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하고 싶지 않은" 주인공 현실은 공모전에 낼 마지막 시 한 편을 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마감까지 하루 남은 상황, 초조한 현실은 자리에 앉아 시를 쓰는 대신 무작정 집을 나선다. 그는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며며 힘든 시간을 보낸다. 영화 <생각의 여름>은 괴로운 과거와 현재를 외면하기보다 정면으로 부딪히기를 택한 주인공 현실의 성장담을 그린다. “할 말이 없어 시를 쓰는” 현실은, 힘겹게 시를 완성한 후 어제보다 조금 더 성장한 내일을 반갑게 맞이한다. <생각의 여름>을 연출한 김종재 감독은 "공모전의 결과보다는 주인공 현실이 변화하는 과정이 중요한 영화"라고 강조하며 말을 이어갔다.
-시를 쓰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이유가 궁금하다.
=심적으로 힘든 상황일 때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소설은 호흡이 너무 길어서 읽고 싶지 않았다. 반면 시는 짧으면서도 읽을 때마다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이 들더라. 그때가 벌써 5,6년 전인데 당시 시를 읽을 때의 느낌이 최근까지도 계속 맴돌았다. 그 느낌을 토대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쓰면서 여러 가지가 바뀌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의 연애 이야기를 다루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주인공 현실의 성장담을 다루게 되었다. 또 초고에서는 주인공이 남자였는데 여러 사람으로부터 캐릭터를 여성으로 바꾸면 더 좋을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조언대로 성별을 바꿔봤는데 내 예상보다 결과물이 훨씬 좋더라. 주인공을 여성으로 두면 내가 이야기를 잘 풀어나가지 못할 줄 알았는데, 괜히 쓸데없는 고민을 했구나 싶었다. 사실 성에 관계없이 주인공 현실이 내가 많이 투영된 인물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감독의 모습이 어떻게 투영되었나.
=나도 원래 무기력증이 심했다. <생각의 여름>을 찍게 된 것도 그런 무기력증을 이겨내고 싶어서다. 영화의 결말에서 주인공 현실이는 어느 정도 무기력증을 극복하지만 실제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영화는 그냥 영화더라.(웃음)
-현실은 무기력해 보이지만 실상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인물이다.
=현실이가 키우는 개 호구 때문이다. 현실이는 호구 밥도 챙겨주고 주기적으로 산책도 시켜줘야 한다. 사실 현실은 그런 목적에서라도 계속 움직이기 위해 호구를 키우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현실은 정말 그 무엇도 하기 싫고 그저 가만히 누워있고 싶어 하지만, 말씀하신대로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해야 할 일을 분명히 해내는 인물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시를 쓰는 것도 하기 싫어서 미뤄두는 거지 쓰지 못하는 건 아니라 생각하며 시나리오를 썼다.
-공모전이 하루 남은 시점에서 현실은 시를 쓰는 대신 계속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난다.
=다들 한 번쯤 해본 경험이지 않나.(웃음) 나 역시 대학을 다닐 때 데드라인이 코앞에 닥칠 때까지 과제를 미루다가 제출 전 날 새벽이 되어서야 시나리오를 쓰곤 했다. 신기하게 그 때 쓰면 잘 써지더라. 현실이도 계획 없이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저 술 먹고 노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써지지도 않는 시를 붙잡고 끙끙대는 것보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환기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시에 대한 영감도 얻고. 일상에서 소재를 채집하는 거지. 물론 관객들은 하루 종일 놀기만 했는데 어디서 시가 나온 건지 당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여정을 통해 현실 속에 쌓인 것이 분명 있을 거라 보았다.
-시는 누구의 작품인가.
=황인찬 시인의 시다. 개인적으로 <무화과 숲>이라는 시를 좋아하는데, 이 시가 <생각의 여름>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다. 황인찬 시인에게 영화의 취지를 말씀드리고 시를 사용해도 되는지 여쭤 봤는데 고민 없이 바로 쓰라고 하시더라. 개인적으로 영화에 나온 시들을 다 좋아하지만, 현실이 다섯 번째로 쓴 시 <소실>이 영화와 특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현실이 마지막으로 쓴 시라 영화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고 있기도 하고.
-시를 쓴다는 것은 현실에게 어떤 의미일까?
=현실에게 시는, 나에게 영화와 같은 존재다. 그 동안 영화를 하면서 많이 힘들었지만 앞으로도 영화와 헤어질 생각은 없다. 그만큼 영화는 내게 중요한 대상이다. 현실도 마찬가지다. 시를 마냥 좋아하지만은 않지만 그 역시 시를 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이다.
-시를 이미지화한 장면들이 눈에 띄었다.
=사실 나는 노래방의 모니터 화면처럼 연출하고 싶었다. 예를 들어 노래를 부를 때 노래와 전혀 상관없는 영상들이 나올지라도 가끔 노래와 어울린다고 느껴질 때가 있지 않나. 나도 그런 느낌을 주고 싶었다. 영상이 시의 내용에 부합하는 듯 보이면서도 그렇지 않고, 실제 현실이 겪은 경험인 듯 하면서도 그저 시를 시각화한 영상 같고. 이런 식으로 상황을 애매모호하게 연출해서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관객들은 그냥 시의 내용을 영상화했다고 보실 것 같다.(웃음) 그래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양한 감상이 나오지 않을까.
-헤어진 두 사람이 횡단보도 위를 함께 뛰어가는 엔딩 신도 인상적이다.
=뮤직비디오들을 보면 주연배우들이 꼭 횡단보도에서 맞닥뜨리지 않나. 그 상황에서 눈빛 교환도 하고 스쳐지나가기도 하고. 그런 클리셰를 나름대로 비틀어보고 싶었다. 기존의 시나리오에선 횡단보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사람이 뒤돌아 반대 방향으로 뛰어가는 거였다. 그러다 결국 둘이 함께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도록 수정했다. 전력 질주하는 두 사람을 보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 그런 둘을 보며 관객들이 유쾌하게 웃을 수 있으면 한다.
-배우는 어떻게 캐스팅했나.
=곽민규 배우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배우다. 처음 주인공을 남자로 설정했을 때 곽민규 배우가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워낙 팬이라 같이 작업해보고 싶었다. 만나서 영화에 관해 이야기해보니 바로 하겠다고 하더라. 주인공 성별이 바뀐 후에는 곽민규 배우가 현실 역에 김예은 배우를 추천했다. 김예은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전달했을 때 반응이 무척 좋았다. 당시 다른 촬영 스케줄이 있었음에도 어떻게 해서든지 하겠다고 해서 같이 일하게 됐다. 호구는 동물 에이전시를 통해 섭외했다. 걱정이 많았는데 정말 연기를 잘해줬다.(웃음)
-영화를 연출하며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이었나.
=제작비다. 제작 지원을 따로 받은 게 아니라서 고생을 많이 했다. 영화를 찍으며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들었다. 본래 힘든 상황을 돌파해보고자 영화를 찍기 시작한 건데 오히려 더 힘든 상황을 자초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 전주 국제 영화제에 초청되었을 때 거의 오열하다시피 했다.(웃음) 찍을 땐 고생을 많이 했는데 지금 와서 보면 정말 하길 잘했다.
-현실의 시는 공모전에 당선됐을까.
=결과에 관해선 생각해본 적 없는데 시가 좋으니 잘되지 않았을까. 사실 결과보다는 현실이 변화하는 과정이 중요한 영화라 생각한다.
-차기작 계획이 있는가.
=히어로 영화를 생각 중이다. 계속 반복되는 노동으로 인해 초능력이 생긴다는 설정이다. 영화제에 와서 다른 사람들의 영화를 보니 얼른 새 작품을 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