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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들 두고두고 쓰고 싶어, 생각 있음 연락해”
2002-05-02

멕시코에서 고생한 마지막 영화 <애니깽>, 창고라도 내어 의상 활용하는 풍토 만들고 싶어

그럼 내 마지막 영화였던 <애니깽> 얘기를 해볼까.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고생스런 피날레였지. <애니깽> 역시 <하얀 전쟁>과 마찬가지로 해외에서 올 로케로 촬영된 작품이었어. 멕시코였는데 아무튼 베트남보다 10배쯤 고생했을 거야. 날씨도 변덕스럽고, 현지인들의 협조도 잘 안 되고. 2개월로 예정됐던 일정이 6개월로 무려 3배 이상 길어졌으니 나중엔 배우들이며 스탭들이며 “나는 간다” 소리만 해댔지.

일제 시절 멕시코로 강제 이송되어 노역을 하던 한국인들의 모습을 담기 위해 한복을 200벌 정도 미리 준비해서 가지고 갔는데, 막상 엑스트라로 출연할 현지인들에게 옷이 잘 맞지 않는 거야. 멕시코 여자들이 키가 작으면서도 몸매가 다부져서 차라리 남자 옷을 잘라서 입히는 편이 나을 정도였지. 게다가 소품을 담당하던 현지 출신 스탭이 돈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기 위해 얼마나 잔머리를 쓰는지 감독 속이 꽤나 썩었지. 한번은 탄창에 넣을 가짜 총알을 준비해달라고 하니까 이걸 무작정 비싼 재료를 쓴다고 볼펜으로 만들어온 거야. 그런데 감독이 총알 분위기가 안 난다고 퇴짜를 놓으니 이번에는 백묵을 가져다 끼워놓지 뭐야. 슛이 들어갔는데 백묵으로 만든 총알들이 그냥 맥없이 뚝뚝 부러져서 우르르 흘러내리지 않겠어. 내 참, 보다보다 못 참고 내가 나서서 손가락 마디만한 굵기의 나뭇가지들을 꺾어와 주욱 꽂아주니 부러지지도 않고 색깔도 튀지 않아 무사히 신을 넘겼지. 그런 식이었어.

현지인의 횡포와 날씨의 변덕, 스탭과 배우들의 불만이 고조되면서 후반으로 갈수록 분위기는 점점 더 엉망이 되었지. 그래도 감독이 대단한 존재야. 다들 떠나겠다는 스탭들을 끝까지 눌러앉히고 영화를 다 찍었으니. 나중에 편집도 안 된 러시필름으로 대종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 들려왔어. 고생을 했으니 보상을 받는 것은 당연했지만, 얼마 안 가 수상 과정이 문제가 됐지. 개봉도 하지 않고 불명예만 잔뜩 안고 비디오로 출시된 그 영화를 볼 때마다 나 혼자 되뇌곤 하지. 영화는 사람이 만드는 거라 사람이 힘들면 영화의 결말도 힘들어지는 거라고. 영광과는 거리가 먼 힘든 일이었지만 후회 역시도 없는 나의 의상 얘기는 여기까지야.

얼마 전 영상자료원에서 열린 정진우 감독 회고전에 갔더니 한 학생이 반갑게 인사를 하더라구. 그래서 날 아냐 했더니 여기에 실린 글을 읽었다나. 자기도 영화의상에 관심이 있어 지금 신인 감독 밑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그래서 다른 말은 해줄 게 없고 딱 두 마디만 당부했어. 대본은 반드시 10번 이상 읽을 것, 매일 일지를 쓸 것(일기가 아니라). 대본은 아예 달달 외울 정도가 돼서 감독이 지시하는 것만 들어도 이게 무슨 장면인지 알아야 하고, 일지를 씀으로써 각 장면에 쓰이는 옷 이름과 종류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해. 물론 밥을 굶어도 영화판에 3년은 붙어 있을 각오도 있어야 하겠지만. 이 두 가지만 기억하고 실천해야 의상을 만지는 기본이 완성되는 거지. 이 글을 읽는 의상학도들도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마음에 새겨둬야 해.

어느새 마지막 글이라니 그동안 해줘야 할 말 대신 내 푸념이나 늘어놓은 것이 아닌가 걱정도 되고, 내 삶을 이렇게나마 정리한 것이 젊은 사람들에게 과연 도움이 될까도 싶어. 이제 내게 남은 일이란 몸이 말을 듣는 동안까지 계속 의상을 만지는 것과 맘 맞는 의상쟁이들과 함께 애꿎게 버려지고 외면당하는 영화의상을 한데 모으는 거야.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창고를 내어서라도 그런 의상들을 건질 수 있다면 내 할 일은 다 한 거지. 그저 한번 쓰고 버리는 일회성 물건이 아니라 두고두고 다른 영화에 활용하는, 시대와 극의 분위기에 따라 헌 의상을 적절히 고쳐 쓰는 그런 영화풍토를 만드는 게 나의 바람이야. 그런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든 연락해. 그리고 지금까지 읽어줘서 고마워.

구술 이해윤/ 1925년생·<단종애사> <마의 태자> <성춘향> <서편제> <금홍아 금홍아> <하얀 전쟁> <친구> 의상 제작 정리 심지현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