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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원신연 감독, "독립군의 ‘어떻게’보다는 ‘왜’에 집중하고 싶었다"
송경원 사진 오계옥 2019-08-15

안팎으로 뜨겁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처음 승리를 거둔 역사, 1920년 6월 만주 봉오동에서 쟁취한 승리의 기억을 스크린 위에 옮겼다. 원래 김한민 감독이 기획했던 영화는 <용의자>(2013), <살인자의 기억법>(2017)의 원신연 감독의 손을 거쳐 생생한 현재로 되살아났다. 독립군의 저항정신을 담아낸 내용도 뜨겁지만 영화를 둘러싼 반응도 그에 못지않게 달아오르고 있다. 과거사 문제로 촉발된 한일간의 대립이 첨예해지는 시점에 기억하는 항일무장운동의 역사는 그저 지나간 과거에 머물지 않고 오늘 우리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다. “역사가 스포일러인 영화다. 우리는 봉오동 전투의 승리를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영화가 재현한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봉오동 전투>는 얼핏 직선적으로 내달리는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굽이굽이 굴곡진 사연을 지닌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있다. 동시에 여름 블록버스터로서 장르적 재미도 함께 추구하며 균형을 맞추고자 애쓴다. 원신연 감독은 쉽지 않았던 여정을 끝내 완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뜨거웠던 그 여름에 관한 기억을 전한다.

-공교롭게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경색되고 있는 시점에 영화를 개봉한다.

=실은 걱정이 많다. 과거사 문제부터 경제, 정치, 민간교류 영역까지 모든 갈등이 첨예해지고 있는 상황이라 자칫 의도가 왜곡될까 조심스럽다. 물론 늘 수면 아래 살얼음처럼 깔려 있던 문제들이니 언젠가는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교롭게 영화 개봉 시기에 이런 상황이 만들어질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독립군의 전쟁을 소재로 한 만큼 반일 정서가 바탕에 깔려 있을 수밖에 없는데 예민한 시기라 섣불리 반응을 짐작하기 어렵다. 필요한 이야기, 꼭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간 되돌아봤어야 할 역사라고 생각한다.

-의도하지 않았어도 개봉 시기가 적절한 것 같은데 어떤 부분이 걱정스러운 건지.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하는 숭고한 저항정신에 대한 이야기다. 덧붙여 굴욕의 역사가 아니라 승리의 역사가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자 했다. 다만 요즘 현실에 대입해서 보면 거기에 더해 반일 감정이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쏠릴 우려가 있는데, 그런 식으로 의미가 지나치게 좁혀지진 않았으면 한다. <봉오동 전투>는 반일이라기보다는 항일의 영화다. 엄혹한 시대에 꽃피웠던 저항정신이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불붙고 있다. 반성과 변화가 없는 일본 정부 때문에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지금, 그 때의 뜨거운 마음을 어떻게 이어받아갈 것인지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작은 불씨가 되길 바란다.

-지금까지 연출한 작품 중 가장 규모가 클 뿐 아니라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봉오동 전투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언제부터 구상했나.

=<명량>(2014)을 개봉하기 전부터 충무로에서 봉오동 전투를 영화로 기획 중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접했다. 많은 감독과 제작사가 나름의 시각으로 접근했던 것으로 안다. 당시 구체적인 제안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만약 내가 만든다면 이름 없는 민초와 독립군의 이야기로 만들면 좋겠다고 막연히 상상해보던 차에 김한민 감독에게서 시나리오를 건네받았다. 내가 구상했던 접근이나 시선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많아서 용기를 내 각색에 참여하게 됐다.

-<명량>을 비롯한 위인에 대한 역사극과 달리 이름 없는 독립군들의 이야기에 더 끌린 이유가 있나.

=학창 시절 봉오동 전투와 홍범도 장군에 대해 배우긴 했지만 구체적이진 않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특정한 이미지로 기억되는 신화적 존재라는 느낌이 강했다. 신출귀몰하고 위엄 있는 거대한 호랑이 같은 이미지랄까. 다만 영웅들의 서사는 워낙 많으니 이제는 다른 패러다임으로 접근하고 싶었다. 봉오동 전투는 저항의 역사이자 승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영웅으로 기억되는 위인들도 평범한 한 인간의 일면이 있을 거다. 반대로 평범한 민초들에게도 영웅적인 면모가 있다.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은 대부분 훈련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민초들이었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싸우게 했을까. 그 이유를 되새기고 기억하고 싶었다.

-역사를 소재로 한 만큼 메시지가 분명한 건 사실이지만 여름 블록버스터영화에 충실하게 장르적 재미를 살리려 노력한 부분이 많다.

=원래 영화를 시작할 때 장르나 형식적인 틀을 세우고 접근하는 편은 아닌데 <봉오동 전투>는 달랐다. 이건 역사를 이야기하는 영화인 한편 영화로 이야기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관객의 시선에 따라서 영화적인 재미를 우선할 수도 있고 역사적인 내용을 중요시할 수도 있다. 볼거리로서의 스펙터클한 재미와 내용상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감정, 두 가지의 균형을 맞추며 접근하고자 했다.

-독립군 분대장 이장하(류준열)와 그를 동생처럼 아끼는 황해철(유해진)이 일본군을 대단원의 전투 장소인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해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황해철과 이장하 두 캐릭터는 실제 봉오동 전투 기록에 남아 있는 실존인물의 이름을 따왔다. 시대적 특징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여러 설정을 반영하긴 했지만 독립군의 실제 이름을 이어받아 쓴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황해철은 홍범도 장군의 젊은 시절을 상상하며 캐릭터를 만들어나갔다. 일본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을 넘어 거의 무속적인 존재로 다가가는, 그야말로 호랑이처럼 두려운 존재로 그리고 싶었다. 항일대도를 휘두르는 걸로 설정한 것도 그 때문이다. 칼은 상대 가까이 접근해서 얼굴을 마주한 뒤에야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무기다. 피치 못할 경우 피를 보는 걸 두려워하지 않되 힘에 도취되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맞서되 죽여야 할 인물은 죽이고 살려야 할 인물은 살린다. 반면 이장하의 총은 반대다. 적에게 가차없고 정해진 바를 향해 망설임 없이 직진하는 캐릭터를 닮았다.

-항일대도에 새겨진 문구가 인상적이다.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처럼 가볍다.’ <사기>를 쓴 사마천이 궁형을 받은 후 친구에게 보낸 편지 구절의 일부다. 각 인물의 전사(前史)를 길게 만들곤 하는데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홍범도 장군이 그 글귀를 새겨준 것으로 설정했다. 그게 독립군들이 죽음을 대하는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한다.

-전작들에 비해 좀더 직접적이고 선명하게 상징을 활용한다. 항일대도의 글귀가 그렇고, 월강추격대장 야스카와 지로(기타무라 가즈키)가 호랑이를 해체하는 장면으로 처음 등장하는 점도 그렇다.

=호랑이는 산의 신으로서 민족정기, 혹은 홍범도 장군이라는 상징성을 주고자 했다. 호랑이가 누워있는 모습도 조선의 지도와 같은 모양으로 배치했는데 그걸 잡아내는 분도 있었다. 영화 오프닝에 황해철이 어린 동생의 시체를 부여잡고 우는 장면에서 불타고 있는 나무도 유린된 조국을 이미지로 표현해본 것이다.

-호랑이를 마구 찔러 죽이는 장면, 일본군이 마을 주민을 학살하는 장면을 잔혹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다소 과하다는 반응도 없지 않다.

=표현 수위를 놓고 많은 고민과 토론이 있었다. 지금 남아 있는 부분은 상당히 절제하고 덜어낸 버전이다. 촬영한 장면을 기준으로 하면 20~30%로 수위를 조절했다. 애초에 왜 그렇게 잔혹하게 찍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영화적 과장이나 볼거리를 위한 전시가 아니다. 명확하고도 유일한 기준은 실제 자료를 최대한 재현하겠다는 것이었다.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토대로 일본군이 조선인의 목을 치는 장면에서 각도까지 자료와 일치시키고자 했다. 실제 자료로 확인할 수 있는 잔혹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것 또한 외면해선 안 되는 진실이다. 전부 알 순 없더라도 정면으로 마주해 견디고 이겨내야 할 단계라고 생각했다.

-역사를 다룬 영화에서 항상 직면하는 문제인데 다큐멘터리가 아닌 이상 어느 정도 각색과 상상력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상업영화는 역사적 소재를 차용해도 상상의 여지가 어느 정도 있기 마련이지만 <봉오동 전투>는 가능한 한 기록과 고증을 따르려고 노력했다고 자부한다. 무엇보다 시대 특성과 시대정신에 왜곡이 있어선 안 된다는 원칙을 세웠다. 반면 단순화할 부분은 단순화하기도 했다. 가령 <봉오동 전투>는 내내 달려야 하는 영화다. 이동 과정의 동선이나 시간은 호흡을 위해 다소 축약하기도 했기 때문에 공간이 상대적으로 좁아 보일 수 있다. 아까 말했다시피 ‘어떻게’ 유인하는지 과정 자체는 내게 그렇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이들이 끌고 가는 감정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풍경으로 말하는 영화처럼 보일 정도로 로케이션이 특히 눈에 띈다. 조감으로 찍은 능선 등 풍경이 주는 압도감이 있다.

=로케이션에만 15개월 정도 걸렸다. 원래는 봉오동 전투가 실제로 벌어진 지역에서 촬영하려고 했는데 사드 배치 등의 문제로 한중 관계가 경색되면서 허가가 나지 않았다. 이후 가장 유사한 곳을 찾아 우리나라 전국을 찾아다녔다. 그 시기 어려움은 이루 다 말하기 힘들다. 하나같이 도보로만 접근 가능한 곳이라 한 장소를 둘러보는 데 하루가 꼬박 걸리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감동적이었던 건 허가가 거의 나지 않던 지역도 영화의 내용과 취지를 설명하면 흔쾌히 협조를 해주셨다는 점이다. 독립군이 지켜낸 이 땅, 이 땅의 사람들에 대한 감사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번 영화와 관련해 환경훼손 문제를 지적받았는데 어떻게 말해도 변명처럼 들릴까 싶어 말하기 조심스럽다. 야외 로케이션이 많은 만큼 환경훼손 문제를 처음부터 매우 신경 썼지만 노력이 모자랐다.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진행한 건 두말할 것 없이 잘못이다. 이런 뼈아픈 경험을 살려 환경훼손 방지 가이드를 만들고 공유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용의자> 등 전작을 보면 짧고 빠른 호흡으로 치고 나가는 액션 구성이 탁월한데, 이번에는 다른 접근을 시도했다. 전반적으로 호흡이 길고 롱테이크로 액션을 잡아낸다. 동시에 중간중간 본인이 이제껏 시도해온 기발하고 신선한 액션도 다수 활용하고 있다. 한마디로 다채롭다.

=기본적으로 기록의 영화라는 생각으로 찍었다. 그 연장선에서 표현하자면 ‘기록의 액션’이라고 할 수 있다. 가용할 수 있는 한 카메라는 최대한 길게 찍기로 원칙을 세웠다. 나중에 장면을 쪼개기 위한 마스터숏 개념으로 길게 가는 게 아니라 애초부터 긴 호흡으로 설계해서 촬영했다. 배우들도 연극무대에 선 감각으로 액션을 대했다. 가령 유해진 배우가 칼을 휘두르는 액션도 따로 연습하지 않았고 항일대도조차 현장에서 처음 잡도록 했다.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이 담긴 그 칼은 무술이나 율동이 아니다. 울분이자 분노, 독립에 대한 열망의 몸부림 그 자체이길 바랐다.

-있는 그대로 담아낸다는 측면에서 인상적인 장면이있다. 어린 이장하가 누이와 헤어지는 장면에서 싸락눈이 내리는데 날씨가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쉬움과 애틋함이 뒤섞인 가운데 그 자체로 아름답다. 세팅된 연출이 아니라 허락된 순간을 포착한 느낌이랄까.

=영화에 몇 안 되는 따뜻한 장면 중 하나다. 제주도의 난지축산연구소에서 촬영했는데 원래는 외부인에게 열어주지 않는데 촬영을 허락받았다. 한라산 바로 밑에 있는 장소인데 그날 싸락눈이 엄청 내렸다. 눈이 쌓이면 조난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철수할까 고민했지만 이 느낌을 살려보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모아져 촬영을 감행했다. 결과적으로는 애틋한 감정이 잘 담긴 것 같아 흡족하다. 뭔가 허락을 받는 기분이었다.

-직선적으로 빠르게 내달려야 할 것 같지만 종종 이야기를 멈추고 감정적인 장면을 만들어간다. 예를 들면 독립군 은신처에서 팔도에서 모인 독립군들이 귀한 감자를 나눠 먹으며 사투리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장면이 그렇다. 말맛을 살린 상당히 재미있는 장면이다. 동시에 왜 독립군이 되었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화답처럼 보인다.

='어떻게'보다는 ‘왜’에 집중하고 싶었다. 어떤 작전으로 일본군을 유인하고 위기를 돌파해가는지보다는 왜 이들은 여기에서 이러고 있을까를 오래 고민했다. 각색 과정에서 그 부분을 스스로 해소하지 못했으면 이 작품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감자를 나눠 먹으며 팔도 사투리로 감자에 대해 난상토론을 벌이는 장면을 만들어내면서 나 스스로 인물들의 동기를 납득할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그들은 독립군이기 이전에 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그냥 ‘사람들’이다. 그들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빼앗기면서도 마지막까지 지켜고 싶었던 것, 그게 그들이 일어선 이유다. 분노와 억울함, 인간다움, 저항정신 등 이름은 다양하게 붙일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본질은 같다. 지슬이라고 부르건 갱기라고 부르건 감자가 감자인 것처럼 말이다. 그 뜨거운 마음들이 현재로 이어질 수 있도록 작은 물꼬를 틀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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