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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FF #8호 [인터뷰] '컨버세이션' 김덕중 감독, 건전 대화의 생동감
김소미 사진 오계옥 2021-10-13

감독 포함 촬영 스태프 셋에 배우 여섯. 총 아홉명의 영화적 인간들이 모여 끊임없이 대화한 끝에 나온 영화 <컨버세이션>은 도무지 아무것도 건져낼 게 없어 보이는 지리멸렬한 풍경에서 일상의 정수를 반질반질 닦아낸다. 문득 아름다운 구도가 펼쳐지기도 하고 종종 웃긴 난장도 벌어지는 가운데 만나게 되는 것은 더 나은 삶을 갈망하는 인물들의 낭만과 허무다. 전작 <에듀케이션>에서 마주보고 대화하는 일을 적잖이 난감해하는 두 인물을 유심히 관찰했던 김덕중 감독은 신작 <컨버세이션>에서 작정하고 말과 말 사이를 파고든다. 배우 조은지, 박종환, 곽민규, 김소이, 송은지, 곽진무와 함께 새로운 형식 실험을 펼쳐낸 김덕중 감독과 나눈 <컨버세이션>을 전한다.

-전작 <에듀케이션>과 사뭇 다른 영화를 만들었다. 본격적으로 대화 중심의 영화를 쓰기로 한 계기는.

=<에듀케이션> 편집 때 새로 써 둔 시나리오가 있었는데, 자체 제작이 불가능한 규모였다. 당장 외부 지원도 어렵겠다는 생각에 두 번째 시나리오를 썼는데 어째 더 많은 자본이 필요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시나리오는 축적되는데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접점은 없다보니, 영화란 결국 만들어져야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에 고민이 깊어졌다. 쓰고 싶은 것을 쓰되 이번에도 직접 제작할 수 있는 사이즈를 염두에 두고 쓴 세 번째 시나리오가 바로 <컨버세이션>이었다. 처음에 파리에 다녀온 여자 세 명의 이야기를 단편으로 썼다가 남자 셋이 등장하는 뒷부분의 이야기를 추가로 붙였다.

-<컨버세이션>은 일단 엄청난 대사량을 자랑하는 작품인데, 집필 과정부터가 궁금하다.

=그동안 축적해둔 메모들을 다 쏟아부었다. 주변에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들릴 때마다 기록해두는 편이다. 초고 완성까지 시간이 오래 안 걸렸다. 한 달이 조금 덜 걸렸다. 조금 급하게 돌입한 감이 있어서 나중에 차차 더 고쳐야지 생각했던 시나리오인데, 막상 촬영 때까지 크게 바뀌지 않더라. 배우들의 입에 맞게 어투를 사소하게 수정하는 정도였지, 구체적인 대사의 내용과 흐름은 그대로 갔다.

-느슨하게나마 연결성을 염두에 두고 각 장면의 내용을 결정했나. 아니면 각 장면을 완성하고 사후적으로 배열한 결과물일까.

=단편을 먼저 구상하고 장편화를 추진하면서 어느 정도 미리 구조를 갖출 필요는 있겠다고 느꼈다. 처음부터 신을 순서대로 쓰지는 않았지만 여자 셋의 이야기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남자 셋의 이야기를 붙이자는 정도의 계획은 있었다. 처음에는 전체적인 연결성과 의미를 염두에 뒀지만, 마지막에 이어 붙일 때는 의미와 은유는 배제하고 각 신이 충분히 흥미롭고 생생한지에 집중했다. <에듀케이션>은 영화로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걸 이야기로 만든 것이라면 <컨버세이션>은 내가 무슨 의미를 만든다기보다 어떤 모먼트의 생동감, 재미 자체를 건져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접근했다.

-파리에 다녀온 40대 여자친구들의 이야기가 영화의 문을 연다. 작품의 최초 아이디어이기도 했는데 이 세 인물은 어떻게 떠올렸나. 감독 자신과는 성별, 나이, 경험 등이 꽤 다른 사람들이다.

=우선 그 나이대 여성 셋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세 여자가 모여서 아주 열심히 수다를 떠는데 그게 ‘건전 대화’였으면 했다. 처음엔 작품 제목도 건전 대화로 지으면 어떨까 싶었다. 영화에서의 대화라는 게 대체로 긴장을 유발하거나 정보를 전달하는 등 이야기에 복속되는 경우가 많은데 <컨버세이션>에선 그것과 완전히 대비되는 그냥 건강한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더 미묘한 순간들이 생겨날 거란 기대도 있었고.

-로케이션과 대사 중에서는 어느 것을 먼저 정했나.

=평소에 미리 봐 둔 로케이션들이 꽤 있어서 그런 경우엔 장소부터 태동했다고 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유모차를 끌고 산책로를 지나는 장면의 경우, 남자 둘이서 그런 모습으로 한 공간을 빙빙 돌면 재밌겠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아파트 외벽 계단은 우리집 근처인데, 건물과 건물 사이가 매우 가까운 게 재밌어서 구도를 미리 생각해두었던 장면이다.

-시나리오를 쓸 때 연기할 배우를 미리 염두에 두고 작업했나.

=그렇다. 정말 다행스러운 건 미리 점찍어 두었던 배우들이 모두 다 협조해주었다. 예상과 거의 비슷한 배우도 있었고, 실제로 만나니 느낌이 전혀 다른 배우도 있었다. 모두가 개성이 뚜렷했고, 내가 쓴 대사지만 배우의 입을 빌리는 순간 그 사람 자체의 특성이 반영되어 나오더라.

-배우 조은지의 리드미컬하고 날렵한 연기가 놀라운 영화다. 익히 잘 알려진 재능의 소유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컨버세이션>에선 종종 낯설게도 느껴진다.

=집에 TV가 없어서 드라마는 워낙에 못 보는 편이고, 조은지 배우가 출연한 영화와는 그동안 유독 인연이 없었다. 처음 제대로 본 작품이 <카센타>였고 그 뒤로 연출도 하신다는 이야길 알게 됐다. 실제로 만났을 때도 아주 단단한 지점을 품고 있는 분이라는 인상을 받아다. 평범함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비범하고 이상한 느낌이 있고, 그런 맥락에서는 거의 독보적인 배우가 아닌가 한다. 나이 들수록 자기 색을 더 강하게 드러내는 부분도 멋있다고 느꼈다.

-긴 대사량과 그보다 더 긴 롱테이크를 생각하면 상당 부분 시나리오 속 대사 그대로 촬영했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배우들의 즉흥 연기는 얼마나 열어두었나.

=프로덕션 초반에 가장 헷갈렸던 지점이 즉흥 연기를 얼마나 허용할 지에 대한 문제였다. 애초에 스토리 라인이 굵직한 게 아니긴 하지만, 내가 경험이 부족한 상태에서 즉흥 연기를 잘 매듭지어갈 수 있을지 부담이 됐다. 현장에서 시도를 해 보긴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배우들이 이미 대본을 다 숙지한 상태에서 약속되지 않은 무언가를 갑자기 시도하려다보니 약간의 혼동도 생겼고, 그런 가운데 큰 줄기는 잡고 가야해서 배우들도 헷갈리고 나 스스로도 처음엔 기준을 잡는 과정이 필요했다.

-배우의 이목구비조차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의 롱숏에서 내밀한 대사들을 전개하는 지점이 과감하다고 느꼈다. 덕분에 인물과 환경 사이의 긴장감, 흥미로운 구도를 보는 재미는 배가됐다.

=어쩔 수 없는 이유들도 있었다. 자체 예산으로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원 신 원 컷에 준하는 형식으로 화면을 최대한 넓게 쓰는 방법을 택했다. 그 안에서 인물들의 동선을 조율하는 것이 내가 활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였다.

-테이크를 많이 가기 쉽지 않은 환경이었을텐데, 실제로 어땠나.

=6명 배우들이 모두 가능한 여러번 해보자는 주의였다. 희한하게도. (웃음) 평균적으로 10 테이크, 많으면 18 테이크를 갔다. 연기 NG 보다는 주위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들이 많았다.

-두 남녀 은영과 승진을 중심으로 삶에 대한 열망과 허무가 교차하는 일상의 순간들을 포착했다. 느슨한 내러티브 가운데 정서적 울림이 분명하더라. 감독 자신의 내밀한 고민을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도 받았다.

=허공에 붕 뜬 사람들이 무엇 하나 삶의 의미를 제대로 붙잡지 못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쓰게 된 것 같다. 나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한데 가끔 삶의 지지대가 없다는 느낌이 든다. 종교가 없어서일까? (웃음)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있는데 뿌리가 없어서 더 헤매는 것 같다. 일면 허무주의일 수도 있고. 어떻게 살면 좋을까 고민하는 과정에서 극 중 대사처럼 “좋은 거 많이 늘리고 싫은 걸 줄여가면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더라.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달성하려고 노력하고 이상향에 가 닿으려 애쓰는 과정에서 살아가는 힘이 생기기도 하니까. 그 양쪽의 밸런스를 잡는 과정의 고민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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