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에서 <트래픽>까지, 스티븐 소더버그의 작품세계
“그 녀석은 칸의 자식이 아니죠. 우리 아이라구요.” 이런 얘길 하고 싶었던 것일까. 뉴욕비평가협회, LA비평가협회, 전미비평가협회가일제히 <트래픽>에 감독상을 바치며 원더 키드 스티븐 소더버그의 귀환을 환영했다. 오스카도 그를 향해 미소짓는다. 2000년 나란히 선보인
<에린 브로코비치>와 <트래픽> 2편이 동시에 올해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 눈부신 성공이지만 소더버그에겐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빔 벤더스가 심사위원장을 맡은 1989년 칸영화제는 미국에서 온 26살의 영화신동에게 황금종려가지를 던졌다. 그는 칸 역사상 최연소 챔피언이었다.
“이제 내리막만 남았어요.” 소더버그는 그렇게 말했고, 현실은 그의 예언대로 흘러갔다. 칸 그랑프리 수상경력이 그의 명함에 새긴 ‘인디영화의
마스코트’라는 금박글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에서 가장 운좋은 녀석”으로 바뀌었다. 1998년 <조지 클루니의 표적>이 나오기까지 그의
경력은 변두리를 맴돌았다.
소더버그 영화인생의 새로운 10년이 시작된 지금, 여전히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그의 영화를 구하기는 힘들다. 전에는 테이프를 갖춰놓은 곳이
드물어서, 이제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해서다. 이처럼 그는 분명 재기했지만, <조지 클루니의 표적> 이후 소더버그의 ‘2기 영화’들은 그것이
처음 출발한 지점으로 돌아왔다는 의미의 ‘재기’는 아니라고, 할리우드의 라임라이트 속으로 투항한 것도 아니라고 은연중에 들려준다.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그는 정말 ‘독립영화에 대한 독립 선언’을 자기 영화를 통해 낭송하고 있는 것일까? 지난 12년간 ‘천재’ 소더버그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2년생 징크스, 너무나 의미있는 실패
소더버그의 고향인 루이지애나주 바톤 루즈를 무대로 네 남녀의 성적, 심리적 고해성사를 교차시킨 120만달러의 영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는 한마디로 지축을 흔들었다. 스키 리조트의 아담한 영화제였던 선댄스영화제를 영화계의 최첨단 패션쇼로 만들었고, 미라맥스를
할리우드 스튜디오 지도 위에 올려놓았으며, 도회지 젊은이들의 ‘워킹 앤드 토킹’(walking and talking)을 트레이드마크로 삼는
90년대 미국 인디영화의 밑그림을 슥슥 그려 그것을 팝문화 첨단의 한 색인으로 편입시켰다.
하지만 소더버그의 ‘2년생 징크스’는 그의 등장만큼이나 유난스러웠다. 작가 카프카를 테리 길리엄의 <브라질>을 연상시키는 흑백 도시에 데려다놓은
후속작 <카프카>는 야심이 돋보였을 뿐, 독창성과 생기의 결핍으로 창백한 영화였다. 무르나우라는 이름의 악당과 그림자가 곳곳에서 어른거리는
미장센이 <제3의 사나이>와 독일 표현주의에 대한 ‘우등생’다운 오마주를 바쳤을 따름이었다. <카프카> 이후 좀 온기가 도는 영화를 하고
싶다고 토로했던 소더버그는 극한 상황에 놓인 한 소년의 대공황기 생존기록을 담은 <리틀 킹>을 다음 프로젝트로 택했으나 첫 영화의 여운을
지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49년작 필름누아르 <크리스 크로스>를 리메이크한 1995년 <언더니쓰>는 소더버그가 개인적으로 ‘최악’이라고
딱지를 붙인 영화. “어디 범세계적 문화 수호 기동대가 있어서 이런 아이디어를 영화화하겠다는 인간이 있으면 쳐들어와서 막아줘야 한다”고
농담을 했을 정도다. 촬영 전부터 엄청난 실패작이 될 것이라 예감했다는 영화답게 <언더니쓰>는 제작사와 평론가, 관객을 골고루 난감하게
했다. 그러나 지금 와 돌이켜보면, <조지 클루니의 표적> <라이미> <트래픽>으로 이어지는 소더버그식 범죄영화의 시작인 <언더니쓰>는
의미있는 실패다. 익숙한 필름누아르 요소들이 이룬 낯선 조합이 협화음을 이루지 못해 외면당했지만 스타일면에서 <언더니쓰>는 완벽한 구성의
영화 <트래픽>의 전주곡을 들려준다. 여기서 소더버그는 면도날로 베어내듯 시간을 얇게 베어내서 서로 다른 층에 쌓아놓는다. 이 화술은 일반적인
플래시백 기법을 정교화한 <라이미>의 현란한 커팅이나 공간을 뛰어넘는 <트래픽>의 활주를 예감케 한다.
헤엄치거나 혹은 가라앉거나
<섹스, 거짓말…> 이후 소더버그가 발표한 세편의 영화는 돈은 전혀 벌지 못했으나, 소더버그를 이해하려는 이들에게 적어도 두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첫째는 감독으로서 소더버그가 카멜레온 같은 인물이라는 점. <섹스, 거짓말…>의 유연함과 <카프카>의 폐소공포증, <리틀 킹>의
노스탤지어와 <언더니쓰>의 내러티브 실험을, 한 감독의 세계로 꿰어내는 데에는 상당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한편, 이 영화들은 소더버그에게는
좋은 작가 파트너가 필요하다는 현실과 더불어, 에디터로서 출발한 감독으로서 소더버그가 지닌 편집의 재능을 증명했다. 비디오테이프 안팎의
시간을 오가며 극적 긴장을 높인 <섹스, 거짓말…>이나 <트래픽>의 실험까지 이어지는 <언더니쓰>의 시간 비틀기는 대표적이다. 1996년
스폴딩 그레이의 연극 모놀로그를 영화화한 <그레이스 아나토미>까지 형식에 대한 완벽주의적 집착을 밀어붙이던 소더버그는 같은 해 <스키조폴리스>로
그 끝을 보았다. 소더버그가 친구로 스탭을 구성하고 본인이 촬영, 주연- 그것도 일인다역- 까지 맡은 이 영화는 배우자의 도플갱어(분신)와
사랑에 빠지는 중산층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 분열증의 영화. 마치 감독의 대뇌피질에서 잉태된 듯한 <스키조폴리스>를 가리켜 'LA' 의 폴
말콤은 ‘스타일의 환각파티’라는 비유를 썼고, 경력의 한 단락에 오기에 찬 마침표를 꾹꾹 눌러 찍은 소더버그는 <나이트워치>의 시나리오를
쓰고 <플레전트빌>을 제작하는 외도에 들어갔다. 많은 사람에 의해 “최초의 비상에 이어진 느린 추락”으로 묘사된 다섯편의 이른바 실패작들에
대해 소더버그는 어느 인터뷰에서도 구구히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영화가 별로니까 망한 거죠, 뭐”라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소더버그는 이 영화들을 통해 실패에 대해 편안해지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일이 잘 되지 않을 때에는 하고 있는 일의 방식을 바꾸거나 다른
할 일을 찾아야 함을 깨달았다. <트래픽>을 들고 온 베를린영화제에서 소더버그는 말했다. “자유롭게 움직이며 영화를 만들지 못한다면 나는
초조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그래서 게토 속에 갇히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헤엄치거나 아니면 가라앉거나였다.
주류 할리우드로의 개종,그리고 거대한 성공
시네아스트 명예의 전당에 새겨진 그의 이름이 마모되어 갈 무렵, 스티븐 소더버그는 여러 감독에게 거절당한 유니버설영화 <조지 클루니의 표적>으로
그의 이름에 슬슬 하품을 하고 있던 사람들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를 ‘아트하우스’의 붙박이 감독으로 알던 스튜디오 관계자를 “나, 잘할
수 있다”고 적극 설득해 메가폰을 잡은 소더버그는, 약속대로 잘 빠진 오락영화를 내놓았다. 그러나 동시에 소더버그는 엘모어 레너드의 <펄프픽션>이
지닌 간명한 대사와 예술 수준에 이른 얄팍함의 미학을 거의 완벽하게 스크린에 옮겨놓았다. 인물의 맥박이 느껴지는 촬영, 점프컷과 정지프레임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달인급의 편집, 건조한 유머, 그리고 탈옥범 조지 클루니와 FBI 수사관 제니퍼 로페즈가 한잔의 술을 마시는 짧은 시간으로
만들어낸 영화사상 손꼽힐 만한 러브신. 레너드 원작의 쿨한 공기와 미니멀리즘의 미학을 소화하는 데에 있어서, 소더버그는 자기 뒤를 이어
인디영화의 총아로 떠올랐던 <재키 브라운>의 타란티노를 저멀리 따돌려 버렸다. <…표적>은 재미있고 우습고 섹시했다. 원작의 결말을 바꿔
해피엔딩으로 매듭지어진 이 대중영화를 소더버그는 온전히 주류영화의 계율 안에서 만들었다. 남녀는 맺어지고, 인과관계는 모조리 해명되고,
시간은 내러티브의 설명에 알뜰히 소비된다.
<라이미>(1999)는 그런 <…표적>이 단순한 ‘개종’이 아님을 짐작게 한다. 영국의 원로배우 테렌스 스탬프가, 끔찍이 사랑했지만 평생
소원(疏遠)했던 딸의 살인범에게 복수하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날아온 전과자로 분한 <라이미>는, 70년대 영화에 대한 향수가 90년대 인디영화적인
교묘한 플롯과 뒤섞이고, 인생의 비애가 범죄영화와 미스터리의 스릴 속에 스며든 수작. 이 영화에서 소더버그는 스탬프가 출연했던 켄 로치의
67년작 <푸어 카우>의 클립까지 이용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잘게 뒤섞는 실험을 계속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카메라를 직접 잡았다.
“나보다 나은 카메라맨은 많지만, 친밀감과 스피드라는 면에서 내가 찍는 것이 낫다”고 밝힌 소더버그는 <트래픽>에서도 스스로 카메라를 든다.
<조지 클루니의 표적>으로 <배트맨과 로빈> <피스메이커>를 벗어날 돌파구를 찾던 조지 클루니에게 <쓰리 킹즈> <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로
통하는 길목을 터준 소더버그는, 줄리아 로버츠의 <에린 브로코비치>에서도 이미지가 고착된 스타의 혈관에 새 피를 돌게 하는 재능을 다시
발휘한다. 호평을 부록으로 매단 <에린 브로코비치>의 커다란 성공으로 소더버그는 제작비 확보를 더이상 염려하지 않아도 되게 됐다.
“4900만달러짜리 도그마영화”라고 부르는 성공작 <트래픽>에 이르러, 소더버그의 새로운 ‘정책’은 윤곽을 드러낸 듯하다. 그는 주류영화와
인디영화에 아주 가까이 있으면서도 결코 한쪽 선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트래픽>은 마이클 더글러스와 캐서린 제타 존스가 나오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상영시간의 1/3을 스페인어로 들려주고 1/3을 핸드헬드 카메라로 찍은 모험작이기도 하다. 친밀한 소규모 스탭과 더불어 아주 신속하게
영화를 찍어내는 그의 히트 앤드 런 식 프로덕션은 소더버그의 작가적 실험에도 할리우드의 제작자들한테도 흡족한 방식이다. 소더버그는 스타를
호객에 확실히 이용하지만, 이미 그들이 벌어놓은 이미지에 덥석 업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보여지지 않은 뒷모습을 끌어낸다. 요컨대 그는
오락영화를 만들되, 성인 관객의 지성과 호기심을 오락성의 원천으로 착취한다. 덧붙여 <…표적> 이후 소더버그 영화에서 눈길을 잡아끄는 현상은
인간적인 감정의 귀환. 그의 요즘 영화들은 시네마베리테 식으로 달려가다 한순간 발을 멈추고 심금을 울리는 순간에 고요한 시선을 던진다.
<라이미>에서 평생 서먹하게 지낸 딸의 어여쁜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범죄자 아버지의 회상이나, 미인대회의 여왕으로서 ‘세계를 구원하려 했던’
꿈을 상기하는 에린 브로코비치, 모든 일이 끝난 뒤 불 켜진 저녁 야구장에서 공을 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하비에르 형사의 모습은, 사막에
핀 꽃처럼 마음을 파고든다. <리틀 킹>을 찍을 무렵 이미 “나의 약점은 좀 지나치게 차갑고 분석적인 것”이라고 토로했던 소더버그는, 이제
자신의 건조함을 관객의 감정을 흡수하는 마른 ‘해면’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지우고 공식 속으로!
이런 의심도 든다. 막힌 수도관을 뚫는 배관공이나 쌓인 눈을 치우는 인부처럼 덤덤하고도 효율적으로 영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소더버그는 어쩌면
자신을 ‘천재’로 추어올렸다 멋대로 건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쉽게 실망을 말했던 사람들을 가장 예의바른 방식으로 조롱하고 있는 게 아닐까.
메이저 스튜디오의 프로젝트가 됐건 미니메이저의 영화이건, 대중영화의 패러다임 안에서 오히려 더 탄탄한 재능을 과시하고 있는 스티븐 소더버그의
근황을 보고 있자면, 할리우드에 고용된 뒤 한층 자기답게 작가적 세계를 완성했다는 평을 들었던 히치콕이 떠오른다. 아마 소더버그 역시 자신의
창조성을 강직상태에서 풀어주기 위해 외적인 규율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남들이 튀는 개성을 깃발처럼 펄럭이며 달려드는 시대에 거꾸로 공식
안으로 들어가 승부를 내려는 소더버그에게서는 그의 주인공들을 닮은 냉정하고 유능한 프로페셔널의 냄새가 난다. “예술품은 지배적 스타일의
전제에 능란하게 복종하면서도 가치를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한 데이비드 보드웰의 논리를 생각하면, 소더버그가 불리한 게임을 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베를린영화제 회견장에서 소더버그는 “내 경력 전체는 성인용영화가 생산되던 70년대를 사는 척하는 것이다”라고 알 듯 말 듯한 말을
남겼다. 아마 그는 모호한 유럽 예술영화를 추종하기보다 할리우드 클래식의 견실한 내러티브와 스타일을 계승해 지적 자극과 오락을 함께 선사한
70년대 중반의 씩씩한 일군의 미국영화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하긴 장르의 규칙 안에서 몸을 낮추고 자신의 존재를 지우면서도 생기있는 대중예술품을
성실하게 만들어가는 소더버그의 수공업자적 태도는 클래식 할리우드영화가 지닌 최선의 덕목 그대로다. 소더버그의 차기작은 지난 달 촬영에 들어간
<오션스 일레븐>. 줄리아 로버츠, 조지 클루니, 브래드 피트가 출연하는 프랭크 시내트라 주연 60년작의 리메이크다. 소더버그는 범죄의
연구와 스타 파워의 진취적(?) 활용, 과거 영화의 재해석을 계속할 심산인 것이다. 포커 테이블에 앉은 ‘꾼’처럼 무표정한 얼굴과 민첩한
손짓으로 주류영화와 인디영화의 이분법을 돌파해 나갈 것이다. “경험있는 감독, 돈에 대한 책임감 강함, 당신의 소재에 자신의 비전을 더할
준비가 돼 있음. 전화 주세요.” 소더버그가 언제나 게재할 의향이 있다고 말한 광고 문구다. 모르긴 해도 지금 그의 전화벨은 쉴새없이 울리고
있을 터다.
남동철 기자 [email protected]
김혜리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