유럽인들에게 한국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분해돼버리듯, 동아시아인들에게 벨기에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사이에서 분해돼버린다. 영화 속의 도시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플랑드르의 한두 도시는 내게 비교적 익숙하다. 그곳에 가고 싶다. 안트워프의 중앙역에서 스헬데강까지를 햇살 속에서 느릿느릿 걷고 싶다.고종석/ 소설가·<한국일보> 논설위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