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요지(74)는 60년대부터 일본 독립애니메이션을 개척해온 1세대 감독.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풍자와 해학, 만화체와 실사영상,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 실험을 넘나드는 독창적인 작품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온 노장이다. ‘일본 단편애니메이션’에 초청된 작품과 함께 처음 한국을 찾아온 그를, 개막식 직후에 만났다. “그림쟁이는 말이 없다. 그릴 뿐”이라는 그는, 인터뷰에서도 그림으로 많은 설명을 대신하곤 했다.
좀전에 영화는 안 본다고 하면서 개막작을 안 보고 나왔는데, 영화를 안 보나.
요즘은 거의 안 본다. 좋아하긴 하는데, 이제는 영화를 볼 때마다 중간에 잠이 들어 버린다. (웃음) 극장에 가면 사람이 많은데 코를 골며 자 버리니까 안 보게 된다. 애니메이션? 챙겨 본다. 애니메이션은 안 졸린다. 내가 하는 일이고, 생명이니까.
애니메이션 감독보다 신문 만화가로 먼저 알려졌는데, 원래 만화를 좋아했나.
출발은 그림, 회화였다. 신문만화? 돈 때문에 그렸다. (웃음) 회화는 안 팔리기 때문에…. 대답이 좀 간단하지?
노먼 맥라렌의 실험적인 작품들을 보고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신문만화는 돈, 그리고 풍자와 패러디의 재미 때문에 했다. 나중에 돈을 모아서 애니메이션을 한 거고. TV가 없던 시절이라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갖게 됐다. 실험영화를 많이 보러 다니곤 했는데, 거기서 노먼 맥라렌의 애니메이션과 조지 더닝의 <옐로우 서브머린> 등을 봤고, 영향을 받았다.
회화, 조각, 만화, 애니메이션, 실사영화 등 다양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림이든 만화든 애니메이션이든 영화든 시든 다 마찬가지다.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 그런 식이다. 굳이 하나를 고르라면 지금은 애니메이션이다. 애니메이션에 대한 아이디어가 많이 떠오르니까.
동물원 우리에서 여자가 다양한 방식으로 남자를 때리는 <인간동물원>이나, 남자는 도망다니고 여자는 쫓아다니는 <사랑> 등 남녀의 역학관계에 대한 역설적인 묘사가 많다. 가부장 중심의 사회에 대한 우화로 읽히는데.
이제 일본에서는 남자가 약하다.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남자가 약하기 때문에 그렇게 그린 거다. 원시 시대부터 남자와 여자의 관계, 사랑, 전쟁은 변한 게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또 어느 나라 사람이건 마찬가지다. 그리고 여자가 사나운 편이 더 평화스럽다.
일본에서 독립애니메이션을 시작한 선구자로 알려져있다. 여건이 어려웠을 텐데, 제작비는 어떻게 마련해왔나.
광고를 많이 해서 돈을 모아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스폰서의 돈은 안 받는 편이다. 스폰서에게 돈을 받으면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없다. 지금 당장은 안 만들고 있지만 앞으로 또 만들 작정이다.
신문 만화처럼 유머 감각이 돋보이는 단편애니메이션을 주로 해왔다. 장편애니메이션을 할 생각은 없었나.
생각해 본 적 없다. 짧은 걸 좋아한다. 장편이면 재미있고, 재미없고, 그게 계속 반복된다. 하지만 짧은 단편이면, 그 주기가 아주 압축된다. 태양도 너무 뜨거우면 폭발해버리고, 철도 너무 달궈지면 녹아버린다. 과하게 긴 것보다는 짧은 게 훨씬 재밌다. 짧은 애니메이션은 휴대폰으로도 볼 수 있고, 컴퓨터로도 볼 수 있다.
지금 준비 중인 작품이 있나.
1분에서 3분 정도 되는 짧은 단편 시리즈를 하려고 한다. <요지 구리 미니미니>(Yoji Kuri Mini Mini)라고. 완성되면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보여줄 예정이다. 사이트에 접속할 때 드는 돈이 200엔 정도인데, 편당 관람료는 10∼20엔(한화 100∼200원) 정도로 할 거다. 영어, 일어, 프랑스어, 중국어 4개 국어로 볼 수 있게 하고. 이제는 극장에 안 가도, TV를 안 봐도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지구 전체에서 10억이 볼 수 있다.
어떤 이야기인가.
테마는 남과 여다. 국적이 달라도 남녀 이야기는 다 이해할 수 있지 않나. 모든 영화가 사실 그렇다. 무리하게 하고 싶진 않고, 천천히, 넘어지지 않고 또 만드는 거지.
황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