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던 노련한 배우가 스크린에 등장한 줄 알았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는 동민(신정웅)이 한밤중에 전화를 받고 술취한 어머니 혜정(김혜정, 노윤정)을 데리러 가면서 겪는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혜정을 연기한 배우는 놀랍게도 영화를 연출한 신동민 감독의 친어머니인 김혜정씨다. 감독의 어머니가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속에서 직접 연기를 했다는 사실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만, 이 사실은 이 영화의 강렬하고 독특한 매력을 이해하는 데 얼마간 유효한 실마리가 된다. 신동민 감독은 현장에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엄마 같으면 무슨 얘기하고 싶어?”라고 긴밀하게 소통하며 촬영에 돌입했다. 그러면서 배우 노윤정과 비전문배우 김혜정이 각각 해석한 어머니를 뒤섞으며 극영화와 다큐 사이의 묘한 긴장감을 탄생시켰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4:3 화면비로 촬영했고, 롱테이크로 시간을 봉인해 인물들의 삶을 관객도 실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는 6월1일에 열린 시상식에서 김미조 감독의 <갈매기>와 함께 한국경쟁부문에서 공동으로 대상을 받았다. 수상 이틀 전 신동민 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친어머니인 비전문배우인 김혜정이 1부와 3부를, 배우 노윤정이 어머니 혜정 역을 맡아 2부를 책임지는 역할 구분이 독특하다.
=배우 노윤정과 작업하다가 친어머니와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어머니에 대해 글을 쓰고, 영화로 표현했는데, 어느 순간 내가 그려왔던 어머니랑 내 어머니가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라. 어머니는 노래 부르고 술을 마시면서 재밌게 사는 건데 내가 괜히 엄마가 힘들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진짜 어머니와 같이 영화를 해봐야 겠다 싶었다.
-혜정이 1부에서 부르는 노래 정훈희의 <안개>가 인상적이다. 김수용 감독의 <안개> 주제곡이자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라는 제목과도 관련 있어보인다.
=<안개>는 실제로 어머니가 느닷없이 나를 불러낸 뒤에 불렀던 곡이다. 이 곡에서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마치 영화가 그리고 있는 소망을 표현하는 것처럼 들렸다. 혜정의 소원은 커다란 것도 아니고 작은 안개가 바람으로 인해 걷어갔으면 하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영화 속에서 혜정은 노래방 카운터에 걸린 달마도를 보고 소원을 빌고, 절탑을 빙글빙글 돌며 무언가를 소망하는데 그런 종류의 소원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노래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1부에서는 친어머니가 정훈희의 <안개>를 부르고 2부에서는 배우 노윤정이 가수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를 부른다. 두 곡 모두 어머니가 실제로 내게 불러줬던 노래다.
-영화 화면비를 4:3으로 결정한 이유가 있나.
=두 사람의 관계를 다루는 영화를 계속해서 찍고 있다. 다른 캐릭터들도 등장하지만 영화가 주로 다루고 있는 건 혜정이란 엄마와 동민이란 두 사람이다. 4:3이라는 비율을 썼을 때 두 사람을 잡고, 카메라 뒤에 서서 두 사람을 잡는 나의 거리가 영화에 맞는 적절한 거리라고 생각한다. 촬영지인 우리 집이 그렇게 크지 않기도 하다.(웃음) 그 공간을 어떻게 담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는데, 가로가 더 긴 화면비로 담으니 좌우에 빈공간이 많이 남았다. 그런 빈 공간이 내게는 불필요해 보였다. 인물에게 더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는데 빈공간이 무의미하게 다가왔다. 4:3 화면비를 선택한 것도 그래서다.
-화면비도 인상적이지만 고정한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카메라도 인상적이다. 2부에서 혜정과 아버지 만철(김도현)이 나란히 앉아 있다가 만철이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가서 꽃을 꺾어 와 혜정 귀에 꽂아준다. 이때 카메라는 움직이거나 컷 되지 않고 남은 혜정만 비춘다.
=기본적인 나의 연출관인데, 카메라가 움직여도 된다는 정당성을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정당성이 있으면 카메라를 움직이고 컷도 나눴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두 인물을 바라보고 있는 시간의 지속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카메라를 고정한 채 그들을 바라봄으로써 관객이 그 시간을 느낄 수 있으면 했고, 관객들이 그들과 같은 시간을 체험했으면 했다. 다른 장면들도 카메라를 고정한 채 롱테이크로 많이 촬영했다.
-대사로 상황을 설명하기보다 이미지로 보여주는 영화로 다가왔다. 인물들이 나란히 앉아 드문드문 대화를 한다거나, 밥 차려준 엄마가 무릎걸음으로 약을 찾아 먹는다.
=1,2,3부 대사까지 완벽히 쓴 시나리오가 있었으나 촬영 현장에서는 많이 보지 않았다. 배우 노윤정에게는 시나리오를 드리긴 했지만 대부분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어떤 장면을 찍을 것인지 말로 설명하고 이런 이런 대사를 해달라고 말한 뒤, 출연하는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엄마 같으면 무슨 얘기하고 싶어?”, “정웅씨는 무슨 얘길 하고 싶을 거 같아?”라고 물어보고 들은 뒤에 “나도 좋아, 그렇게 갑시다”라고 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2부에서 혜정을 연기했던 배우 노윤정이 3부에서는 혜정의 친구가 되어 두 사람이 노래방에서 대화를 나누는데 어머니 역의 배우가 바뀌는 게 흥미롭다.
=배우 노윤정을 봤을 때 어머니와 닮아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만나면 재미 있겠다 싶었다. 배우가 바뀌는 것이 영화의 훼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같은 역을 두고 배우가 바뀌고 1부와 2부의 배우들이 3부에서 다시 만나는 게 우리가 사는 모습과 비슷하다고도 생각한다. 인생에는 순환이라는 게 있지 않나. 혜정이 절에서 빙빙 도는 모습이랄지. 더 이상 마주치지 않을 줄 알았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내가 계속 영화를 통해 이야기한다던지 하는 삶의 순환 말이다. 촬영하면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1부에서 어머니와 노래방 신 촬영을 끝내고 장비를 챙겨 철수하고 있는데, 차 한 대가 지나갔다. 그때 어머니가 “어 저거 너희 아빠 차인데”라고 했다. 인생에서 끝인 줄 알았던 아버지를 자꾸 마주치는 것처럼, 같은 역을 맡았던 배우들이 마주치는 영화의 구성이 삶과 일정 부분 맞닿아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장면은 처음과 동일하게 어둠 속에서 엄마의 전화를 받는 장면으로 끝난다.
=처음과 끝이 순환되는 느낌을 관객에게 주고 싶었다.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아니라 ‘내가 잘 하고 있나’, ‘나는 잘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전달되길 바랐다. 정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과거의 어떤 순간들이 자꾸 떠올라서 영화를 찍는 것 같다. 내가 정말 현명하게 살았더라면 가족에 대한 영화를 안 찍었을 거 같기도 하다. 물론 영화로 찍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는 관객들에게 삶에서 이어지는 무언가의 체험이 되길 바랐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증언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목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검은 화면 속에서 내게 전화를 해주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온전히 들려주고 싶었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다큐와 극영화가 혼합된 장르로 단편영화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는 어머니 쪽에 기울어진 영화라면, 차기작 단편 다큐-극영화는 아버지에 대한 감정의 정리가 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