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허우샤오시엔, 이창동 감독(왼쪽부터).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의 ‘특급’ 게스트는 바로 이들이었다. 이창동, 허우샤오시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10월10일 오후 5시 부산국제영화제 아주담담 라운지에 함께 등장했다. 공식 석상에 자주 나오지 않거니와 함께 만나기가 쉽지 않은 이들 세 감독이 영화의 전당에 모인 이유는 지난 2년 동안 부산국제영화제가 겪었던 각종 논란으로 말미암아 국경을 넘어선 영화인들의 연대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국•대만•일본에서 젊은 영화인들을 양성하는 데 힘쓰고 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영화의 위상을 드높이는 이 거장 감독들이야말로 ‘연대’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주인공들이었다. 영화평론가 허문영의 사회로 진행된 세 감독의 특별대담을 전한다.
-세분의 근황을 묻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이창동_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 모든 게 잘 진행되면 아마 11월쯤 촬영에 들어갈 것 같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 지금 말하기는 좀 어렵고, 굳이 말하자면 미스터리한 이야기라고 할까. 요즘 젊은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젊은이들이 지금의 현대사회를 바라보면 이 세상이나 자신의 삶이 마치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부터 만들게 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어쨌거나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웃음)
=허우샤오시엔_ <자객 섭은낭>(2015) 같은 작품을 당분간 만들기는 힘들 것 같다. 준비해야 할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아마 현대사회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전에 <남국재견>(1996)이라는 작품을 만들 때도 그랬다. <호남호녀>(1995)를 끝낸 뒤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21일간의 촬영으로 <남국재견>을 만들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이처럼 짧은 호흡으로 촬영할 수 있는 현대물을 만들 것 같다.
=고레에다 히로카즈_ 그동안 가족 드라마 장르의 영화를 계속해서 만들어왔는데 인터뷰를 할 때마다 왜 계속 가족 이야기만 하냐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웃음) 이창동 감독님이 미스터리 장르의 신작을 준비한다고 하시기에 나도 얘기하자면 서스펜스가 가미된 법정영화를 생각하고 있다. 살인사건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이야기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국적을 넘어 다양한 곳에 있다는 건 영화의 풍요로움, 영화의 힘이라는 점을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실감하고 있다.”
지난 21년, 부산이 이끌어낸 아시아영화인들의 연대
-오늘 대담의 주제는 ‘아시아영화의 연대를 말하다’이다. 영화인으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아시아영화인들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다면.
이창동_ 갑자기 분위기가 급속하게 딱딱해지는 것 같다. (웃음) 나는 이 자리에 우리 세 사람이 모인 것 자체가 아시아 영화인들, 또는 세계 영화인들이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연대라는 걸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아주 오래전부터 서로의 영화를 보면서 좋아하고, 지지하고, 응원하고, 이런 것들이 이미 연대라고 생각한다. 연대한다는 느낌을 구체적으로 받은 순간을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이를테면 아주 오래전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 갔을 때 한 중국집에서 식사를 마친 뒤 식당 밖에서 허우샤오시엔 감독님이 내 담배를 빌려서 피운 적이 있었다. 우리는 이미 그때부터 담배로 굳게 연대했다. (웃음) 이처럼 서로간에 오가는 믿음이랄까. 이런 게 연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허우샤오시엔_ 아무래도 감독이 되는 데 가장 필요한 건 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본을 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서 아시아 영화인들끼리 단결하고 연대한다 해도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나도 예전에 상업영화를 만들 때는 돈을 많이 벌었다. 하지만 내가 찍고 싶은 영화는 돈이 안 되는 작품이었고, <자객 섭은낭>도 제작비의 절반은 유럽에 판권을 선판매해서 조달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방법 중 하나는, 감독들이 단결해서 상업영화로 돈을 벌었을 때 그 돈을 부산국제영화제의 기금으로 넣어 나중에 정말로 찍고 싶은 영화가 있을 때 이용하는 거다. 어려운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투자자만 설득할 수 있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중국이 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화시장이다. 한국과 일본도 마찬가지로 거대한 영화시장을 형성하고 있고,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대만 시장이 인구도 적고 영화 기술도 가장 떨어지는 편인데, 이런 지역의 관객이 서로 단결해서 아시아 다른 지역의 영화를 사랑해준다면 그것 또한 아시아영화의 연대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허풍이 심한 게 아니냐고 비웃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무엇이든 큰 범주에서 생각할 때 좀더 많은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_ 나 역시 연대라는 말이 어렵고 딱딱해서 평소에 잘 쓰지 않는다. 개인적인 얘기를 말하자면 허우샤오시엔 감독님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과 같은 영화감독이 되지 못했을 거다. 이창동 감독님의 영화를 볼 때마다 인간을 대하는 진지함, 인간의 좋은 부분이든 나쁜 부분이든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는 시선이나 자세에 많은 자극을 받는다. 동시대에 이런 영화를 만드는 감독님들이 계시다는 것, 일본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영화를 만드는 감독님들과 교감할 수 있다는 건 굉장한 행복이자 내가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큰 원동력이 된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국적을 넘어 다양한 곳에 있다는 건 영화의 풍요로움, 영화의 힘이라는 점을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실감하고 있다. 멋진 영화제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영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연대할 수 있는 장소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직면한 상황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이 영화제를 지키기 위한 아시아 영화인들의 연대야말로 지난 21년 동안 부산국제영화제가 쌓아온 성과라고 생각한다.
허우샤오시엔 “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대만 시장이 인구도 적고 영화 기술도 가장 떨어지는 편이다. 이런 지역의 관객이 서로 단결해서 아시아 다른 지역의 영화를 사랑해준다면 그것 또한 아시아영화의 연대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연대를 통한 확장을 꿈꾼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가장 나이가 적기 때문에 특권을 하나 드리겠다. 평소에 이창동, 허우샤오시엔 감독을 존경한다고 말해왔는데 두분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 있나? 국경을 넘은 질문도 하나의 연대라고 생각한다.
허우샤오시엔_ 늙은이에게 물어볼 게 뭐가 있겠나. (좌중 웃음)
고레에다 히로카즈_ 두분에게 묻고 싶다. 나는 허우샤오시엔 감독님을 영화감독이 되기 전에 뵀다. 그때부터 감독님은 대만의 젊은 영화인과 스탭을 육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고 나도 감독님처럼 젊은 영화인들에게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창동 감독님도 대학에서 영화를 가르치고 제자들이 만드는 영화의 제작을 돕는 걸로 알고 있다. 이처럼 젊은 영화인들과 함께 일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 혹은 이것만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고수하는 원칙이 있는지 궁금하다.
허우샤오시엔_ 최근 대만의 한 방송국과 함께 추진하는 프로젝트가 있다. 1500만달러를 투자해 젊은 영화감독 다섯명의 영화를 만드는 것이고 내가 총괄 프로듀서를 맡았다. 젊은 감독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자금이 부족하더라도 작품을 계속해서 만들라는 것이다. 첫 작품부터 잘 만드는 감독이 얼마나 되겠나. 이 프로젝트는 젊은 감독들이 제작비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될 거라 생각하고, 이 기획이 성공적으로 대만에서 진행된다면 아시아의 많은 지역으로 확대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돈을 버는 것보다 젊은 영화인들이 나아갈 길을 찾아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창동_ 한국은 대만, 일본과 사정이 좀 다르다. 한국은 영화산업이 상당히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다. 주류 상업영화는 관객에게 꽤 많은 사랑을 받고 있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도 경쟁한다. 그런데 이런 특성 때문에 보다 모험적이고 새로운 스타일의 한국영화가 나오기 힘든, 역설적인 상황에 직면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몇몇 젊은 감독들의 영화를 제작하고 그들의 영화가 만들어지도록 작은 도움을 줬다. 영화산업구조의 밖에 있는, 자기만의 방식과 목소리로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젊은 영화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기회를 주어야만 주류 영화계에 신선한 피가 공급되면서 영화산업이 결과적으로 풍성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젊은 영화인들에게 꼭 어떤 걸 피해야 한다고 얘기하지는 않지만, 나는 그들이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화 일의 속성 자체가 작은 성공에도 자기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하기 쉽고, 실패해도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속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고 정직함을 가지고 영화를 하는 데에는 정말로 용기가 필요하다.
-일본영화계는 대만이나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화인들의 커뮤니티가 약한 걸로 알고 있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궁금하고, 커뮤니티의 장단점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묻고 싶다.
고레에다 히로카즈_ 내가 일본영화계의 중심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영화계에 대해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웃음) 그래도 한국에 오면 느끼는 게,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평론가건 제작자건 감독이건 30, 40대가 중심이 되어 젊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반면 일본은 왕성하게 활동하는 영화인들의 연령층이 굉장히 높다. 그게 나쁜 일은 아니지만 연령층의 폭이 넓다보니 연대에 있어서는 어려운 점이 있는 것 같다. 회사로 예를 들면 20대부터 70대까지 구성원의 연령대가 다양한 회사라면 밥을 같이 먹기에도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야마다 요지 감독님은 한달에 한번씩 젊은 영화인들을 불러 식사모임을 열기도 한다. 그런 노력도 중요하다 생각하지만 나는 굳이 일본 내의 관계에 천착하지 말고 국경을 넘어 폭넓은 연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창동 “ 영화산업구조의 밖에 있는, 자기만의 방식과 목소리로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젊은 영화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기회를 주어야만 주류 영화계에 신선한 피가 공급되면서 영화산업이 결과적으로 풍성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영화인들의 자존심이 필요한 시기
-부산국제영화제가 지난 2년간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어왔다. 아직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말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이에 대해 말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이창동_ 나는 부산국제영화제 스탭들과 영화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이럴 때일수록 자존심을 지켰으면 좋겠다. 이런 일을 당하면 가장 먼저 상처입는 게 자존심이다. 지금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이 불명예스럽게 퇴진한 데다 심지어 형사적인 책임까지 지게 됐다. 20여년 전부터 몸과 마음을 다해 영화제를 키웠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명에게 훈장은 못 줄지언정 이런 식의 상처를 입히고 자존심에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힌다는 것 자체가 당사자뿐만 아니라 함께 일해왔던 사람들의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히는 거다. 이 상처 때문에 서로를 원망하고 자탄하게 되는데 이럴 때일수록 영화인들이 자존심을 지켰으면 한다.
허우샤오시엔_ 부산국제영화제는 국제적 위상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영화제를 잃는다는 건 영화계에 굉장한 손실이 될 거다. 이렇게 보물 같은 영화제를 잃지 않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_ 영화감독으로 영화를 만들면서 종종 위기에 직면한다. 그럴 때마다 감독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건 본인도 아니고 배우도 아니고 작품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다. 마찬가지로 부산국제영화제가 위기에 직면한 지금이야말로 영화제를 위해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