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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판 머피의 법칙
2002-03-27

비디오카페

그 기막힌 타이밍은 거의 예외가 없다. 영화 속 인물들이 신체적 접촉을 하려고만 하면 엄마가 나타난다. 전화벨 소리도 못 들을 정도로 깊은 낮잠은 꼭 감질나는 키스신이 시작되기 직전에 끝이 난다. 영원히 안방에만 머물 것 같던 진공청소기도 베드신이 시작되기 3초 전에 내가 있는 거실로 이동한다. 그걸 피해 안방으로 옮겨서 문을 닫고 비디오를 보고 있자면, 왜 생전 안 주던 과일은 꼭 잔혹한 강간의 순간에 문을 벌컥 열며 배달되는 건지. 게다가 한번 시작된 그 장면들은 내가 나서서 컷을 외치고 싶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그만, 컷컷컷! 한순간에 영화의 등급은 엄마의 주관하에 재평가되며 나는 졸지에 ‘문닫고 이상한 영화나 보고 있는 애’가 되어버리는 거다. 물론 엄마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내가 자발적으로 찔려하면서 비굴, 소심해지는 이유는 나도 알 수 없다.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가 펼쳐질 듯하면 나는 소리를 줄이고 엄마의 행동반경과 그곳에서의 정체시간을 계산한다. 긴장해서 숨을 죽이고 제발 이 순간이 어서 지나가기를 바라거나, 불안의 정도가 심할 경우 비디오를 끄고 텔레비전을 보는 척한다. 이것 참, 17살짜리가 포르노를 보는것도 아니고 말이다. 빨리감기 등의 트릭은 더구나 타이밍 계산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그 장면들’을 빨리감기하고 있을 그 순간에 엄마가 들어오면 바로 ‘이상한 장면을 반복해서 돌려보는 애’로 전락하는 거다. 가만히만 있어도 괜찮을 뻔했는데 억울하게도 말이다! 이런 점에서는 극장이 좋다. 팝콘까지 씹어가며 어둠 속에서 모두들 당당하지 않은가. 손원평/ 자유기고가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