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가 올 때 집안에 혼자 남아 라면을 먹으면서 공포영화를 빌려보기를 좋아한다. 시사회를 볼 기회가 생겨도 기꺼이 비디오를 선택할 구실이 되는 것은 비다. 비를 즐기기 위한 여러 가지 영화가 있겠지만, 좀처럼 무서움을 타지 않는 나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핑계삼아 조금이라도 공포 분위기를 만끽하고자 저주, 영혼, 악령 따위의 단어들이 포함된, 무섭다기보다는 하품이 나오거나 웃음이 나오고야 마는 80년대 공포영화들을 잔뜩 빌린다. 사실 이럴 때 보는 비디오들은 비의 분위기를 돋우기 위한 한낱 핑곗거리에 불과하다. 공포영화 특유의 긴장감 있는 음악과 비명소리보다 빗소리에 더 관심이 가고, 그나마 라면을 먹으면서 영화를 보면 눈앞이 온통 뿌옇게 흐려지기 때문에(이건 안경낀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을 거다) 화면이 어느 정도의 공포감을 주는지도 이래저래 놓쳐버리게 된다.
이번에 전주에서도 비가 많이 내렸다. 처음부터 영화를 많이 보지 못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나는 대로 짬짬이 영화를 보러가고 전주의 맛집들을 찾아다녔어야 했을 나는 비를 핑계로 눅눅한 여관방에서 뒹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 결과 이번 전주영화제 동안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건 양파링을 먹으며 여관방 텔레비전으로 본 <마녀와 루크>가 되어버렸다. 안젤리카 휴스턴이 아이들을 생쥐로 만드는 몹쓸 대마녀로 나오는 이 어린이영화도 그나마 시일이 지난 뒤엔 ‘비오는 날에 본 공포영화’로 기억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손원평/ 자유기고가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