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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작가 노르마 바르즈만 인터뷰
2002-04-06

`나는 공산주의자인 게 자랑스러웠다`

1920년 뉴욕의 유대가정에서 태어나 하버드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노르마 바르즈만 여사는 시나리오 작가였던 남편 벤 바르즈만과 함께 할리우드의 블랙리스트 소용돌이를 몸소 겪은 이제 몇 남지 않은 역사의 증인이다. 81살의 할머니는 조금도 피곤함을 내보이지 않은 채 파란만장했던 경험을 마치 엊그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이 이야기는 올 봄에 출간될 자신의 회고록에도 실릴 거라는 정보와 함께.

할리우드에는 언제 들어갔는가.

1941년 대학을 졸업한 뒤 시나리오 수업을 받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할리우드는 시나리오 작가로 유명했던 조카 헨리 미어스를 통해 가까워졌다. 공산당원이었던 조카는 할리우드의 노조를 설립한 사람중의 하나였다. 어느 날 그를 따라 할리우드 어딘가에서 상영하는 소련 영화를 보러 갔었는데 거기엔 350명에 가까운 할리우드의 진보주의자들이 다 와 있었다. 사실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컬럼비아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는 언니 때문에 공산주의에 대해선 많이 알고 있었다. 언니는 나중에 미국에서 최초로 전국 노조의 변호사가 됐다. 언니를 통해 대학에서 일어나는 공산주의와 트로츠키의 학생모임에 대해서 자세히 알았고 그에 대한 책도 많이 읽었다. 40년대 초에 할리우드의 진보단체는 히틀러와 프랑코의 파시즘을 피해 미국에 온 정치망명객에게 삶터를 마련해주고 전쟁고아들을 치료해주는 등 연대활동을 많이 했다. 그러다 나는 1943년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던 벤 바르즈만(1911~1989)과 결혼했고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된 걸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

당시 미국의 공산주의자는 얼마나 많았는가.

내 기억으로는 약 4만3천 정도였는데 인구가 1500만 정도였으니까 많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이들은 국내외의 인종주의와 파시즘에 맞서 싸웠다고 생각한다.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던 포드 자동차 사장 헨리 포드는 히틀러를 밀어준 파시즘의 추종자였다.

시나리오 작가가 되려던 꿈은 어찌됐는가.

결혼 뒤 1944년부터 1년간 <로스앤젤레스 이그재미너> 잡지의 견습기자로 일했다. 상당히 보수적인 잡지였는데 편집장은 내가 공산당 회원이라는 걸 알고는 해고시키겠다고 하면서도 좋은 기자라고 하면서 계속 일을 맡겼다. 주로 2차대전에 참전한 병사들의 부인에 대한 기사를 썼는데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첫 시나리오 <네버 세이 세이 굿바이>를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썼다. 무명작가의 글이었지만 남편의 도움으로 쉽게 제작자의 손에 들어갔다. 그러나 제작자가 주연배우 에롤 플린의 스타일에 맞춰 코미디로 뜯어고치는 바람에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른 영화가 돼버렸다. 그뒤 남편의 권고에 따라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1947년 존 브람이 연출한 누아르 영화 <더 로키트>의 시나리오를 남편과 같이 썼고 평단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럼에도 RKO 사장 하워드 휴즈는 크레디트에 우리 이름을 세리던 기브니로 대치했다. 휴즈는 우리 이름이 이미 블랙리스트 명단에 오른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1948년 조셉 로지가 연출한 <파란머리의 소년>의 시나리오 작가는 벤 바르즈만으로 알려져 있다.

이 영화를 제작한 애드리언 스코트는 우리와 아주 친한 사이였다. 스코트 부부는 전쟁 고아를 양아들로 기르고 있었는데 어느 신문에서 한 꼬마가 자고 났더니 머리가 파래졌다는 기사를 읽고는 양아들의 전쟁 경험과 파란머리 소년의 이야기를 한데 묶어 반전 영화를 하나 만들 생각으로 남편에게 시나리오를 부탁해왔다. 마침 그 무렵 우리는 조셉 로지 감독이 브레히트의 원작을 바탕으로 연출한 연극 <갈릴레오>를 보고 그의 뛰어난 연출력에 끌려 있던 때라서 스코트에게 그를 감독으로 추천했다. 로지 감독에겐 첫 장편영화였기 때문에 남편은 촬영 내내 세트에서 살다시피 했다. 뮤지컬과 판타지를 섞은 우화적 스타일의 영화였는데 뮤지컬을 연출한 경험이 있던 남편은 로지 감독에게 큰 도움이 됐었다. 아무튼 로지 감독은 스튜디오의 사장 톰 쉐리와 일부 스타들로부터 최근에 본 영화 가운데 수작이라는 칭찬을 받았고 유럽에서도 평이 아주 좋았다. 그럼에도 배급자인 하워드 휴즈는 냉전을 의식하여 몇달 동안이나 극장상영을 미루다 나중에 재정난 때문에 극장상영을 했다.

제작자인 애드리언 스코트는 유명한 블랙리스트 10인의 하나였다.

영문학과 사학을 전공한 스코트는 공산당 회원이었다. 처음엔 시나리오와 영화평론을 쓰다가 40년대 제작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가 1947년에 제작한 <크로스파이어>는 미국의 인종주의를 파헤친 뛰어난 명작으로 오스카상 후보에까지 올랐으나 블랙리스트 10인이 되면서 감옥에 갇혔고 감옥에서 나온 뒤 명예회복을 위해 스튜디오와 10년간 법정 싸움을 했지만 그의 희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할 수 없이 가명으로 TV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생활비를 벌었고 60년대 런던의 MGM 지사에서 익명으로 일하다가 할리우드에 다시 돌아오지만 TV부문에서만 일할 수 있었다.

→헐리우드 블랙리스트, 반세기의 상처

→매카시즘 시대의 영화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