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만약 부모님이 계셨다면 어땠을까? 둘중에 한 남자를, 아마도 리처드를 고르라고 하셨을 거다. 그는 한국인이니까. 하지만 일본인의 피가 흐르는 마크와 사귄다는 것, 이건 유대인이 독일인과 데이트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일까….”
2002년 2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한국계 호주인 여성 다큐감독 멜리사는 한국계 미국인 다큐감독들에 관한 영화를 찍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그들을 카메라에 담고 때론 파티에서 함께 어울리던 어느 날 밤, “키스해도 될까?” 하고 물어오던 한국계 미국인 다큐감독 리처드 킴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일주일 뒤, 그녀는 리처드의 친구이자 일본계 미국인 전직배우 마크 하야시에게 또 다른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어떻게 하나. 이 여행은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함이지 연애를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게다가 한꺼번에 두명이라니. 이 와중에도 졸업을 위한 다큐멘터리 촬영은 계속 진행된다. 아, 두 남자 중 누가 진정한 사랑일까? 그리고 이민온 지 25년, 이미 호주사람이 되어버린 자신의 연애사에 ‘일본놈은 안 된다’는 고리타분한 부모의 역사가 왜 자꾸 끼어드는 걸까. 아니 왜 하필이면 이곳에서 머리털 나고 한번도 겪지 않았던 민족적 정체성의 혼란에 빠져드는 거지? 그리고 도대체… 사랑이란 것, 지금 찍고 있는 이 다큐멘터리의 진실은 뭐야?
내 혼란을 영화로 담아내자
2001년 야마카타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오가와 신스케상을 수상했으며 2002년 여성영화제에 소개되어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이규정(멜리사 규정 리) 감독의 <사랑에 관한 진실>(A True Story about Love)은 원제 그대로 감독 자신의 ‘사랑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드라마다.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7살에 시드니로 이민간 뒤 호주영화방송학교(AFTRS)에서 다큐멘터리연출을 공부하던 이규정은 “재미한국인 다큐멘터리 감독들의 교차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졸업작품용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샌프란시스코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리처드와 마크를 만나 동시에 사랑에 빠진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재미동포 다큐감독들을 인터뷰하면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을 떠나 살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들은 확연히 호주에 사는 한국인들과 달랐고 나는 그들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게 없었다. 결국 원래 의도했던 영화를 찍으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시간은 촉박했고 나는 졸업작품을 완성해야 했다.”
그렇게 미흡한 샌프란시스코 취재를 마치고 다음 취재를 위해 뉴욕으로 건너간 이규정은 “이 프로젝트가 실패할 거라는 생각이 조금씩 확신으로 다가왔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2달간의 뉴욕 체류기간 중 “샌프란시스코에서 겪은 내 혼란을 영화에 담아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그는 뉴욕에서 <사랑에…>의 스크립트를 써내려갔다. 그리고 완성된 시나리오를 들고 ‘샌프란시스코에 남기고 온 심장’을 찾아 다시 ‘그들의 땅’으로 날아갔다. 마크와 리처드는 이미 연인으로서의 관계는 끝난 상태지만 흔쾌히 이규정의 작업에 동의해주었고 2달 전에 발생했던 교통사고 같았던 사랑이야기를 스스로 재연하며 영화를 찍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된 27분짜리 단편영화 <사랑에 관한 진실>은 다큐멘터리와 드라마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큐멘터리 만들기의 윤리와 진실에 대해, 그리고 사랑에 대해 스스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리처드를 만난 건 내 생애 아시아 남자와의 첫 연애였다.” 경쾌하고 비트있는 음악 위로 그레그 박, 안젤라 레오니노, 나단 아돌프슨 같은 한국계 다큐멘터리 감독의 인터뷰 화면들이 이규정의 러브스토리와 함께 빠르게 교차편집된다. 이런 식이다. “멜리사, 지금 찍고 있는 거야? 내 엉덩이 클로즈업해서 찍을 거야? 하하하.”, “리처드, 한국여자를 만난 게 이번이 처음이야?”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 침대에 웃통을 벗고 누워서 껄껄대는 리처드의 웃음소리 다음으로 다큐감독 그레그 박의 실제 인터뷰가 오버랩된다. “다큐멘터리를 찍는 특권 중엔 이런 게 있죠. 감히 하기 어려운 개인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 허가를 얻는다고 할까….” 혹은 마크가 일본인이란 문제가 부각되는 지점에 이르면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한국 어머니를 둔 다큐멘터리 감독 안젤라 레오니노가 튀어나온다. “엄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죠. 안젤라, 일본놈들은 믿을 게 못 돼!” 마크가 실제로 출연했던 <레이저맨>(The laserman), <챈을 찾아라>(Chan is missing) 등의 영화 클립들도 종종 섞인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마크의 배우로서의 활약상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미국사회에 동화되어가는 아시아인들의 정체성을 다룬 영화로서 대만 출신의 피터 왕 감독의 작품은 <사랑에…>의 내용과 어떤 부분 맥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다보면 연출하기 꺼렸을 법한 용감한 장면도 종종 펼쳐진다. 리처드와 이규정이 (보이는 선 까지는)알몸으로 한 침대에 누워 있는 장면이 나오는가 하면, 한참 화가 난 듯 열변을 토하던 마크가 “카메라 좀 꺼줄래?”하고 주문한 뒤 화면이 암전되었다 밝아지면 마치 섹스를 끝낸 듯한 느낌을 주는 침대 위 투숏이 잡히는 식이다. “보통 영화 만들 때 감독은 왕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를 찍다보면 주제에 대한,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의 의문이 생겨난다. 특히 자기 자신을 찍을 땐 더 하다. 거기다 사랑이야기라니. 얼마나 보여줘야 하지? 내가 혹 노출증 환자로 보이진 않을까? 왜 이걸 만들지? 하는 질문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이런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심리적 갈등뿐 아니라 두 남자 사이에서의 방황은 쉽게 합일점을 찾지 못했다. 멜리사는 리처드와 마크를 오가며 데이트를 계속하고 마크는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한다. “뭐야! ‘남자쇼핑’이라도 하는 거야? 둘 가지고 장난치는 거야? 내가 재수없는 일본인이라서? 누구를 고르던지 네 맘대로 해!” 하지만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리처드보다는 마크와의 특별한 감정을 나누던 이규정에게 샌프란시스코를 떠나야 할 시간이 돌아온다. 마크를 떠나야 할 시간도 다가온 것이다.
이렇듯 만나고 갈등하고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멜로드라마의 무리없는 수순을 그대로 밟아나가던 이 영화는 ‘마크와 멜리사는 그 이후 얼마간 그들의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들은 7월4일 독립기념일, 이별했다. 마크는 추수감사절을 리처드와 그의 부모님과 함께 보냈다’라는 자막으로 끝이 난다. 해피엔딩의 법칙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결론으로 드라마는 종결되지만 다큐는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감독은 스크롤이 올라가는 중에 NG장면을 덧붙임으로써 이 모든 것이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만 연출된 상황이었음을 다시 한번 관객에게 확인시켜준다. 그리고 화면이 완전히 닫히기 전 마크가 마지막으로 카메라를 향해 묻는다. “이거 여전히 녹화되고 있는 거야?”
다큐는 지극히 주관적이다
“사람들은 다큐는 늘 객관적이며 온전히 사실이라고 믿는다. 이런 고정관념을 이용해 영화를 찍고 싶었다. 사실 다큐란 지극히 주관적인 작업이다. 만약 지금 인터뷰를 찍는다고 해도 누굴 어떻게 찍을지, 프레임을 뭘로 할지, 조명은 어떻게 할지를 끊임없이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 그렇게 누구의 관점, 어떤 요소를 택하느냐에 따라 다큐는 달라진다.” 자신이 몇퍼센트 호주인인지, 한국인인지 규정짓기를 싫어하는 이규정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취한다. “솔직히 이 영화를 어떻게 규정하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다큐일 수도 극영화일 수도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사람들이 다큐에 대한 편협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에 화가 난다. 다큐멘터리는 이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군가. 크리스 마르케 영화처럼 사람이 한번도 안 나오는 것도 있고 <베를린 심포니>처럼 음악이 주가되는 다큐도 있다. 그저 나는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드는’(making depressed) ‘메이킹필름’(making film)은 만들고 싶지 않을 뿐이다. 물론 아시아에서는 근대사가 가지는 굴곡 때문에 어렵고 무거운 다큐멘터리가 많이 나왔다. 그런 다큐멘터리가 가지는 자리는 분명히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내 관심을 끌진 못한다. 나는 슬픈 사건들에서조차 유머를 발견하곤 한다. 결국 자신이 품은 경험과 주제 안에서 영화는 나올 수밖에 없지 않은가.”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던 고된 작업을 끝내고 이제 그는 “더이상 나를, 내 가족을 담은 다큐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 속, 그 미지의 소우주는 이규정, 혹은 멜리사 규정 리라는 감독이 영화작업을 해나가기 위해 반드시 거쳤어야 했던 첫번째 정거장이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찾아 헤매야 할 궁극적인 종착역일는지도. 글 백은하 [email protected]·사진 이혜정 [email protected]
<사랑에 관한 진실> 전 혹은 후
희생자는 강인하다
<사랑에 관한 진실>이 오가와 신스께 상을 받을때, 이 영화는 혼자가 아니었다. 쉽게 말해 ‘패키지’로 함께 상을 받은 작품은 <소신: 꿈속에서>(Soshin: In Your Dreams)이다. “부모와 가족, 친구들의 꿈에 대한 ‘소신’에 대한 다큐멘터리”라는 <소신>은 이규정 감독의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 옆집에 사는 한명숙씨(가수)네 부부 등 가족과 이웃을 중심으로 호주 이민 1세대들의 삶을 경쾌하게 담아냈다. “이민에 관한 영화를 보면 대부분 희생당한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싫다. 많이 당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생존하고 있는 것은 강인함 때문이다. 그런 강인함을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사실 <소신>은 <사랑에…>보다 먼저 만들어져 국내 영화제의 문을 두드렸던 작품. 하지만 야마가타 영화제의 코디네이터인 후지오카 아사코는 이 두 작품을 개별의 영화가 아니라 “하나로 묶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고, 결국 그의 판단은 옳았다. 실로 <사랑에…>는 <소신>을 이해시키는 중요한 키워드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 <소신>은 <사랑…>과 함께 감독의 감성의 변화나 정체성의 확립의 과정을 보여주면서 거꾸로 읽혀졌다. 가족이라든지 이웃을 통해 간접적이고 은유적으로 표현되던 고민과 의문들이 <사랑…>에 이르러서는 자신으로 돌아가는 대담하고 실험적인 모습을 보이는 식으로 말이다.▶ 이규정, 김진아, 도발의 다큐 실험
▶ 카메라로 치유해가는 거식증의 기록 <김진아의 비디오일기>
▶ 스스로 재연한 사랑이야기, 이규정의 <사랑에 관한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