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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2002-04-30

이주의영화/그남자는

■ Story

이발사인 에드는 단지 머리를 깎을 뿐 자신을 이발사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무료하게 보낸다. 백화점 경리이며 완벽주의자인 아내 도리스와의 쳇바퀴 돌아가는 일상에서 그는 외부인에게는 말없는 평범한 이발사일 뿐이다. 어느 날 디너 파티에서 문득 아내 도리스의 외도를 눈치채게 된 에드. 아내의 외도 상대는 다름아닌 그녀의 직장 보스인 빅 데이브였다. 그는 이발소를 벗어나고 싶은 오랜 꿈을 실현시킬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는 빅 데이브에게 익명의 협박편지를 보내는데….

■ Review 캘리포니아 산타 로사의 작은 마을, 이발사를 직업으로 삼은 한 사내가 있다. 그는 심지어 집에 와서도 아내의 다리털을 밀어주는 직업적 수행을 피할 길 없는 사내이다. 그런 주인공의 목소리가 보이스 오버로 깔리는 영화의 첫 대사는 “이렇게 이발소에서 일하지만, 내가 이발사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라는 것. 영화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자기 부정으로서 내면의 누수현상으로 시작하고, 사내는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일은 점점 꼬여만 간다. 결국 코언식의 아이러니는 그가 저지른 살인죄를 무마하기 위해 고용된 변호사가 “이 사람은 현대인입니다. 그저 이발사일 뿐입니다. 보십시오. 그가 어디 살인을 저지를 사람인가”라는 강변을 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이발사가 되고 싶지 않아 블랙 메일을 쓰고 드라이클리닝이라는 신종 사업에 투자했던 사내가 결국은 이발사라는 존재 증명 외에는 목숨을 구할 길이 없는 상황.

케네스 튜란이 “존재론적 필름누아르 코미디”라 이름 붙여준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기실 ‘거기 없다’는 알리바이 부재로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나이의 ‘어떤 살인에 대한 고백록’이기도 하다. 로저 디킨스가 촬영한 수정같이 매끈하고 반들반들한 흑백의 영상은 빌리 밥 손튼의 직업이 그러했던 것처럼 모든 군더더기를 가능한 한 화면에서 면도시켜버린다. 긴장성 정신분열증 환자처럼 무표정한 주름이 깊게 팬 손튼의 얼굴 위로 쉴새없이 내면의 독백이 울려퍼지고, 이와 절묘하게 베토벤의 <월광소나타>는 텅 빈 신음소리처럼 살인을 덮어버린다. 기실 그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나 전혀 그들과 섞이지 않는 유령으로서 자기 세계에 완벽히 갇혀 있는 부정형으로 세상을 떠돈다. 필름누아르에 자주 나오는 탐정이나 형사와는 거리가 먼 이 사내는 빈틈없는 형식주의로 축조된 코언식 누아르와 완벽히 맞물리는 외관을 가진 것이다. 차단된 이발소, 막힌 집안, 닫힌 호텔, 갇힌 감옥으로 이어지는 폐쇄공포증적인 미장센은 바로 40년대 미국 소읍 공동체의 질식할 듯한 공기를 누아르라는 오래된 그릇으로 접수하려는 2001년 코언의 또 다른 장르적 실험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코언 형제가 뮤지컬과 그리스 극을 결합한 <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 이후 그들이 가장 잘할 수 있고 또 가장 좋아하는 장르의 안전판에 착지했다는 신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비록 주인공 이름을 에드 크레인라 했건만 '크레인 숏은 거기 없었다'는 제목답게 정교한 줌 인과 줌 아웃으로 에드의 내면과 외면을 오간다. 그것은 중첩된 프레이밍, 극단적인 클로즈 업이나 대담한 부감 같은 필름누아르의 과감한 연출방법과 차별화된 코언 형제의 신종 누아르 연출법인데, 코언 형제는 흠잡을 데 없이 통제된 형식주의와 느리게 유영하는 카메라로 전통 누아르에 화답을 한 셈이다.

또한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오해와 모순으로서의 부정형을 이야기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반대방향으로 걷는 에드의 모습처럼 화면과 에드의 내면의 목소리는 진실의 점근선은커녕 사실로서의 존재 증명조차 힘들다. 게다가 스토리 중간에 갑자기 UFO나 영매 같은 돌출된 장치들이 툭툭 장르의 법칙을 건드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외부와 내면의 간극, 인간과 인간의 간극, 그리고 장르와 장르 사이에서 벌어지는 2%의 간극이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에 메울 길 없는 긴장감과 모순의 시발점이기도 할 것이다. 사실 그건 코언 형제가 애초부터 아주 좋아했던 장난이 아니던가? 게다가 에드가 사기를 당한 사업이 바로 드라이클리닝이라는 사실. 이 미래의 산업에 에드는 아내의 불륜을 미끼로 획득한 전 재산을 미련없이 털어넣을 수 있었다. 바로 그 점이야말로 머리털 날리는 이발소 대신 건조하고 깨끗한 드라이클린 누아르를 원했던 코언 형제의 바람과 꼭같이 일치하는 어떤 메타포는 아니었을까 싶다.

결국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복수는 나의 것>처럼 자신의 주인공들을 모두 죽이고서야 빙빙 도는 미로 게임을 멈춘다. 기본만 익히면 별것 아니라는 신조로 사람들에게 획일적인 머리털 깎기를 시도했던 에드는 마지막에 가서야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머리칼은 자라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40년대 미국의 시대적 증후로써 회색빛 화면에 새겨진 그의 죄는 아마도 이것뿐일 것이다. 자신을 포함한 많은 인간의 본능을 거세한 죄. 신의 맷돌은 천천히 구르지만 어느 낱알도 놓치지 않는 법이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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