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잠깐 자야 될 것 같은데.” 이 한마디를 끝으로 갑작스레 오세가 잠자리에 든다. 함께 저녁을 먹던 친구가 의아해하자, 오세의 사정을 아는 동행자가 그가 긴 잠을 자야 하는 희귀병에 걸렸음을 알린다. 오세현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 <일시>는 하루 22시간을 자야 하는 오세의 여정을 담은 로드무비다. 친구의 도움으로 15년 만에 세상에 나온 오세는 친구와 함께 자동차로 전국을 누비며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무작정 달리는 오세의 시선에 담긴 풍경으로 시작하고, 질주하다 쓰러진 오세를 친구가 다시 차에 태우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그렇게 영화의 시작과 끝을 연결하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도로 위를 끝없이 달리는 오세의 모습이 연상된다. 직접 주연을 맡은 오세현 감독과의 만남은, 마치 끝없는 길을 달려 우리 앞에 도착한 오세와 마주 선 느낌이었다. 새로운 시나리오를 막 끝마치고 왔다는 그의 이야기를 전한다.
-본인이 직접 주인공 ‘오세’로 출연했다.
=맞다. 나체로 바다로 달려가는 신이 있는데 이걸 누구에게 시킬 수가 없더라. 그래서 내가 직접 주연을 맡아 연기했다. 주인공 이름 ‘오세’도 평소 친구들이 나를 부르는 별명이다. 출연 욕심이 있는 것 같다고들 말하는데 전혀 아니다.(웃음) 내가 나오는 장면도 많이 등장하지 않았으면 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편집했다.
-반드시 긴 잠을 자야하는 오세의 상황이 무척 독특하다.
=하루 2시간만 깨어 있을 수 있는 로스토프 증후군에 관해 들은 적이 있다. 오래 깨어 있으면 심한 두통이 동반되고 심각한 경우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고 하더라. 또 하나 독특한 점은 20대 이후에 주로 발병된다는 거다. <일시>는 ‘갑자기 하루가 24시간에서 2시간으로 짧아진다면, 나라면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데에서 출발한 영화다.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영화를 볼 수도 있고, 부족한 시간을 어떻게든 쪼개서 삶을 꾸려가려 애쓰겠지만 결국 자살로 귀결될 것 같았다. ‘그러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자. 그런 다음에 자살을 하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주인공 오세의 여정은 일종의 자살 여행인 셈이다.
-영화는 어떻게 촬영하게 되었나.
=원래는 서양화를 전공했는데 항상 그림보다는 영상 매체가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학부 시절부터 영상 위주의 작업을 하다가 은사님의 추천으로 연세대 대학원에 진학해 영화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다 2013년도에 장률 감독님 수업이 개설되었고 수업을 수강하는 김에 장편 한 번 찍어보자 싶었다. 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로스토프 증후군에 걸린 사람의 이야기를 마침내 꺼낼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실험 영화들을 제작해왔기 때문에 <일시>는 내게 처음으로 대사가 들어간 작품이었다. 2013년 촬영을 진행한 후 조금씩 다듬는 과정을 거쳐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했다.
-오프닝 신을 포함해 이동하는 신에는 사운드가 들어가 있지 않다. 또 롱테이크 신을 많이 써서 대체로 신들의 호흡이 길다. 어떤 의도가 담긴 연출인가.
=오세가 잠드는 순간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사운드를 제거해 오세가 조용히 잠든 분위기를 연출하고, 또 잠들기 전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순간을 표현하기 위해 화면이 깜빡이도록 처리했다. 롱테이크 신을 많이 쓴 이유는 지겨워야 재밌는 것 같아서다. 지겨운 걸 조금만 버티면 빵 터트리는 신으로 관객에게 보상을 안기는, 그런 작품을 선호한다. 계속 재밌는 신들이 이어지는 경우보다 이런 순으로 연출된 작품들이 더 크게 와 닿는 것 같다. 그런 의도에서 조금 지루한 감을 주기 위해 롱테이크 신을 여러 번 넣었다. 또 하나 중요시한 점은 서사가 중요한 작품보다는 하나의 그림이 전체적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작품을 염두를 두고 연출했다는 거다. 실제로는 신의 순서를 많이 고민한 작품이지만, <일시>는 신들의 순서를 바꿔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결국 영화는 신과 신의 몽타주이지 않나. 개별적인 신들이 순서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살아 있고, 동시에 퍼즐처럼 잘 짜맞춰진 채로 관객에게 한번에 다가올 수 있도록 연출하고 싶었다. 촬영 당시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런 연출을 추구한다.
-엔딩 신에서 친구가 잠깐 물을 사러 간 사이에 오세가 차에서 뛰쳐나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영화 말미에 보면 “오세야, 너 잘 시간 지나지 않았어?” 하고 친구가 묻는다. 자살 여행이라는 전제를 토대로 보면 더 이상 깨어있을 시간이 아니다, 영원한 잠의 시간, 즉 죽음의 시간이 도달했다는 의미다. 자살하겠다고 떠나오긴 했는데 막상 닥치니 무섭기도 하고, 살고 싶기도 하고. 어차피 그렇게 도망쳐 가봤자 쓰러져 잠들 테고 친구가 데려올 것이 자명하지 않나. 친구가 슈퍼에 간 사이 오세가 뛰쳐나가는 건 말하자면 나 살고 싶다고 도리어 절박하게 외치는 것이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는 절박한 상황에서 자살을 하려고 떠났지만, 오히려 살고 싶다고 칭얼대는 느낌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삶과 죽음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그렇게 정의하기엔 조금 거창한 감이 있는데(웃음). 그냥 삶과 죽음 언저리를 맴돌며 고민하는 정도인 것 같다. 대학생 때 삶에 대해 잘 알려면 죽음이 뭔지도 알아야할 것 같았다. 황충상 작가의 <자살은 살자다>로 단편을 제작했다. 그 때 이후로 삶, 죽음과 관련된 주제에 관심이 많아졌다.
-촬영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힘들기도 하고 반대로 좋기도 했던 점인데, 촬영을 도와준 친구들이 전부 영화를 잘 모르는 친구들이었다. 딱히 영화에 관심이 있지도 않아서 내가 촬영을 할 때 아무 터치가 없었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촬영할 수 있었다. 혼자 생각하고, 생각한대로 촬영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물론 붐마이크를 잘못 사용해서 녹음이 잘 안되는 경우가 있다던지, 그런 문제점도 있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레퍼런스로 삼은 작품이 있는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체리 향기>(1997)을 참고했다. 주인공이 자살을 하려고 차를 타고 계속해서 돌아다니는 이야기다. 여러 사람을 만나며 자신에게 흙을 덮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서사나 신을 참고하기보다는 영화 속의 그런 정서를 많이 참고했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제리>(2002)가 떠오른다는 말도 들어봤다. 그 이야기를 들을 후에 영화를 봤는데 어떤 점에서 닮았다고 하는지 알겠더라. 영화 한 컷이 30분 정도 되는데 계속 걷기만 하지 않나. 지겹기도 한데 재밌더라. 관객들이 제대로 지겨움을 느끼게 하려면 이정도 했어야 하나 싶기도 하고.(웃음)
-차기작 계획이 있나.
오늘 새벽에 시나리오 초고를 다 쓰고 왔다. 자살한 친구의 장례식장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올해 촬영 들어가는 게 목표다.
-로드무비를 좋아하나보다.
보는 걸 좋아하진 않는데 찍는 건 좋아한다. 무언가를 찾아다니는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매력이 확실히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