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할 만한 애니메이션 감독은 많지만 자기만의 세계를 꾸준히 쌓아나가고 있는 작가는 드물고 귀하다.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단편 애니메이션상 부문 후보에 오른 <오페라>를 통해 그간의 성과를 증명한 에릭 오 감독이 그중 한 명이라는 걸 부정할 이는 없을 것이다. 올해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에서는 에릭 오 특별전을 마련, <오페라>를 포함하여 <심포니> <하트> <사과 먹는 법> <나무>까지 그의 초창기 작품부터 최신작까지 아홉 작품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픽사 애니메이터를 거쳐 독립 애니메이션 작가로서 다채로운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에릭 오의 이야기를 전한다.
-특별전과 마스터클래스를 통해 단편 작품을 한 자리에 모은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감사하게도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제안을 주셔서 성사됐다. 이제까지 두세 번 정도의 전시회를 가진 적이 있는데 이번 특별전은 한층 각별한 느낌이다. 그동안 작업을 하면서 몇 차례의 변화가 있었다. 예를 들면 제가 픽사 스튜디오를 퇴사할 때 전시를 가진 적이 있다. 그때마다 전시를 통해 지나온 길을 점검할 기회가 있었는데, <오페라>와 <나무>를 완성한 지금이 딱 그런 시기다. 이전에는 내가 느끼는 세상, 내부의 생각에 집중하는 작품들이 많았는데 <오페라>와 <나무>는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 좀 더 고민한 결과물이다.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성장 중임을 작품을 되돌아보면서 실감한다.
-바오밥 스튜디오와 협업한 VR 애니메이션 <나무>는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라고 들었다.
=그렇다. 10년 전 돌아가진 할아버지와의 기억에서 영감을 받아 내 삶의 에피소드들을 녹여냈다. 나무에 열리는 열매 하나하나가 내 지난 시간처럼 느껴진다. 이번 특별전이 또 하나 남다른 건 일반적인 단편 애니메이션 형태와 VR을 활용한 버전을 둘 다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단편을 먼저 만들고 VR로 바꾼 게 아니라 처음부터 두 가지 버전을 동시에 구상해서 제작했기 때문에 별개의 2가지 작품이라고 봐도 좋다.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는 예전부터 VR 쪽에 관심이 많으셨던 걸로 알고 있다. 만든 사람 입장에서는 두 버전을 모두 소개할 수 있는 감사한 기회이고, 관객 입장에서도 두 가지를 비교해서 보면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작품마다 작화나 톤이 다르다. <댐 키퍼>는 수채화 같은 톤인가 하면, <군터>는 플래시 애니메이션 혹은 카툰 같기도 하고.
=특정 기법이나 스타일에서 출발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다. 시기마다 내 안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자라고, 거기에 가장 적절한 형식을 찾는 식이다. <오페라>가 프레스코화처럼 거대한 구성을 택한 것, <나무>가 생생한 느낌을 줄 수 있는 VR을 고른 것도 그런 맥락이다. 가능한 다양하게 시도하는 게 재미있다. 유일하게 반복하는 게 <오페라>에도 나오는 캐릭터 디자인이다. 큰 얼굴과 뼈다귀 같은 몸으로 이뤄진 간단한 캐릭터다. 2011년 <사과 먹는 법>부터 2018년 <무지개 칠하는 법> 등 아바타 혹은 페르소나처럼 내 작품에 반복적으로 나왔다. 시각적으로 심플한 디자인이라서 어디에도 적응할 수 있다. 특정 개인이 아니라 어떤 현상을 말하기에 무척 용이하다.
-매 작품마다 형식이 변화하는 가운데에서도 관통하는 주제들이 있다.
=내 작품 속 주제는 언제나 ‘삶’이었다. <심포니>는 자아에 대한 상상이었고, <군터>는 본능과 욕망에 대한 이야기다. 결국엔 작품을 통해 ‘우리는 어떤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걸까’ 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다. 세계관도 반복되는 것이 있다. 굳이 단어를 고르자면 ‘순환’이랄까. 처음과 끝이 이어지고, 다시 돌아와 반복되는 흐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한다.
-단편 애니메이션의 매력이 무엇인가.
=비즈니스적인 측면에서 보면 수익성이 없다. 역설적이지만 그 말은 대중이나 관객의 시선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패해도 충격이 덜하고. (웃음) 가벼운 마음으로, 겁 없이, 자유롭게 도전할 수 있다는 점이 단편 연출에서 손을 놓을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다. 이후 좀 더 규모 있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고 해도 단편은 꾸준히 만들지 않을까 싶다.
-예전에 스스로를 “순수미술과 상업 애니메이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감독”이라고 표현하셨는데, 그 생각엔 변함이 없는지.
=그때도 지금도 나라는 중심은 크게 바뀐 건 없는 것 같다. 다만 어느 날 갑자기 순수예술과 상업적인 프로젝트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날이 오길 바라본다. 결국 중요한 건 좋은 메시지다. 그게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는가는 기술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서로 다른 길처럼 보이긴 하지만 선택의 문제는 아니다. 둘 다 시도하면서 배워나가는 것들이 있다. 균형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 10년 전에 내가 막연히 머릿속으로 그렸던 상황들이 하나씩 실현되고 있다.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기에 언젠가는 이 길이 합쳐지리라 믿으며, 진짜 중요한 나의 중심이 무엇인지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한 작품 한 작품에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10년 전에 꿈꿨던 것들이 이뤄지고 있다고 했는데, 지금으로부터 10년 뒤를 상상해본다면.
=<오페라> 이후 적지 않는 곳에서 다양한 제안이 오고 있다. 그래서 더욱 신중해진다. 이게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인가, 나를 성장시켜줄 수 있는 일인가. 많은 기회들에 행복하지만 그만큼 어깨도 무거워졌다. 지금 흐름 위에 서 있는 기분이다. 그래서 호흡을 고르며 조금 멀리 보려고 한다. 그때쯤이면 장편을 연출했을 수도 있고, 시리즈를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규모가 큰 작품을 경험했을지도 모르고. 다만 그런 성공이 목표인 사람이 되지는 않았으면 한다. 10년 뒤에서도 변함없이, 지금과 같은 고민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세상이 변해도 변치 않는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