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마를렌 고리스 / 출연 빌레케 반 아메루이, 엘스 도터만스, 도라 반 더 그로엔, 비를레 반 오버로프 / 제작연도 1995년
20세기 말 한국 사회를 휩쓴 영화의 봄은 현실 사회주의 몰락과 함께 왔다. 소련이 몰락하자 사람들은 한때 꿈꾸었던 변혁의 길을 우회하기 시작했다. 화염병을 내려놓고, MBC FM <정은임의 영화음악실>을 듣고, 시네마테크에 가서 예술영화를 보고, 으뜸과 버금 체인에서 비디오를 빌렸다. 때마침 한국예술종합학교가 개교했고, 친구들은 영화를 배우기 위해 영상원이나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영화저널이라는 타블로이드가 등장하여 영화잡지의 감수성을 혁신했고, <씨네21>이 창간되어 갑자기 사라진 영화저널의 뒤를 이었다. 전문성을 표방한 영화잡지 <키노>(KINO)가 등장하여 ‘보그체’(패션산업계나 관련 잡지에서 관행적으로 쓰인 외래어 남용 문체)와 쌍벽을 이룰 만한 현학적인 영화평론 문체를 유행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부산국제영화제가 시작되었다.
이 흐름의 와중에 나는 유학을 떠났다. 논문자격시험을 끝내고 나니 학위논문을 쓰기 전에 한 차례 호흡을 가다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와 독립영화판에서 영화 만들기를 배웠고, 무겁던 삼각대와 조명장치를 등에 지고서 재개발이 채 끝나기 전 신림동과 옥수터널 일대를 쏘다니며 영화를 찍었다. 영화제작이 마무리될 즈음, 일간지 신춘문예에서 영화평론 부문을 신설한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왠지 해보면 혹시나 될 것 같아서, 반지하 비디오방에서 <안토니아스 라인>을 거듭 본 뒤, 빛의 속도로 글을 완성하였다. 완성과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유치한 필명을 고안해내는 데 성공한 나는 그 글을 해당 신문사에 투고했다. 당선될 리가 없다는 주변의 비웃음과 달리 그 글은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영화평론가로 살아가기 위해 귀국한 것은 아니었던 터라, 하늘에서 떨어진 상금이나 받고 일단 돌아가 학위논문을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상식에 참가해야 상금을 주겠다기에 신문사 강당에서 열린 시상식에까지 갔다. 그런데 그날 가득 찼던 인파를 뚫고, 제법 연로해 보이는 여자 한분이 빠른 속도로 내게 다가왔다. “난 다른 부문 심사위원이었지만, 내가 맡은 부문 글들보다 당신의 글이 제일 좋았어요”라고 그분은 말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박완서 선생을 처음 뵈었다.
사교성이 부족했던 나는, 시상식 이후 이어진 술자리에 나가지 않았고, 분에 넘치는 칭찬을 해주셨던 박완서 선생님도 찾아뵐 결기를 내지 못했다.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으므로 신문사에 개봉영화평을 기고할 수도 없었고, 계간지의 청탁에도 응할 수 없었다. 그때 그냥 서울에 계속 있었으면, 영화평론을 하면서 평소 흠모하던 여배우들을 만나볼 기회가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길은 결국 가지 않은 길로 남았다. <안토니아스 라인>은 지금 보아도 탁월한 영화이지만, 나는 정작 평론 부문에 당선된 그 글을 점점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가지 않은 길은 가지 않았기에 잊히지 않는 법. <안토니아스 라인>은 결국 ‘내 인생의 영화’로 남게 되었다.
김영민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동아시아 정치사상, 비교정치사상, 정치사를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