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망한다, 안동규가 돈버는 것을.” 한 영화제작자는 영화세상 대표 안동규씨가 번번이 흥행에 실패하자 이렇게 말했다. 영화세상에서 제작한 첫 영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3)에 빗댄 표현이다. 90년대 초 신철, 유인택과 함께 프로듀서 1세대 3인방으로 불렸던 안동규씨는 지난 10년간 제작하는 영화마다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하는 불운에 시달렸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 <천재선언>(1995), <박봉곤 가출사건>(1996),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1996), <베이비세일>(1997), <북경반점>(1999) 등 내리 7편이 우울한 성적표를 내놓았다. <북경반점> 이후 2년간은 최대 고비였다. 차압이 들어오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위축돼서 시나리오건 감독이건 배우건 베스트가 아니면 제작하겠다는 결심이 안 서는 상태”였다. 그런 만큼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에 거는 제작자 안동규씨의 기대는 각별하다. 3년 만에 내놓는 이 영화가 영화세상의 도약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인가? 흥미로운 건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에 쏠리는 이런 관심이 안동규씨나 제작, 투자 관계자들만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충무로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나는 소망한다, 안동규가 재기하는 것을.”
늘 돈 못 버는 영화를 제작했는데도 그에 대한 신뢰가 여전한 것은 신기한 일이다. 20년간 영화현장을 지키면서 안동규씨는 적어도 사람을 잃지는 않았다. 지금 영화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영화세상과 관련있던 이들은 꽤 많다. 싸이더스 대표 차승재씨를 비롯해,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김준종, <친구>의 현경림, <챔피언>의 조원장 등이 영화세상 출신 프로듀서들이며 여러 영화사 기획실에 영화세상 출신 인력이 포진해 있다. 지금도 1년에 1번 이상 모임을 갖는 걸 보면 척박했던 90년대 영화세상이 일터이자 배움터 노릇을 톡톡히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필름을 파는 회사에서도 밀린 외상값을 독촉하기보다 “이번엔 돈을 벌어야 될 텐데” 하고 걱정을 해주는 쪽이다. 영화세상은 올해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를 필두로 황규덕 감독의 <가을로> <인랑> 리메이크 등 바쁘게 움직일 예정이다. 5월14일 영화세상 사무실에서 만난 안동규씨는 마침 새로운 직원을 뽑기 위한 면접을 막 끝낸 참이었다. 사무실 곳곳에서 의욕이 샘솟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지난 3년간 어떻게 보냈나.
김의석 감독의 <청풍명월> 제작하려고 했는데 제작자인 안동규의 흥행실적이 문제가 돼서 제작비 조달이 안 되고 그랬으니까. 결국 <청풍명월>은 다른 데서 제작하게 됐다. 돌아보면 주변 환경이 도와주지 않아서라기보다 스스로 위축이 돼서 제작에 못 들어간 것 같다. 남들 같으면 촬영에 들어갔을 정도로 준비가 됐어도 스스로 성공시킬 수 있을까 염려하며 주춤주춤했다. 다음 작품은 무조건 흥행이 보장돼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하니까 시나리오, 감독, 배우, 스탭 모든 조건이 베스트여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었다.
그렇지만 모지은 감독은 데뷔하는 감독인데다 조감독 경험도 없는, 말하자면 검증이 되지 않은 연출자인데.
안전하게 가자고 생각했지만 영화는 결국 모험을 하게 된다. 28살된 어린 여자감독인데 누가 봐도 불안한 건 사실이다. 투자사 입장에서는 특히 그럴 거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100%면 밀고 가는 게 맞다. 남의 말을 의식하지만 결국은 자기 확신이 중요하다.
90년대 연달아 흥행에 실패하면서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영화에 대한 감각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의심스럽진 않았나.
잘못한 것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제작비 받아서 빼돌린 적도 없고 돌아봐도 영화에 대해 잘못한 건 별로 없다. 내가 정당하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감각이 떨어진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렇다고 관객이 내 영화를 몰라준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프로듀서에게 흥행은 결국 규모에 맞는 영화를 만들었느냐에 귀착되는 것 같다. 어떤 영화는 1억원 들여 만들어야 하고 어떤 영화는 30억원 들여야 된다. 일률적으로 전국 100만명을 동원 못했다고 실패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영화의 성공여부가 돈을 벌었느냐로 결정되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돈을 못 벌어도 만들어야 할 영화는 제작하는 게 맞다. 다만 내가 이번 영화는 꼭 성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수순이다. 어느 정도 자본이 있으면 흥행에 대한 강박관념을 좀 덜면서 제작할 필요도 있다. 그때까진 수순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다.
자리가 잡히면 지금과 다른 영화를 만들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결국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다. <천재선언>은 회사 전 직원이 반대했는데 내가 밀어붙여서 제작했다. 이장호 감독 영화를 만들고 싶었으니까. 정지영 감독 영화를 하고 싶어서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만들었고. 어렸을 때 뭘 하고 싶었는지 늘 되짚게 된다. 지금 기준보다 20살 때 생각했던 기준이 올바르다고 믿는다. 그때 하고 싶었던 거 그걸 하면서 가야 된다. 그러자면 사고의 구조, DNA 구조가 비슷한 감독을 만나야 된다. <좋은 사람…>의 모지은 감독이 그런 경우다.
<좋은 사람…>으로 한방에 전세를 뒤집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 같다
한방에, 그런 건 없다. 순차적으로 가는 거다. 한번도 홈런타자 소리 안 들어봤기 때문에 손해 안 보는 영화, 조금이라도 이익이 나는 영화면 된다. 많이 벌면 좋겠지만 말이다.
90년대 초 등장한 기획영화의 1세대 프로듀서로 알려져 있다. 자신의 위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사실 기획영화가 새로운 물결을 일으킬 때 나는 거꾸로 감독이 전적으로 책임지는 영화를 만들었다. 장길수, 정지영, 이장호, 김태균 등이 그랬다. 감독이 시나리오부터 캐스팅까지 OK하고 난 그냥 제작비 구해오는 게 일이었다. 지금은 완전히 반대다. 시나리오만큼은 내가 OK해야 진행되는 시스템이다. 확실히 그 점은 달라졌다. 사실 지난 3년간 내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작가를 찾아다녔다.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심사 같은 걸 제의받으면 꼭 참가했다. 보통 300편씩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빠짐없이 보고 마음에 드는 작가는 나중에 따로 접촉했다. <가을로>를 쓴 장민석, 남인정 작가도 그렇게 만났다.
요즘은 감독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경우가 많은데 앞으로는 철저한 기획영화를 만들겠다는 말로 들린다.
어려서부터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고 생각했고 여전히 영화에서 최고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나리오에 대한 이해가 다르면 제대로 영화를 만들 수 없다. 적어도 시나리오에 대한 이해는 감독, 배우, 제작자, 스탭이 함께 가야 한다. 일단 촬영에 들어가면 감독에게 전적으로 맡기지만 시나리오 개발은 직접 한다는 입장이다. 그걸 삼류 상업영화를 만들겠다는 말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싶다. 내가 시나리오를 봤을 때 느낀 감정이나 정서가 관객에게 전달되자면 그것이 올바른 방식인 것 같다.
앞으로 제작할 영화들은 어떤 작품인가.
멜로영화 <가을로>가 6월이나 7월쯤 촬영에 들어간다. 황규덕 감독이 연출자로 내정됐다. <언더커버>는 원빈이 출연 계약을 어겨 법정으로 갈 것 같다. 이번주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낼 계획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인랑>을 실사로 리메이크하는 작품도 준비중이다. 내년 3월쯤 크랭크인할 예정으로 준비중인데 개인적으로 아주 기대가 크다. 친구도, 애인도 죽여야 하는 처절한 멜로드라마로 만들 생각이다. 단편 <구타유발자 잠들다>의 유정현 감독도 내년 상반기쯤 우리 회사에서 데뷔할 예정이다. 지금 <좋은 사람…> 연출부로 일하고 있는데 청춘액션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중국에서 영화화 판권을 구입한 <허삼관 매혈기>는 여기저기서 판권을 넘기라는 제안이 들어오고 있다. 공동제작 같은 방식을 염두에 두고 있다.
지난해 11월 시나리오를 처음 건네받았다는데 <좋은 사람…>은 벌써 촬영이 끝나간다. 기획부터 캐스팅, 제작까지 아주 빨리 진행된 프로젝트다.
아마 최근 제작된 영화 가운데 이 정도로 막힘없이 진행된 영화는 없을 것이다. 모지은 감독의 열의, 집중력이 대단하고 주연배우 신은경씨한테도 너무 고맙다. 괜찮은 여자배우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신은경씨는 자기 역할을 정확히 이해하고 소화하고 있다. 자기보다 나이어린 감독에게 깍듯이 대하면서 부드러운 현장진행까지 이끌었다. 이번 영화가 잘된다면 신은경씨 공이 대단히 크다. 글 남동철 [email protected]·사진 정진환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