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 반으로 압축된 7개월간의 투쟁. 다큐멘터리 <보라보라>의 밀도 높은 영상 속에는 지난해 전국의 고속도로를 뜨겁게 달군 톨게이트 요금 수납 노동자들의 투쟁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있었다. 치열하게 맞서다가도 조합원들과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왜 같은 노동자가 비정규직, 정규직으로 나뉘어야 하냐며 눈물 흘리고, 그런 서로를 다독이고 연대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많은 이들이 외면했던, 혹은 부정적으로 바라봤던 톨게이트 해고 노동자들의 이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 이면의 얼굴들을 하나하나 담아낼 수 있었던 데에는 김도준 감독뿐만 아니라 김미영, 김승화라는 두 명의 '노동자 감독'이 함께 카메라를 잡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당한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이 영화가 희망으로 자리했으면 한다는 김도준 감독의 목소리에서 경험해 본 자만이 알 수 있는, 연대와 투쟁에 대한 신뢰가 짙게 묻어나왔다.
-올해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관객들을 만나게 되었다. 코로나19 여파로 변화한 영화제의 풍경이 남다르게 다가올 것 같은데 어떠한가?
=사실 여러 사람이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작품이라 조합원들, 그리고 많은 관객들과 함께 극장에서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는 아쉽긴 하지만 접근상의 제약이 덜해졌다는 장점도 있다. 전국 방방곡곡에 계신 조합원들이 시공간의 제약 없이 영화를 보실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영화는 극장에 봐야지" 하는 분들도 아직 계시다.(웃음)
-농성장의 노동자들에게 미디어 교육을 하면서 <보라보라>를 기획・제작・연출했다. 구체적인 초기 기획 과정에 관해 좀 더 자세한 에피소드가 듣고 싶다.
=작년 8월에 조국 사태 관련해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었다. 그 때 광화문 일대에서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행진을 봤고 사전 촬영을 진행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박순향 부지부장이 경찰 강제 진압이 임박했다며 연대를 호소하는 영상을 올렸다. 그 길로 촬영을 하러 김천 본사에 내려갔다. 당시 밖에서 안을 지원해주는 조합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이건 단독 프로젝트로 진행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조합원들이 캐노피 농성을 진행할 때 매일 도르래로 식사를 올려 보낸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편에 캠코더를 함께 올려 보내면 어떨까 생각했다. 동영상과 사진 촬영 등의 매뉴얼 등을 동봉해 올려 보낸 이후로 내부 촬영이 시작되었다.
-내부 촬영 당시에 특별히 부탁한 점이 있나?
=잘 찍어야 한다는 부담을 갖지 말라고 당부했다. 목에 걸고 다니는 펜이나 작은 일기장, 장난감처럼 다뤄달라고 했다. 다만 투쟁의 중요한 국면에 맞닥뜨렸을 때에는 조합원들을 인터뷰하는 방식이 아닌, 그 상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 자체를 촬영해달라고 말했다. 장비를 다루는 방법은 알려드렸지만 쇼트에 관한 개입은 하지 않았다. 자유롭게 촬영을 진행하는 게 더 힘이 있는 결과가 나온다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다.
-7개월간의 투쟁 여정을 한 편의 영화로 압축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2시간 반의 러닝 타임이 이를 반증하는 게 아닌가 한다. 영화를 편집하며 무엇에 가장 중점을 뒀나?
=내가 조합원들이라면 뭘 남기고 싶었을지 그분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려고 했다.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휴먼 다큐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사람이 고생했기 때문에 가급적 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담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공통적으로 존재했다. 해고당한 노동자, 가난하고 불쌍한 이미지로 조합원들을 한정짓고 싶지 않았다. 현장에서도 저차원의 휴머니즘을 호소하는 그런 작품은 하지 말자는 합의가 이미 되어 있었다. 장소마다 촬영, 연출하는 사람이 다 달라서 피드백을 계속 주고받긴 해야 했지만 위와 같이 합의된 편집 방향을 최대한 지키며 투쟁이라는 하나의 흐름으로 꿰어내려 노력했다.
-말씀하신대로 투쟁하는 노동자들 개개인의 삶의 이야기를 조명한 것이 인상 깊었다.
=오랜 시간 조합원들과 함께 지내고 관계가 깊어지니 이분들이 요금 수납원로 일했다는 걸 까먹게 되더라. 그만큼 한 분 한 분이 다 개성이 있었고, 살아오신 이야기들도 재밌었다. 투쟁이 주된 테마이긴 하지만, 조합원들의 역사를 하나하나 다 담아내고 싶었다. 서울과 김천, 그 밖의 공간들을 돌아다니며 투쟁하고, 노동자들 스스로 이제까지 자신이 해온 투쟁에 대해 평가하고 자신의 지난 역사에 대해 말씀하시는 때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어떤 힘이 느껴졌다. 그런 장면들을 최대한 담으려 했다.
-도로공사와 해고된 노동자들, 15년도 전, 후 입사자들의 의견 차이 등 여러 갈등이 벌어진다. 이러한 갈등을 담으며 특별히 주의를 기울인 점이 있다면?
=기계적 중립을 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큰 원칙이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사태를 보여주지 말자, 검열하지 않되 상처를 주지 말자고 다짐했다. 저마다 각기 다른 입장을 전부 보여주려고 했다. 영화에도 담겨있지만 간부와 조합원들 모두 저마다의 사정이 있지 않나. 이 문제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부 담아내고, 잘 살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경찰과 대치할 때도 많았고 경비도 삼엄했고, 촬영을 이어나가기 쉽지 않았을 텐데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처럼 촬영을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수납원들이 역사를 쓰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투쟁이 한국 노동운동사에 길이 남을 일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조합원들과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자주 나눴고, 이 작품이 후대에도 힘이 됐으면 좋겠다는 의지를 함께 다졌다.
-전작 <율리안나>도 그렇고 투쟁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에 관심이 많아 보인다. 이러한 주제에 계속해서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가 있다면?
=역사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그 이유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져있는 현재, 주어져있는 지금의 사회를 그대로 계승하는 게 맞는가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관심이 자연스레 역사에 관한 작업을 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톨게이트 투쟁에 관한 다양한 반응이 존재한다. 투쟁에 부정적이거나 무관심하기도 하고, 또 다른 비정규직에게는 희망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영화가 이들 각각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으면 하나?
=관련 기사 댓글에 ‘노동자들이 떼를 써서 정규직을 얻어냈다‘는 여론이 많더라.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은 당연히 있지만, 솔직히 그분들이 쉽게 바뀔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삶의 조건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지 않나. 조합원들 중에서도 “해고 전까지는 거리에서 파업을 하는 사람들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봤는데, 막상 내가 그 입장이 되니 생각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분들을 많이 봤다. 영화의 영향은 미미할거라 본다. 다만, 그분들이 만에 하나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경우처럼 주변 사람들과 연대해야만 이겨낼 수 있다는 점 정도는 알아주시면 좋겠다. 더불어 그런 순간에, 이 작품이 그들에게 힘이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