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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에의 교감을 노래하는
김소미 사진 오계옥 2021-10-20

'아네트' 레오스 카락스 감독

미국 밴드 스파크스 형제가 레오스 카락스에게 제안한 영화 <아네트>에서 음악과 공연은 오직 스크린이라는 기계장치에 담기기 위해 존재하는 질료다. 그 속에서 배우들은 카메라가 돌아가는 시간만큼만 노래하고, 목각인형 아네트는 CG로 지운 인형술사의 조종 아래서 미숙한 부모 헨리 (애덤 드라이버)와 안(마리옹 코티야르)의 품에 안긴다. 올해 부산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아네트>로 초대받은 레오스 카락스는 3회째 방문하는 영화제가 한결 편안해 보였다. 기자간담회와 GV, 마스터클래 스까지 모두 마친 뒤 여유를 찾은 그와 1시간가량 대화를 나눴다. 첫 뮤지컬영화 <아네트>의 세부를 가로지르는 동안 레오스 카락스는 언제나처럼 초기 영화의 존재론을 예찬하는 영화 근본주의자였고, 자신의 음악적 영혼을 “영화와 결혼시킨” 무경계의 예술가였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 <나쁜 피> <퐁네프의 연인들> <폴라 X> <홀리모터스> 이후 9년 만. 희극과 비극, 코미디와 오페라를 경유해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한 카락스의새 ‘심연’을 여는 <아네트>를 소개한다.

- 어둠 속에서 “쇼가 끝날 때까지 숨을 멈춰”달라고 주문하는 사운드로부터 영화가 시작된다. 이어지는 오프닝곡 <So May We Start?>에서 카메라는 스튜디오에 앉은 레오스 카락스 감독과 딸 나타샤, 노래를 부르는 스파크스 형제를 차례로 비추고 마지막으로 배우가 등장한다. 모든 인물 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순간까지 끊김없이 흐르는 숏이다. 오프닝의 구상 과정을 들려달라.

= 뮤지컬 장르에서 쇼, 그리고 백스테이지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굉장히 훌륭한 전통이다. 빛과 어둠, 무대 위와 그 뒤편의 대조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아네트>의 오프닝은 그런 전통을 내 식대로 해석해서 재미를 찾는 과정이었다. 일단 나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다음 스파 크스 형제와 배우들을 거쳐 캐릭터 속으로 천천히 진입해 들어갔다. 전작인 <홀리모터스> 또한 나와 내 딸, 그리고 개와 함께 등장하는 장면으로 영화를 열었다. 이런 ‘홈 무비’적인 방식은 나를 안심시키고 작업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는 효과도 있다.

- <아네트>에 참여한 계기로 뮤지컬 장르에 대한 애정과 영어영화 제작에 대한 오래된 갈증도 밝혔었다. <아네트>는 사용 언어가 영어일 뿐 아니라 극중 배경이 LA라는 점에서 미국 혹은 할리우드에 관한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 스파크스 형제의 영향이 컸다. 그들이 먼저 이미 완성된 약 15곡의 음악과 LA 배경의 스토리를 내게 제안했다. LA라는 공간이 결정적으로 나를 움직인 지점은 이 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동떨어져 있다는 감각 이었다. 어디를 가든 걸어서 갈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이 만약 연인을 보러 가고 싶다면 차나 모터사이클을 타고 질주해야만 한다. 그래서 헨리가 자신의 희극적 세계에서 안의 오페라 세계까지 모터사이클을 타고 달리는 모습에서부터 상상이 시작되었다. 프로듀서가 LA 촬영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들 거라고 경고했지만 나는 이미 바다와 협곡, 그리고 모터사이클에 꽂힌 뒤였다. 결국 배경을 LA로 설정하고 독일과 벨기에를 비롯한 유럽에서 영화를 찍었고, LA 촬영은 일주일 정도만 진행했다.

- 일종의 가상공간을 창조하는 작업이었겠다. <홀리모터스>만큼은 아니지만 초현실적인 터치도 느껴진다.

= 영화를 찍는다는 건 불가능하거나 너무 비싸거나 하는 두 가지 문제를 늘 해결해나가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감을 얻거나 짜릿함을 얻게 되기도 한다. 아주 저예산의 영화를 찍지 않는 한 말이다. 독일과 벨기에는 캘리포니아와 상당히 다른 무대였으므로 <아네트>의 도시는 사실상 내가 재창조한 일종의 환상에 가깝다. 그런 것들이 나를 흥분시킨다.

- 이제는 더이상 영화를 보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10대부터 20대 중반까지 열렬한 영화광이었다. 뮤지컬 장르가 당신을 매혹한 지점은 무엇인가.

= 아마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점. 우리는 말하다 말고 갑자기 노래를 부르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지만 뮤지컬에선 이를 당연한 듯 용납 하고 본다. 이 정도의 수용이 가능하다면 어떤 환상이라도 겹겹이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아네트>에서 마리오네트를 사람으로 취급하고 브뤼셀에 LA를 만든 것처럼, 영화와 음악이 만나면 동시에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을 한곳에 섞어둘 수 있다. 그럴 때 영화는 웃기 거나 기이하거나 심오한 형태로 확장되면서 제3의 차원을 연다. 어릴때 뮤지컬영화를 많이 보지는 않았다. 할리우드 고전기 뮤지컬 중 유명한 작품들, 프랑스영화 중에선 특히 자크 드미, 그리고 러시아와 인도의 몇몇 뮤지컬영화를 즐겼다. 그게 전부다.

- 스탠드업 코미디언 헨리를 연기한 애덤 드라이버가 신체를 쓰는 방식에서 어쩔 수 없이 드니 라방이 떠올랐다. 모두 몸을 전위적으로 쓸 줄 알고 연극 무대로 커리어를 시작한 배우들이다. 애덤 드라이버를 캐스팅할때 어떤 면에 이끌렸나. 배우에게 신체적 언어를 특정하게 주문한 장면도 있나.

= 배우를 지도하는 영역에 대해 질문받으면 항상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내가 연기를 지시한다는 느낌을 한번도 가진 적이 없고, 그저 배우의 연기를 간직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감독 으로서 배우에 관한 나의 핵심적인 역할은 그저 잘 선택(캐스팅)하는 것이다. 내 경우는 특정 배우에게 애착을 갖게 되는 순간부터 작품과 캐릭터가 점점 깊어지고 구체화된다. 애덤을 처음 알게 된 건 8년 전 TV시리즈 <걸스>에서였다. 보자마자 그가 말하고 걷고 움직이는 기이한 방식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생물체를 보는 동안 내가 아주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가 된다는 점도 재밌었다. 문제는 헨리 역을 맡기에 너무 어리다는 것이었는데, 이후 <아네트>가 촬영을 시작 하기까지 7년이 흘렀고 그사이 애덤도 헨리를 연기하기에 적당한 나이가 됐다.

- 레오스 카락스 영화 속 배우의 쓰임새를 생각하면 배우를 ‘생물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한 호칭으로 들린다.

= 그렇다. (웃음) 마음속으론 드니와 애덤 모두를 원숭이라 부른다. 내게는 매우 좋은 의미다. 정말 매력적인 원숭이들 아닌가. 그들이 뜬금 없이 정지해 있을 땐 마치 조각상 같고, 갑자기 움직일 때는 춤을 추는 것 같다.

- TV시리즈를 본다는 것도 조금 의외다. <걸스> 외에 눈여겨본 작품이 있나.

= 영화와 마찬가지로 아주 부분적으로만 본다. 새 배우들을 찾거나 동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때 일부만 발췌해서 보는 식이다. 내가 말할 작품은 따로 없고 최근에 딸 나타샤가 <오징어 게임>에 빠져 있다. 젊은 두 남녀 배우(정호연, 위하준)가 좋다고 하더라.

- 오페라 가수 안을 연기한 마리옹 코티야르에겐 독일 배우인 로미 슈나이 더의 인터뷰를 보여주면서 영감을 끌어내기도 했다고.

= 애덤은 제작 초기에 합류했지만, 마리옹은 촬영이 시작되기 겨우 2~3달 전에 합류했다. 아주 오랫동안 안을 연기할 배우를 찾는 데애를 먹었다. 미국이나 영국 배우 중에 내가 원하는 안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다 마리옹을 만났는데 첫 만남에서 바로 로미 슈나이더를 떠올렸다. 영화 속 로미 슈나이더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내가 눈여겨본 건 실제 로미의 성격이었다. 유튜브에서 한 토크쇼를 본 적 있는데, 로미는 아름답고 수줍음이 많으면서도 동시에 유혹 적인 기운을 뿜어냈다. 동료 인터뷰이로 검은색 가죽 재킷을 입고 마치 갱스터 같아 보이는 배우 겸 작가가 함께 출연한 상황이었다. 인터뷰 내내 누가 보아도 두 사람이 매우 미묘한 기류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로미는 갱스터 같기도 하고 나쁜 소년 같기도 한 남자와 무척 잘 어울렸다.

- 아기 아네트를 마리오네트(관절인형)로 표현했다. 영유아 배우를 캐스팅 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무척 어려운 사정에 대해서는 쉽게 납득이 가지만 CG 기술을 쓰지 않고 굳이 나무로 만든 마리오네트를 택했다는 점은 여전히 흥미롭다. 반드시 물리적 실체가 필요했나.

= 간단히 말하면 그게 가장 중요했다. 우선 포스트 프로덕션을 제대로 하려면 굉장히 많은 인력이 필요한데, 촬영장에서 함께 있지 않았던 사람들과 새로 영화를 고치는 것은 내가 원하는 작업 방식이 아니다. 그리고 사후적으로 무엇이든 바꾸고 재창조할 수 있다는 개념 또한 내가 생각하는 영화 만들기 과정에서 그다지 달갑지 않다. 없었던 것을 있게 하고 못생긴 이미지를 아름답게 하는 데엔 관심이 없다. 배우들이 카메라 앞에서 라이브로 노래 부르고, 실체로 존재하는 나무 인형이 배우의 손에 들려 있다는 것이 내게는 진정 흥미로운 요소들 이다. 개인적으로 인형극 세계를 늘 경험해보고 싶었다. 영화만큼이나 마술적인 속성이 있다.

- 마리오네트는 기계장치에 줄을 매달아 움직였나, 아니면 실제로 인형조 종사들의 솜씨인가.

= 모두 사람이 한 것이다. 많을 땐 3~4명의 인형조종사가 필요했다. 가능한 한 무대장치를 활용해 몸을 숨기려 했지만 불가능한 경우도 많아서 이 영화의 유일한 CG는 모두 인형조종사들을 지우는 데 사용 됐다.

- 편집 과정은 즐기는 편일까.

= 사랑한다. 편집이 시작되면 매일, 매 순간 편집실에 붙어 있는 편이다. 20년간 같은 편집자와 작업하고 있는데, <나쁜 피>에서부터 함께한 유능한 프랑스의 여성 편집자 넬리 께띠에다. 이제는 나도 편집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어서 직접 하기도 하지만 장편을 만들 때는 넬리의 도움이 절대적이다.

- 미리 녹음을 다 하고 립싱크로 촬영한 게 아니라 배우들이 실제로 촬영 장에서 노래를 불렀다. 현장의 생생한 소리를 담아낸 것 또한 후반작업을 선호하지 않는 감독의 성향이 반영된 결과인가.

= 그게 당연한 세팅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선택지는 고려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라이브로 노래를 부르는 게 뮤지컬의 본질 아닌가. 녹음 실에 들어가면 절대 현장과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다. 달리고 있는 중이든 섹스를 하는 중이든 인물들이 장면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게중요했다. 연기하는 배우들은 물론 카메라 뒤편의 목격자였던 나에게도 엄청나게 강렬한 경험이었다.

- 그래서 사운드가 마냥 고르지 않다. 카메라와 인물의 거리 혹은 인물의 움직임에 음량이 커졌다 줄어들고,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도 시시각각 다르게 느껴진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카메라의 존재를 더 선명하게 자각할수 있었다고나 할까.

= 그것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나 자신이 영화를 만들 줄만 알지 뮤지컬 공연과 쇼, 그리고 오페라 연출에 관해서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음악으로 시작한 영화지만 내가 늘 고민해온 것은 음악 그 자체가 아니라 음악과 영화의 결혼식이 만들어내는 흥미로운 풍경이었다.

- 음악을 무척 사랑하지만 일면 그 위상에 압도감을 느끼는 것도 같다. 영화라는 매개체를 경유해 음악 만들기의 과정에 접근하는 중인 걸까.

= 어린 시절에 가장 사랑한 것이 음악과 영화였고 처음엔 뮤지션이 되고 싶었지만 음악이 나를 거부했다. 하지만 영화는 나를 받아주었다. 내게 영화는, 악보를 읽거나 작곡을 할 줄 알아야 하는 세계도 아니 었고 아무것도 알지 못해도 할 수 있는 감정의 예술이었다. 영화에서늘 음악의 사용을 열망하면서도 음악감독 그리고 작곡가와 소통하는 데에 부담감이 컸기 때문에 오리지널 영화 사운드트랙을 작업한 것이 네 번째 영화 <폴라 X> 때부터였다. 그전까진 쇼스타코비치, 데이 비드 보위 등이 내 영화의 파트너였다. (웃음)

- 부산국제영화제 마스터클래스에서 무성영화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킹 비더의 <군중>(1928)을 추천했다. <아네트>와의 연결점도 있어 보였는데, 어떤가.

= <군중>은 내게 개인적으로 매우 중요한 영화이고 여기엔 나의 사적인 경험과 감정이 많이 뒤섞여 있다. 훌륭한 영화이긴 하지만 가장 혁신적인 무성영화라 하기는 어려울 텐데 아무래도 마스터클래스에서 젊은 관객에게 괜히 추천한 것 같다. <군중>은 매우 미국적인 스토 리의 원형을 갖고 있다. 소년이 소녀를 만나고, 아이를 가졌다가 잃고, 자본주의 속에서 분투하고, 어떤 죽음들이 나온다. 킹 비더 감독의 영화에는 거의 모든 감정들이 들어 있다. 하지만 어쨌든 학생들에겐 조금 더 실험적인 고전 걸작들을 추천할걸 그랬다. <아네트>와의 연결점에 관해서는 직접적으로 생각해보진 않았다. 그런데 에드거 앨런 포가 말한 “심연을 향한 교감”(Sympathy for the Abyss)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언제나 이 말을 생각하며 영화를 만들었다. <군중> 역시 <아네트>와 마찬가지로 남녀의 사랑이 만들어낸 기쁨으로 영화가 시작되지만, 아이가 생기면서 남자가 근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심연을 향한 연민이 일어난다. 우리는 그 비참한 수렁을 뛰어넘고 극복해야 한다. 의식하고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내가 느끼고 보아온 모든 것이 <아네트>에 쓰였으리란 걸 부정할 수는 없겠다.

- <아네트>는 OTT 플랫폼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가 서비스한다.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를 만날 수 있는 시대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나.

= 매우 유감이다. 특히 <아네트>는 북미 개봉(2021년 8월6일) 후 2주 만에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에서 공개됐는데 그 기간이 너무 짧다고 생각한다. 팬데믹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지만 여전히 안타깝다. 이 부분에 관해서만큼은 나는 전혀 행복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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