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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자막
2002-04-12

성일, 상수의 영화를 보고 회전문을 떠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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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는 것, 즉 사실은 사태들의 존립이다. 그러니까 이 산술법과 달리 영화 안에서 벌어진 사실들로 다시 말할 수도 있다. 우선 이 영화를 나누는 방법은 날짜로 계산하는 방법이 있다. 여기에는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이 영화의 홍보 카피는 ‘그의 본色과 그녀들의 본心이 함께하는 6박7일 트루(?) 로맨스’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5박6일의 여행이다. 더더구나 ‘그녀들과 함께하는’ 로맨스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여기서 다시 하루를 빼야 한다. 만일 6박7일이 맞으려면 선배 성우의 전화를 받고 집에 가는 길에 ‘트루 로맨스’가 한번 있어야 한다. 여기서 ‘그녀들’도 모호하긴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춘천에 가서 옷 벗는 술집에서 파트너와 ‘트루 로맨스’가 하나 더 있어야 이 셈이 맞기 때문이다(만일 술집 파트너들과 옷벗기 내기 한 것도 ‘트루 로맨스’라고 해도 5박6일이 맞다). 그러나 경수는 (추정하건대) 서울에서 선배 상우의 전화를 받고 그냥 집에 가서 잤으며, 춘천의 첫날밤에도 (‘트루 로맨스’ 없이) 그냥 잠을 잔 것 같다. 경수는 술집에 간 다음날 명숙을 만난다. 만일 경수가 명숙과 선영과 ‘함께하는 트루(?) 로맨스’라면 4박5일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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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에피소드를 나눈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커다란 원칙은 하루를 기준으로 해서 나눈 것 같다. 첫번째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모두 에피소드는 아침에 시작해서 하루가 끝나면 역시 마찬가지로 끝난다. 이것은 예외가 없다. 그 기준은 장소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꼭 밤이 되어야 에피소드가 끝나지는 않는다. 이것이 에피소드와 시간 사이에서 혼동을 일으키는 첫번째 이유이다. 네번째 에피소드는 호수에서 비 맞고 돌아오는 경수를 보여주면서 끝난다. 시간은 화면으로는 알 수 없다. 다만 점심을 먹고 난 다음이며, 아직 저녁을 먹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오후인 것 같다. 일곱번째 에피소드는 해장국 집에서 점심밥을 먹고 나온 다음 선영의 집에 가서 그녀를 데리고 나와 경주장에서 섹스를 하고 점을 보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그녀를 기다리면서 오후에 비를 맞으며 끝난다. 아마도 네번째 에피소드와 일곱번째 에피소드는 비슷한 시간에 끝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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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중간에 홍상수가 자막을 소개하는 방식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자막을 사용하는 것은 (영화사적으로는) 무성영화의 방법이지만 그것은 목소리를 대신 한 것이었으며, 그 이후 일반적으로 시간의 경과를 표시할 때 사용하였다. 그러나 고다르가 <비브르 사 비>에서 의도적으로 장을 12개로 나누어서 각 장에서 일어날 사건을 미리 가르쳐주는 브레히트적인 이화작용의 화법으로 다시 활용하였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자막은 그런 화법이 아니다. 우선 첫번째 자막은 빗속에서 택시를 타고 가면서 선배 성우로부터 전화 걸려온 것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두번째 자막은 다르다. 경수가 영화사에 가서 말다툼을 하다, 는 자막의 내용은 11개의 신 중에서 시작하자 2번째 신에서 끝나며, 3번째 신에서는 춘천에서 선배 상우를 만난다(춘천까지 가는 장면은 생략되어 있다). 그러니까 자막으로 말하자면 세번째 신 이후는 잉여이거나, 아니면 자막과 상관없는, 또는 자막 ‘이후’의 사건이다. 크게 이 에피소드는 두개의 시퀀스로 나누어져 있지만, 자막은 첫번째 시퀀스만 설명한다. 그러나 이렇게 분명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홍상수의 영화는 신의 구별은 분명한데, 시퀀스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또는 홍상수는 항상 정직하지는 않다. 그런데 그런 순간 홍상수는 메시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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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자막은 맥거핀이다(또는 의도적인 착각이다). 자막은 명숙이 경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다, 이지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네번째 에피소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첫번째 자막의 방식을 믿은 사람들은 여기서 혼란에 빠지거나 착시효과에 빠지게 될 것이다. 네번째 자막은 첫번째 자막처럼 고스란히 그 내용을 따른다. 그러나 세번째 자막의 내용이 실제로 대사에서 말하여지는 것은 네번째 에피소드가 시작하자마자이다. 그러니까 이 세번째 에피소드와 네번째 에피소드의 자막의 내용은 서로 디졸브되어 있다. 한 가지 더. 오직 이 자막만이 경수가 목적어이고, 상대방이 주어이다. 다른 모든 여섯개의 자막은 경수가, 라는 주어로 시작한다. 우리가 착각한 이유, 한 가지 더. 좀더 정확하게 명숙은 경수에게 사랑한다, 고 말한 적이 없다. 모텔에서 명숙은 “사랑하지 않죠?”라고 물어보았고, 호수에서 경수에게 휴대폰으로 “사랑한다고 말해봐요, 싫죠?”라고 묻는다. 경수는 “네”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경수는 선영에게 사랑한다고 코모도호텔과 모텔에서 두번이나 고백한다. 선영은 첫번째는 “나도요”라고 대답하지만, 두번째는 “진짜로요?”라고 반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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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번째 자막 경수가 기차 안에서 선영을 만나다, 라는 말은 좀 이상하다. 그 내용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들어가 있는 위치가 이상하다. 이 에피소드는 크게 두개로 이루어져 있다. 앞의 4개의 신은 경수가 명숙과 헤어지는 장면이며, 5번째 신은 기차를 타고 가는 장면이다. 그리고 6번째 신에서 선영을 만난다. 그러니까 이 자막은 5번째, 혹은 6번째 신 앞에 넣으면 된다. 두번째 에피소드와는 반대의 방법으로 넣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잉여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또는 우리에게 해석을 더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자막을 본 다음 시작하는 신에서 명숙을 만나는 것은 이미 경수가 명숙을 잊어버렸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자막만으로 읽자면 이미 영화는 명숙에서 선영으로 넘어간 다음이다. 하지만 명숙이 영화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녀가 남긴 문장은 일곱번째 에피소드의 선영의 문장 속에서 다시 등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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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른 자막들이 모두 영화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 또는 사실들을 기술하고 있는 반면 왜 일곱번째 자막 경수가 회전문의 뱀을 떠올리다, 만이 경수의 주관적인 마음의 상태를 표현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또는 홍상수에게 이 자막이 가장 중요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영어제목 때문이다(홍상수는 <오! 수정> 이후 한글 제목과 영어제목을 전혀 다르게 짓고 있다). <생활의 발견>의 영어제목은 ‘On the Occasion of Remembering the Turning Gate’이다. 직역하자면 ‘회전문을 기억할 즈음해서’이다. 그러니까 세번째 에피소드 14번째 신에서 선배 성우가 경수에게 소양호에서 배를 타고 가면서 설명한 청평사 회전문의 뱀 이야기를 우리는 일곱번째 에피소드 89번째 신인 선영의 집 앞에서 ‘기억해야만’ 한다. ▶ 성일, 상수의 영화를 보고 회전문을 떠올리다

▶ 제2장 자막

▶ 제3장 회전문

▶ 제4장 구조

▶ 제5장 착각

▶ 제6장 아버지

▶ 제7장 …그리고 침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