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아픈 기억을 갖고 있었다. 정신없이 두들겨맞다가 기절한 사람도 있고 한달 동안 달걀은 쳐다보지도 못한 사람도 있었다. 어린 시절의 우상이 너무 무서운 사람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소림축구>에 출연한 배우들은 하나같이 “이 영화에 정성을 다했다. 평범한 코미디영화가 아니다. 감독도 정말 재능있는 사람이다”라고, 무려 아홉 가지 성조를 가진 노래 같은 광둥어로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들이 들려준 고생과 우정과 웃음의 이야기는 그대로 <소림축구-외전>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똑같을 수가!
네명의 배우를 만나고 가장 놀라웠던 것은 오맹달을 제외한 나머지 배우들과 영화 속 인물이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이었다. 그중 두명은 외모와 행동거지 때문에 즉흥적으로 출연하게 됐으므로 그럴 만도 했다.
여섯번째 사제를 연기한 임자총은 원래 주성치 영화사에 소속된 시나리오 작가였다. 인터뷰를 한 다음날에도 사무실에서 열심히 화이트보드에 다음 작품 시놉시스를 쓰고 있던 그는 오직 뚱뚱하다는 이유만으로 기회를 잡았다. 자신이 배우이면서 동시에 감독인 주성치는 “인물을 생각지 못한 각도로 배치하는 데 재미를 느낀다”는 사람이기 때문에, 몸무게가 120kg에 육박하고 평소 움직임도 느릿하기 그지없는 이 총각이 무술을 한다면 너무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본인은 지나치게 고생스러웠다. 주성치는 연기 초보인 그를 위해 모든 장면을 직접 해보였지만 단 하나, 날계란을 받아먹는 장면만은 피해갔다. 임자총은 “먹보로 나온 것은 창피하지 않았고 친구들도 대담하다고 칭찬해줬지만, 한달 동안은 계란만 봐도 토할 것 같았다”고 호소했다. 물론 지금은 계란을 무척 잘 먹는다.
골키퍼 역의 진국곤과 20년 경력을 가진 대사형 황일비는 촬영이 끝난 뒤 대자와 대부로 맺어졌다. 황일비는 이미 <심사관> <파괴지왕> 등 여러 편의 영화에서 주성치와 호흡을 맞췄던 조연. 풀어진 셔츠 자락 사이로 목걸이를 걸고 나타난 그는 꼭 대사형처럼 체신머리라고는 없이 후배들의 인터뷰에 끼어들고 대낮의 식당에서 <소림축구> 연기를 재현하면서도, 나름대로 어른의 풍모를 보이곤 했다. 얼마 전 서극과 함께 대륙에서 영화를 찍고 돌아온 진국곤은 원래 엑스트라들에게 춤을 지도하는 안무가였는데, 이소룡을 닮은 외모 때문에 지나가던 주성치에게 발탁됐다. 묵직한 임자총이 날쌘 동작을 연기하는 의외의 재미를 준다면, 마른 몸매와 날렵한 인상의 춤꾼 진국곤은 숨쉬는 것도 귀찮아하는 부조화의 인물. 그는 이 영화로 최고의 우상이었던 주성치를 직접 만나 그의 남자다운 카리스마에 흠뻑 젖었지만 너무 무서운 스승이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가장 먼저 인터뷰 장소에 나타난 오맹달은 놀랍게도 이들 모두를 손짓 한번으로 압도할 수 있는 파워를 지닌 사람이었다. <심사관2>에서 배를 내놓은 짧은 웃옷을 입고 쉴새없이 먹어대던 저능아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는 <천장지구>에서 유덕화의 연약하고 무능한 친구, 예전 홍콩영화 특유의 비애를 온몸으로 발사하는 가엾은 남자를 연기한 적도 있었다. 주성치와 마찬가지로 TVB 방송사 탤런트로 출발한 오맹달은 주성치 영화에 출연하며 망가진 모습으로 가장 인상 깊게 남게 된 것이 부담스럽지 않으냐는 질문을 “배우는 주어진 역은 뭐든지 하는 사람”이라는 무게있는 한마디로 정리해버렸다. 그는 주성치가 오랜 세월 함께 일해온 이유를 “연기를 너무 잘하니까”라고 간단하게 단언할 만큼,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연기를 펼치는 배우. 그럼에도 가장 자랑스러운 영화로 <식신>과 <소림축구>를 꼽는 그는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었다.
맥주병에 맞고 기절해도, 촬영은 계속된다
차례차례 도착한 이 네 사람은 서로 껴안고 큰소리로 안부를 묻고 웃어댔다. 인터뷰 도중에도 한 사람이 대답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휴대폰과 수첩을 꺼내들고 서로의 근황을 확인하곤 했다. 오맹달은 “홍콩은 매우 좁은 곳이다. 하지만 쉬지 않고 영화를 찍는 데다, 요즘은 모두 본토에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여러 명이 한꺼번에 만난 적은 영화 끝나고 처음”이라며 양해를 구했다. 유달리 오래 촬영한 영화라고는 해도 스무살 넘게 차이나는 사람들이 이렇게 친밀한 것은 의외였다. 황일비도 “보통 촬영이 끝나면 뿔뿔이 흩어지지만 <소림축구>는 예외”라고 말했다. 이들을 묶어준 것은 대작을 찍다보면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고된 훈련과 영화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소림축구>는 홍콩에서는 동원하기 힘든 대규모의 제작비를 동원했기 때문에 모든 결정이 신중할 수밖에 없었고, 모든 사람이 자신을 던지듯 열심이어야 했다.
그중에서도 황일비의 고생담은 유별났다. 영화 도입부에서 다리를 다치기 때문에 한번도 공을 찰 일이 없었던 오맹달과 달리, 공을 모는 법이나 잡는 법을 익혔던 다른 후배들과도 달리, 황일비는 한 시간 넘게 물구나무를 서고 맥주병으로 머리를 얻어맞았다. 그의 특기는 ‘철두공’, 다시 말해 머리를 쇠처럼 단단하게 단련하는 무공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상대방이 실수로 맥주병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 두꺼운 밑바닥으로 내려치는 바람에 기절한 적이 있었다. 잠시 뒤 눈을 떠보니 주성치가 NG장면을 다시 찍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만큼은 그도 간절하게 다시 기절하고 싶었다. 엉망진창 형제들이 모욕 끝에 예전의 기(氣)를 되찾는 장면. 그는 머리로만 버티고 거꾸로 선 장면을 연기하느라 와이어에 매달려 있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컷을 안 부르기에 그는 그 상태로 머리를 여기저기 돌리면서 주성치를 찾아 “안 끝났어? 언제 끝나?”하고 계속 물었다. 다시 한번 기절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황일비는 이 영화가 성공한 까닭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신과 주성치가 반짝이는 옷을 입고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장면을 최고로 친다. 무표정하고 진지한 그들의 노래와 춤은 웃기지만, 여기엔 버려진 사람들의 쓸쓸한 정서가 흐른다는 것이다. 그는 “성의를 다해, 내 모든 것을 이 영화에서 보여”줬고, 홍콩영화평론협회가 주관하는 금자형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누구보다 주성치와 가까운 오맹달 역시 이 영화가 희극과 비극이 어우러졌다는 점을 가장 큰 장점으로 여겼다. “<소림축구>는 컴퓨터 기술 덕을 많이 본 영화다. 하지만 쓸모없는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뭔가를 이루는 영화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오맹달은 또 “집안에서 유일한 남자로 자란 주성치는 어려운 사람들의 상황에 심취할 수 있다. 그는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낀다”고도 덧붙였다. 진국곤이 좀처럼 만나기 힘든 ‘형님’들에게 많은 것을 배워 좋아하거나, 임자총이 왜 이런 동작을 하는지도 몰랐다가 완성된 영화를 보고 신기해한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홍콩영화의 흥망을 지켜본 두 배우는 전통과도 현실과도 단절돼 부유하는 홍콩을 안타까워했다.
속편에서 다시 만나자
1년을 훌쩍 넘긴 제작기간 동안, 네 사람은 주성치의 진면목을 다시 깨달았다. 오맹달과 황일비는 모두 여러 번 주성치와 일한 경험이 있지만 그가 유독 이번만은 “10번이고 20번이고 마음에 드는 테이크가 나올 때까지 카메라를 멈추지 않았다”고 말했다. 황일비는 시나리오를 영화의 리듬에 맞도록 탄력있게 고쳐가는 주성치에게 감탄했다. “주성치는 감독도 하고 주연도 하고 편집까지 한다. 정말 총명한 사람이다. 그는 자기 특유의 스타일이 있어서, 원래 거친 성격을 갖도록 설정된 배역도 유머있고 유연하게 바꿔놓는다”고 말했다.
주성치는 시나리오뿐 아니라 젊은 두 배우의 인생마저 바꿔놓았다. 임자총은 <소림축구>가 성공한 뒤 벌써 두편의 영화를 찍어 개봉까지 마쳤고, 두 군데 방송사에서 MC로 활동중이다. 여자들은 거리에서 그를 보면 <소림축구>의 오동통한 여섯번째 사제를 떠올리며 베개 같은 그의 몸을 껴안으려 덤빈다고 한다. 진국곤 역시 아직 제목이 정해지지 않은 서극 영화에서 강시를 사냥하는 집단의 일원으로 출연했다. 그는 미국 영화사 컬럼비아 자본으로 찍은 이 영화가 자신의 연기 인생이 도약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이들 모두에겐 무엇보다 속편 제작 소문이 나돌고 있는 <소림축구> 시리즈가 있다. 황일비가 “천시(天時)와 지리(地利)와 인화(人和)가 모두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성공한 영화”라고 표현하는 <소림축구>. 이 영화는 그들에게 홍콩 최고의 인재 주성치와 일할 기회였고, 중견과 신인이 화합해 부자의 인연까지 맺은 영화였으며, 수많은 사람이 단 한편의 영화를 인생 최고의 걸작으로 꼽을 수 있다는 일치의 느낌을 준 영화였다. 홍콩=글 김현정 [email protected]·사진 오계옥 [email protected]▶ 울트라 폭소 히어로, 주성치 웃음공작실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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