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싱>을 찍던 해인 85년도에 <어우동>을 찍으면서 나에게 의상철학 비슷한 게 생겼어. 영화의상은 시대를 앞서가야 한다는 것. 영화의상이란 모름지기 유행을 선도하고 만들어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가 영화에서 어떤 옷을 입고 무슨 액세서리를 하고 나왔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옷차림이 바뀌곤 하잖아. 그게 흥행한 영화라면 말할 나위가 없지. 근데 영화매체라는 게 만들어지는 시기와 유포되는 시기가 어느 정도 간격이 있거든. 그러니까 만들 당시엔 획기적이고 시대를 앞서도 만들고 나서 상영될 즈음이면 어느새 남들이 다 하는 한물간 패션이 되곤 했어.
그렇기 때문에 의상을 만들 때 더욱 신경을 써야 했지. 앞으로 어떤 패션이 주목을 받겠구나 하는 시대감과 더불어 그 이후의 이미지까지 만들어내는 창조력이 함께 필요한 작업이었어. <어우동>이 관객을 만나서는 ‘그저 그런 에로물’로 치부되기도 했지만, 극중 의상의 작은 변주들이 보여주는 신선한 개성을 알아주는 사람도 있었어.
어차피 영화는 하나의 그럴 듯한, 있음직한 거짓말이잖아. 따라서 의상도 정확히 사실에 근거하여 만들기도 해야겠지만, 감독의 상상력과 의상장이의 창조력이 만나 전혀 새로운 복장을 선보일 수 있는 거겠지. 고증이 필요하고, 또 고증을 받아야만 하는 영화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영화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그간의 작업을 통해 내 안에 자리잡기 시작했어. 실제로 사실을 중시하고 조금 더 본질에 가까운 것을 찾는, 예컨대 임권택 감독이나 이두용 감독, 배우 김승호씨 같은 경우에는 나와 작업하는 것을 기꺼워하고 좋아했지만, 그렇지 않은 감독들은 굳이 나와 같이 나이 많은 의상부와 일하려고 하지 않았거든. 대충 손바느질이나 익히고, 소품이나 만지다 온 젊은 사람들도 흉내는 낼 수 있었으니까. 까탈스런 잔소리나 의견 대립 없이 그저 감독이 하자는 대로 해주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기도 할 테고.
어쨌거나 내 안의 그런 신념과는 상관없이 상황은 자꾸 어려워져만 갔어. 지금 생각하면 희안하게도 그런 고된 시간들이 그런 신념을 더욱 부추긴 것 같기도 하지만. 87년 또 한번의 화재를 겪어 경황이 없으면서도 찍고 있던 <연산일기>를 소홀히할 수 없었어. 오랜 영화 지기인 임권택 감독이 의뢰한 작품이기도 하고, 유독 연산의 일생을 다룬 영화가 손에 자주 떨어져 ‘더 낫게 만들어야지’ 하는 조바심도 있었고. 뇌출혈로 병원 신세를 질 때 얻었던 빚을 채 갚지도 못했는데, 의상을 제대로 짓겠다고 또 빚을 냈어. 영화가 잘 되면 일거에 해소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겠지.
그런 바람 때문인지 영화가 개봉되고 많은 호평 속에 대종상 네개 부문을 휩쓰는 쾌거를 이뤘어. 그 영화 덕에 감독이든 배우든 다 한몫 단단히 잡았겠지만, 나는 여전히 예외였어. 영화를 시작하면서 받은 수표 한장을 제외하고 영화가 개봉된 뒤, 상을 받은 뒤 내게 온 몫은 단 한푼도 없었으니까. 조금도 청산되지 않은 빚을 고스란히 지고 한 동네에서 버티다 지쳐 다른 동네로 떠나는 ‘이사 전쟁’도 여전히 계속됐지. 그렇게 상황이 어려웠어도 현장을 떠날 수는 없었어. 이유는 한 가지야. 내가 바보라서 그래. 누구든 그런 상황이라면 다 떠났겠지만 내겐 천형처럼, 천직처럼 쉽게 저버릴 수 없는 자리였어.
그리고 89년 <애란>을 만났지. 내가 어떤 영화를 기억해내는 이유는 다른 게 아냐. 그저 아주 힘이 들었기 때문이야. <애란> 역시도 앞의 다른 영화들처럼 고생이 심했어. <깜보>라는 영화로 신선하다는 평을 받던 이황림 감독이 박영규, 임성민 등을 데리고 영화를 찍는데, 엑스트라 500여명이 강물로 뛰어드는 전쟁 신이 있었어. 벌써 여기까지 얘기했으면 말 다했지. 미사리 개울가에 500명을 죽 모아놓고 물로 뛰어들라고 하는데 나는 감독 옆에서 애만 바짝바짝 타는 거야. 굳이 그렇게까지 할 신도 아닌데, 감독은 그렇게 해야 좀 볼 만한 장관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겠지. 한 신을 마치고 엑스트라들이 물을 줄줄 흘리며 나오는 걸 한벌씩 벗겨서 물에 흔들어 씻어서 바위 위고 어디고 말리는데 장마통이라 당최 마르질 않아. 다음 신 찍을 때는 됐고, 옷은 덜 말랐고, 또 그렇게 애만 바짝바짝 태웠지. 아마 반은 더 썩었을 거야.
그땐 감독이 일부러 나를 이렇게 골탕먹이나 싶어 얼마나 야속했던지. 엑스트라들도 협조 안 하기는 매일반이야. 버선이나 고무신은 어디다 잃어버렸는지 맨발로 돌아다니기 일쑤고, 촬영이 끝나면 의당 의상을 벗어놔야 하는데 그냥 입고 가는 사람도 있고. 그러면 나 혼자 애가 달아 버선 한짝이라도 눈에 띄면 다 주어와 떨어진 곳은 꿰매놓고, 그렇게 짠순이에다 깍쟁이 노릇을 해야 제작비를 한푼이라도 줄일 수 있으니까.
구술 이해윤/ 1925년생ㆍ<단종애사> <마의 태자> <성춘향> <사의 찬미> <금홍아 금홍아> <서편제> <친구> 의상 제작 정리 심지현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