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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남녀> 정지영 감독, '슬램덩크' 같은 90년대 만화처럼 찍고 싶었다
임수연 사진 백종헌 2021-07-14

아이돌을 꿈꾸는 소라(박시연)와 복싱 챔피언을 꿈꾸는 경호(정용주), 교집합이 없을 것만 같은 두 사람이 체육관에서 만난다. 함께 운동하며 체육관 사람들과 돈독해지는 사이, 소라와 경호는 꿈을 향한 각자의 여정에 어떤 사건을 겪는다. <신림남녀>를 만든 정지영 감독은 막 헤어진 연인(<농담>), 데이트 폭력 피해자(<나의 괴물>), 노량진 생활의 공허함을 가벼운 섹스로 푸는 고시생(<은미>) 등 일상에서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을 조금씩 비틀어 묘사해왔던 연출자다. <신림남녀> 역시 청춘들의 꿈이란 보편적인 주제를 담았지만,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이나 영화의 마무리에서 감독 고유의 개성이 묻어난다.

-어떻게 시작된 영화인가.

=대학원 졸업하고 <은미>를 찍으려고 돈을 벌던 때였다. 동생이 체육관에서 복싱 코치를 하면서 시합 준비를 병행했는데, 너무 큰 꿈을 품었던 것 같다. 혹독하게 연습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른 가족도 같이 힘들어했다. 꿈의 크기를 좀 덜어내면 될 텐데 왜 저렇게 너무 잘하려고 할까, 꼭 이겨야만 하는 걸까. 꿈 때문에 오히려 불안감이 생기는 부정적인 면을 봤다. 당시 만나던 친구가 가수 준비를 했는데 그 친구도 동생과 비슷했다. 매일 노래 연습을 하는 등 자기 루틴을 지키는데 정작 자기가 세상에 노출되는 것을 꺼렸다. 실력을 완벽하게 쌓은 후 세상에 나가 한 번에 빵 뜨고 싶다는 거다. 그렇게 꿈이 너무 커서 자신을 늘 혹사시키고 채찍질하고…. 나도 영화를 찍기 위해 노력하긴 하지만 엄청 잘돼야 한다는 마음은 없다. 나도 동생이 있는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면서 거기 회원들과 많이 친해졌다. 운동은 사람을 스트레스에서 회복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그래도 오늘 무언가를 해냈다는 개운한 느낌을 준다. 그러다 함께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에너지를 받는 이야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거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운동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레퍼런스로 삼은 작품이 있나.

=계속 얘기한 것은 <슬램덩크>다. 전반적으로 만화의 톤을 연상하며 만들었다.

-<프로듀스 101>에 출연했고 걸그룹 프린스틴으로 데뷔했던 박시연은 배우와 캐릭터의 상황이 많이 겹친다. 공교롭게 영화에서도 <프로듀스 101>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다. 박시연을 포함한 배우들은 어떻게 캐스팅 했나.

=등장 캐릭터가 너무 많아서 나나 연출부가 아는 배우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캐스팅 디렉터에게 예전에 아이돌을 했거나 아이돌 준비를 했던 배우를 찾고 싶다고 따로 요청해서 박시연 배우를 만나게 됐다. 정용주 배우는 조연출과 서울예대 학교 선후배 관계다. 처음부터 여자가 키가 크고 남자는 키가 작아서 언밸런스한 느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용주 배우가 작고 귀여운 스타일이라(웃음) 시연 배우와 언밸런스한 느낌이 잘 살았다.

-<은미>의 주인공은 여러 남자와 가벼운 성관계를 맺는 고시생이고, <나의 괴물>은 데이트 폭력을 당하는 여성의 이야기다. 정형화되지 않은 여성 캐릭터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이번에 소라 캐릭터를 만들 때는 어땠나.

=여성 캐릭터에 대해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부분은 없지만 그냥 다양한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냐는 입장이다. 가령 <은미>는 남자 성중독자에 대한 이야기는 있지만 여자 성중독자의 이야기는 없는 것 같아 만든 영화다. 여자이기 때문에 어떠해야 한다기보다는 여자도 이렇게 행동하면 재밌겠다고 역으로 시작했던 적이 많다. 소라는 아이돌 소속사 대표를 만났을 때 거침없이 주먹을 날리고, 마지막 인터뷰를 할 땐 성희롱 피해에 주눅 들기보다는 가수가 꿈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당하고만 있지 않는, 혹은 피해자로서의 나보다 그냥 내가 중요하다는 주체성을 보여준 거다. 이 여자가 어떤 사회에 속하는 인물로만 보이기보다는 그 인물 자체로 존재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해서 조금씩 빛나는 모습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청춘의 꿈을 다루는 영화는 너무 천진하게 봉합될 때도 한다. 그래서 너무 판타지적이지도 냉소적이지도 않은 <신림남녀>의 마무리가 신선했다.

=<슬랭덩크> 같은 90년대 만화처럼 찍고 싶었다. 이 친구들이 앞으로 잘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이렇게 살더라는, 쓰러지지 않고 계속 하고 있다는, 쿨한 마무리. 예전엔 꿈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갉아먹었다면 이제는 꿈, 복싱 같은 취미 운동, 전반적으로 삶을 고르게 가져가는 거다.

-청춘이라고 너무 우울하게 끝나지도 않고 말이다.

=영화감독들이 성장하는 단계에서 우울감을 많이 표출하고 그게 독립영화 전반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의 괴물>이나 <은미>를 찍을 때도 그랬다. 영화는 무조건 리얼해야 하고 내 삶과 비슷해야 하고 그런 것만이 진짜 영화라고 인정했다. 그런데 30대가 되고 영화를 찍으며 힘들었던 시기를 거치고 나니 이젠 밝은 게 너무 하고 싶다. 힘든 영화를 찍으면 나도 덩달아 힘들어지니까 신나고 재밌는 걸 해야겠더라. 점점 영화에 대한 폭도, 시선도 많이 바뀌고 있다.

-질문에서 시작한 영화였다. 영화를 찍으면서 찾아간 답은 무엇이었나.

=사실 시나리오를 처음 쓸 때는 친구들의 무게감을 보고 있으면 보는 사람도 지친다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준비하기 시작하니까 나도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었다. 잘하고 싶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현장에서 욕심을 내고…. 객관적으로 타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 같지만 만들다 보니 또 내 이야기가 됐다. 편집 과정에서도 극중 인물들에게 되게 많이 이입했다. 결국 과분한 욕심이 여러 일을 방해할 수 있으니 좀더 여유롭게 천천히 오래오래 하자는 결론에 도착하더라.

-앞으로는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나.

=지금은 부동산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아직 내가 스타일이 없는 거 같다. 하고 싶은 말도 계속 바뀌고, 원래 인생도 계속 바뀌었으면 하는 타입이다. 지금은 재미있는 걸 해야 할지 진지하게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지 기로에 서 있다.

-다루는 소재가 개인에서 사회로 점점 넓어지는 것 같다.

=반성하는 마음으로 계속 내가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은미>를 찍었을 때는 당시 그 나이대 내가 했던 가장 진실한 생각이 담겨 있고, <신림남녀>는 좀더 내 주변 사람들을 봤다. 지금 쓰고 있는 이야기는 세상이 어떤지 관찰하며 조금씩 시야를 넓혀가고 있다. 영화를 찍으면서 나 자신도 성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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