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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회 아카데미 영화상
2002-04-06

보수의 철옹성, 반쪽 문을 열다

“74년이나 걸렸다. 시간을 좀더 줘야 된다.” 울음을 삼키느라 목이 멘 할리 베리의 목소리에, 장내는 사뭇 숙연해지는 분위기였다. 미국 L.A. 현지시각 3월24일 저녁, 제74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던 할리우드&하이랜드 컴플렉스의 코닥시어터. 단골 행사장이던 슈라인 오디토리엄을 떠나 42년 만에 아카데미가 시작된 ‘할리우드’ 거리로 돌아와 마련한 새 거처에서,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고 있었다. 아카데미 사상 처음으로 흑인 여배우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이다. 사형수 남편을 잃고 백인 간수와 사랑에 빠지는 여성을 통해 흑백문제의 깊은 골을 들여다보는 <몬스터스 볼>로 트로피를 거머쥔 할리 베리.

“오, 마이 갓!”만 연발하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눈물만 흘리던 베리는, 역대 수상자 가운데 가장 긴 소감을 토해냈다. “도로시 댄드리지, 리나 혼, 다이앤 캐롤, 그리고 내 뒤의 제이다 핀켓, 안젤라 바셋, 비비카 폭스 같은 여성을 위한 순간이다. 이제는 이름 없고, 얼굴 없는 수많은 유색인 여배우들에게 기회가 오겠지. 오늘밤 그 여인들을 위한 문이 열렸다.” 원래 수상소감에 할당되는 시간이 1분 이내인 관례를 고려하면 5분을 넘긴 베리의 경우는 전무후무할 기록이지만, 74년 만에 새롭게 쓰인 역사를 형용하기엔 그것도 부족한 눈치였다.

베리의 눈물, 워싱턴의 미소

같은 부문 경쟁자였던 르네 젤위거, 니콜 키드먼의 눈까지 촉촉하게 적신 베리의 말처럼, 이번 오스카는 오랫동안 등한시했던 흑인 배우들에게 활짝 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유례없는 자리였다. 베리와 덴젤 워싱턴, 윌 스미스까지 동시에 3명의 흑인 배우가 주연상 후보에 오른 것은 73년 이후 두번째. 1939년 헤티 맥다니엘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유모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이래 오스카의 높은 문턱을 넘은 흑인 배우는 모두 6명에 불과하다. 그중에서도 주연상 수상자는, 1963년 <야생의 백합>으로 흑인 남자배우로서는 첫 오스카상을 따낸 시드니 포이티에가 유일했다. 흑인 배우들이 스크린에서 하인이나 짐꾼이길 요구받았던 50년대부터 사려깊은 지성을 연기에 실어온 포이티에는 마침 이번 74회 시상식의 공로상 수상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포이티에가 기립박수와 함께 덴젤 워싱턴으로부터 공로상을 전달받을 때만 해도, 흑인 오스카 수상자가 8명으로 늘어날지는 미지수였다. “나보다 앞서 어려운 시절을 살아간 모든 흑인 배우들을 기억하며 이 상을 받는다. 그들의 어깨에 기대 어디로 가야할지를 알 수 있었다”며 조셉 맨케비츠, 스탠리 크레이머 등 편견에 맞서길 두려워하지 않았던 감독들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은 포이티에의 말에서 지나온 싸움을 기억해냈을 뿐이다.

하지만 베리가 포문을 연 오스카의 하이라이트는, 또 하나의 흑인 배우 덴젤 워싱턴의 수상으로 이어지면서 각종 매체에 “역사를 만든” 순간으로 기록됐다. 89년 <영광의 나날>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워싱턴은 <말콤 X> <허리케인 카터> 등에서 놓쳤던 주연상을, 부패한 형사로 능청맞은 변신을 꾀한 <트레이닝 데이>로 차지했다.“40년간 시드니를 뒤쫓아왔는데, 드디어 오스카가 상을 주는군. 그것도 시드니와 같은 날 밤에. 시드니, 난 항상 당신을 쫓아갈 겁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믿음직스런 특유의 미소와 함께 차분한 헌사를 바치는 후배와, 퇴장한 그의 어깨를 감싸며 함께 기뻐하는 선배의 모습을, 유니버설 픽처스의 대표 스테이시 스나이더는 올해 오스카의 명장면으로 꼽기도 했다. 여느 때보다 흑인 후보들이 많아 시상식 전부터 인종문제가 부각되면서 정치적인 배려가 작용하지 않겠냐는 시각도 있었지만, 워싱턴이나 베리나 연기 자체로도 상을 탈 만하다는 데는 별 이견이 없었다. 올해 네번째로 사회를 맡은 우피 골드버그가 역대 조연상 수상자인 것까지, 과연 <타임>의 기사 제목대로 “블랙 히스토리 나이트”라 할 만한 밤이었다.

아카데미가 사랑한 <뷰티풀 마인드>

남녀주연상의 극적인 드라마에 좀 가려지긴 했지만, 올해 오스카의 또 다른 주인공은 감독상과 작품상을 독식한 <뷰티풀 마인드>다. 7개 부문 후보에 오른 <뷰티풀 마인드>는 시상식의 첫 순서로 제니퍼 코넬리가 거의 모든 매체에서 예견된 여우조연상을 받은 뒤 두번째 트로피를 받기까지 3시간여를 기다려야 했지만, 각색상, 감독상, 작품상을 차례로 접수하면서 마지막 승자가 됐다. <아폴로 13> 때 받지 못한 감독상을 수상한 론 하워드는, 로버트 레드퍼드, 케빈 코스트너, 멜 깁슨 등 오스카를 수상한 배우 출신 감독 대열에 들어섰다. <뷰티풀 마인드>는 존 내시의 생애에서 부정적인 부분을 빼며 사실을 왜곡했다는 비방 캠페인에 시달렸으나, 수상에는 별 타격을 입지 않은 듯. 다만 성인용 농담과 풍자로 시상식의 감초 역할을 한 우피 골드버그는, “올해는 얼마나 흙칠(비방)을 해대는지 모든 후보들이 시꺼메보인다”며 갈수록 후안무치해지는 오스카 캠페인 행태에 일침을 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레드 카펫을 지나 코닥시어터로 입장할 때 어떤 상을 가장 원하냐는 물음에 “작품상”이라던 하워드의 바람은 이뤄졌지만, “감독상은 몰라도 작품상과 각종 기술부문 등 5개의 오스카를 지켜보겠다”던 피터 잭슨의 기대는 빗나갔다. 13개 부문의 최다 후보지명을 받은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는 실제 작품상과 감독상 중 하나는 탈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으나, 분장상, 촬영상, 시각효과상, 음악상에서 4개의 오스카를 모아 눈과 귀를 감탄케 한 스펙터클 판타지로서의 체면을 차리는 데 그쳤다. 이언 매켈런의 수상이 유력시됐던 남우조연상도, <아이리스>에서 천재 작가인 아내의 빛과 그림자를 고스란히 지켜보는 짐 브로드벤트에게 돌아갔다. <뷰티풀 마인드>와 오스카 수는 같지만, 주요 부문을 모두 놓친 맥 빠진 수확이었다. 아카데미의 선택이 요정과 호빗들의 신화적인 서사의 1부보다, 자기세계에 갇힌 천재의 분열적인 삶과 사랑의 실화를 견실히 담은 전기영화란 것이 놀라운 사실은 아니었지만.

이미 몇 차례 아카데미의 외면을 받았던 로버트 앨트먼과 데이비드 린치가 감독상 후보에만 그친 것 역시 예상된 탈락이었다. <빌리지 보이스>의 평론가 짐 호버만은, “론 하워드 같은 인재가 한 자리에 있는데 어찌 그들이 감독상에 호명되겠는가”라고 시니컬한 촌평을 남기기도. 영국 상류사회에 대한 정밀한 앙상블 드라마인 앨트먼의 <고스포드 파크>는, 그나마 오리지널 각본상을 수상해 빈손을 면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감독상과는 후보의 연뿐이었던 리들리 스콧의 전쟁영화 <블랙 호크 다운>은 편집상과 음향상을 차지했다.

상복이 없었던 것은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비롯한 8개 부문 후보에 올랐던 <물랑루즈>도 마찬가지. 할리우드 고전장르인 뮤지컬을 부활시킨 화려한 쇼와 음악, 동화 같은 사랑의 마술 같은 이미지는, 의상과 미술을 담당한 캐서린 마틴과 동료들에게 2개의 오스카를 몰아줬을 뿐이다. 바즈 루어먼의 아내이기도 한 캐서린 마틴은, “이 오스카는 당신의 것”이라며 감독상 후보에는 오르지도 못한 남편에게 경애를 표했다. 각각 <반지의 제왕>과 <물랑 루즈>에 참여한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 스탭들을 필두로 영국, 이탈리아 등 외국영화인들의 후보지명 및 수상이 늘어난 것은, 해외 로케이션이 많아진 할리우드 영화의 현 주소와 함께 오스카 역시 자국 영화인 위주의 문턱을 낮춰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영화`의 의미 짚은 한편의 쇼

“이 쇼는 아주 길어질 것 같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설명하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은 아니더라도.” <물랑 루즈>의 니콜 키드먼처럼 천정에서 그네를 타고 등장한 우피 골드버그의 농담 섞인 예측대로, 올해의 오스카는 4시간21분 동안 계속된 가장 긴 쇼였다. 9·11 사태를 언급하며 “과연 (지금) 영화가 가져다주는 환희와 마술을 찬미해야 할까? 그 어느 때보다 더. 사소한 장면, 제스처, 캐릭터들이 주고받는 시선이라도 어떤 경계선을, 장벽을 넘어서고, 편견을 녹여내거나 우리를 웃게 만들 수 있다”고 한 톰 크루즈의 오프닝 멘트는, 올해 오스카의 분위기를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9·11의 사회적 파장과 추모의 뜻을 강조하면서도, 세계의 관객이 지켜보는 최대의 쇼이자 영화의 자축연임을 잊지 않는 것. 그래서 다큐멘터리 감독 에롤 모리스의 오프닝 클립 역시, 새삼 ‘영화란 무엇인가’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천차만별의 답변자들에게서 영화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때로는 그저 ‘셜리 템플’처럼 단순하고, 때로는 꿈 혹은 삶과 닮은 영화.

오프닝 클립은 물론 다큐멘터리상 60주년 기념 편집 필름, 노라 애프런이 편집한 뉴욕에 대한 영화들 등 수많은 트리뷰트 필름과 더불어, 볼거리만큼이나 행사의 러닝타임이 늘어난 것도 일견 당연하다. 후보에만 20번, 그중 2번은 수상까지 했지만 오스카에 참여한 적 없는 우디 앨런이 오로지 영화의 도시 뉴욕, 뉴욕에 대한 영화들에 헌사를 바치기 위해 기꺼이 턱시도를 입고 나타난 것은 유쾌한 깜짝쇼. 스팅, 폴 매카트니, 엔야 등과 함께 주제가상 후보 공연을 장식한 랜디 뉴먼이, 로 16번째 후보지명 끝에 오스카를 받은 것도, 그 자체로 하나의 이벤트가 됐다. 공로상은 아니지만 영화음악가로서 그의 오랜 공로를 치하하는 즉흥적인 기립박수가 터져나오자, 뉴먼은 “동정은 원치 않는다”며 웃음으로 받아치기도. 신설된 장편애니메이션상은 일찌감치 예견된 대로 드림웍스의 <슈렉>에게 돌아갔지만, 뉴먼의 수상으로 <몬스터 주식회사>도 한개의 트로피는 챙겼다.

그 밖에 <아멜리에>가 보스니아영화 <노맨스 랜드>에 외국어영화상을 빼앗긴 것, 비평가상과 독립영화상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던 <인 더 베드룸>이 5개 부문 후보에만 그친 것 등이 이번 오스카의 작은 이변들. 두 흑인의 주연상 수상으로 할리우드의 영화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밤이 지나고, 74번째 쇼도 끝났다. 가장 많은 관객과 교신하는 할리우드의 판타지가 존재하는 한, 매년 그 판타지로 채워지는 오스카도 다음 쇼를 예비하고 있겠지만.

제74회 아카데미 수상작 및 수상자 명단

작품상 브라이언 그레이저, 론 하워드 <뷰티풀 마인드>

감독상 론 하워드 <뷰티풀 마인드>

여우주연상 할리 베리 <몬스터스 볼>

남우주연상 덴젤 워싱턴 <트레이닝 데이>

여우조연상 제니퍼 코넬리 <뷰티풀 마인드>

남우조연상 짐 브로드벤트 <아이리스>

오리지널 각본상 줄리언 펠로즈 <고스포드 파크>

각색상 아키바 골즈먼 <뷰티풀 마인드>

촬영상 앤드루 레스니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

시각효과상 짐 라이질, 랜달 윌리엄스 쿡, 리처드 테일러, 마크 스텟슨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

편집상 피에트로 스칼리아 <블랙 호크 다운>

음향상 마이크 밍클러, 마이런 넷팅거, 크리스 먼로 <블랙 호크 다운>

음향편집상 조지 워터스 II, 크리스토퍼 보이즈 <진주만>

미술상 캐서린 마틴, 브리지트 브로치 <물랑루즈>

의상상 캐서린 마틴, 앵거스 스트라디 <물랑루즈>

분장상 피터 오언, 리처드 테일러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

외국어영화상 <노 맨스 랜드>

단편영화상 <회계사> 레이 매키넌, 리사 블런트

단편애니메이션상 <포 더 버즈> 랠프 이글스턴

장편다큐멘터리상 <일요일 아침의 살인> 장 자비에르 드 레스트라드, 데니스 퐁세

단편다큐멘터리상 <도드> 사라 케노천, 린 애펠

오리지널 스코어상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 하워드 쇼어

주제가상 랜디 뉴먼

황혜림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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