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를 보고 나면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저 유명한 첫 문장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의 카메라는 너무 다른 엄마와 딸 사이의 불화를 집요하게 따라간다. 엄마 수경(양말복)은 다혈질이고 딸 이정(임지호)은 느린 사람이지만 두 사람 사이 감정의 골은 단지 성격 차이 이상으로 깊고 아프다. 김세인 감독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첫 연출작에서 신인이라 믿기 힘든 예리함과 예민함으로 관객의 마음을 쥐락펴락 한다. 모녀 사이의 갈등이라고 하면 얼핏 익숙한 소재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속살을 들여다보면 공감 가는 사연 사이마다 매우 개인적이고 유일무이한 순간들이 녹아들어 있다. 김세인 감독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 소중한 예민함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이것은 모녀 사이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차라리 관계에 대한 영화다. “영화 속에 ‘편하게 있어도 된다’는 대사가 있다. 내가 너무 듣고 싶었던 말이다. 영화를 보고 누구라도, 감히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말 한 마디, 단어 하나도 천천히 곱씹고 신중히 내뱉는 김세인 감독의 답변에서 영화가 전하는 진심을 읽을 수 있다.
-첫 장편영화로 뉴 커런츠 부문에 초청이 됐다.=아직 얼떨떨하다. 영화제를 앞두고 준비할 것이 생각보다 많아서 정신이 없는데 그래서 다행이다. 사람들 앞에 서는 걸 즐기지 않아서 벌써부터 GV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요즘 악몽 꾼다.(웃음) 그 순간이 빨리 지나가야 좀 편해지지 않을까.
-감독 데뷔를 한 소감이 어떤지. 오랜 동안 바랐던 꿈인가.
=사실 특별히 감독을 목표로 해서 영화과를 간 건 아니다. 흔히 그렇듯 큰 목표 없이 친구 따라 영화과를 갔다. 거기서 선배나 동료들의 현장에 참여하면서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쓰임이 될 수 있다는 걸 경험하면서 공동작업의 매력을 느꼈다.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것들이 처음이었다. 수업에서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썼는데 글을 쓰면서 스스로 객관화가 되는 경험을 했다. 그 과정에서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 때부터 언젠가 영화감독이 되어도 좋겠다고 결심했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라는 제목이 일단 눈길을 끈다. 직관적이기도 하고 구체적인 설명이기도 하다.
=트리트먼트 단계에서 지었던 제목이다. 작품에 제대로 이입하기 위해서는 제목이나 사람의 이름이 마음에 우선 닿아야 하는 편이다. 모녀라는 힌트가 제목에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목으로 모녀라는 역할의 프레임을 씌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두 여자’를 먼저 정했다. 고백하자면 나도 얼마 전까지 엄마와 속옷을 공유하면서 입었다.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그런 친구들이 꽤 있더라. 물론 그것만으로 일반화할 순 없지만. 반면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서 속옷을 함께 입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이 재미있게 다가왔다. 어쩌면 이게 모녀 관계의 특수함을 설명하는 소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생각해보면 어릴 적 엄마와 싸울 때마다 독립을 꿈꾸며 ‘피터팬의 방구하기’ 같은 카페도 찾아봤는데, 이사를 가면 새로 사야할 것들을 쭉 정리해보는 게 그 순간 화를 누그러트리는 방법 중 하나였다. 그럴 때에도 속옷도 사야 한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 정도로 너무나 개인적인 물건인데, 그걸 공유한다는 게 당연한 거다. 어쩌면 모녀 관계에서는 개인적인 것까지 깊숙하게, 너무 많은 것을 공유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어머니와 딸에 관한 이야기는 많지만 이렇게 꼼꼼한 관찰과 끈덕진 이야기는 드물다. 처음에 어떻게 시나리오를 썼는지.
=단편 때는 주로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이번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성인 연기자들과 작업을 했다. 아이의 외로움이란 감정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써왔는데, 왜 그럴까 되짚어 보니 그 끝에 엄마가 있었다. 이전 작품들은 어린 시절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거라면 이번 장편은 30대를 앞둔 시점에서 이 정서를 마무리 짓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어쩌면 경험담이 아닐까 오해하실 수도 있는데 온전히 상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다.
-캐릭터 묘사가 디테일하고 상황이 사실적이기 때문에 경험에서 우러나왔다는 오해를 살만 하다. 대사나 상황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었나.
=상황은 상상해서 만든 것들이 대부분이고, 몇몇 대사에서 실제로 들은 내용을 변형해서 쓴 것들이 있는 정도다. 사실 시나리오를 쓸 때 너무 개인적인, 작은 이야기가 아닐까 걱정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유난스럽다, 예민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종종 내가 너무 사소한 문제를 너무 크게 받아들이는 건 아닐지 불안감이 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심리학책들을 많이 읽었고 그 과정에서 이것이 나만의 감정이 아니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실제로 겪은 일이 아니라도 뉘앙스나 감정은 알 수 있지 않나. 가령 엄마랑 마주볼 때 눈빛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들. 글을 쓸 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평범한 감정들을 증폭 시킨다. 이야기라기보다는 내가 그 때 느꼈던 온도, 바람, 감각들. 그런 것들을 담아내는 데 관심이 많다. 평소에도 내가 감각하는 ‘현재’를 예민하게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습관이 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예민함’이야말로 이 영화의 힘이다. 마치 솜털이 만져질 정도로 생생하다.
=프로듀서님과 나눴던 말 중 하나가 이 영화를 찍고 다음 영화 안 찍어도 좋다는 거였다. 첫 영화라는 것, 다음 영화를 위한 밑 작업 같은 건 생각해본 적 없다. 이 시기에 나를 둘러싼 문제나 감정들을 이야기를 통해 한번 털어내는 과정이 중요했다. 나 스스로에게 좀 더 집중했던 작업이었고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지 그렇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강박이 있다면 내가 혹시라도 이 문제를 단편적이고 납작하게 그려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다. 첫 영화인데 러닝타임이 길다는 말도 있었지만 줄이고 줄여도 140분보다 짧게는 만들기 어려웠다.
-엄마 수경 역의 양말복 배우와 딸 이정 역의 임지호 배우는 어떻게 함께 하게 되었나.
=수경은 평범한 엄마의 모습과는 다르다. 자칫 비호감으로 느껴질 수 있기에 배우가 가진 본래의 매력으로 그걸 어느 정도 상쇄시키고 싶었다. 양말복 배우를 처음 봤을 때 다른 역할 때문에 긴 백발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그 분의 젊음을 가리지 못했다. 외형적인, 육체의 젊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젊은 에너지라고 할까. 맑은 눈과 천진한 미소에서 사랑스러움이 느껴진다. 이 분에 수경 역을 해준다면 엄마라는 역할이 아니라 냉온탕을 왔다 갔다 하는 다양한 얼굴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임지호 배우는 처음 만나서 대화를 하는데 이야기와 캐릭터에 대해 깊이 공감해주었다. 자신의 삶의 일부분을 솔직하게 나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이런 분이라면 믿고 작업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개인적으로 사람을 볼 때 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임지호 배우의 눈이 맑고 깊어 많은 것이 담겨 있다고 느꼈다. 그 안에 담긴 것들을 함께 펼쳐보고 싶었다.
-수경은 엄마라는 역할 보다 ‘나’로 남고 싶은 사람처럼 보인다. 감독님이 생각하는 엄마는 어떤 존재인가. 가족의 정의를 내려 본다면.
=학교에서 시나리오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이 있는데, 연출자가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지를 점검한다. 창작자는 적어도 자신이 ‘아는 것’을 써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기 때문에 가족, 친구 같은 것들의 개념과 정의를 내려 보려고 무던히 애쓰기도 했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쓰면서 깨달은 게 있다.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영화를 만들면서 그 문제에 대해 탐구하는 사람이다. 영화 한 편 찍는다고 인생에서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를 다 찍고 나서 새삼 느낀 건 엄마의 존재에 대해, 모녀라는 관계에 대해 아직도 내가 질문하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이 영화를 찍기 전에는 20대의 마지막에 영화를 통해 이런 질문을 털어내겠다는 각오였는데, 다 찍고 난 뒤에는 모녀 서사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지금 단계에서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가족도 타인이다’는 사실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