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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과 원칙
2002-03-20

조종국 / 조우필름 대표 [email protected]

최근, 두 가지 뉴스에 낯이 화끈거렸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던 김근태 고문이 제주와 울산에서 겨우 26표를 얻었다는 끔찍한 뉴스와 스포츠신문 기자들과 영화 관계자들이 홍보성 기사를 매개로 돈을 주고받은 사실이 드러나 검찰이 조사를 하고 있다는 아주 곤혹스러운 뉴스였다.

먼저, 끔찍한 일. 엄연한 현실정치의 벽을 골백번 인정하고, 적법하지 않은 정치자금을 받은 적이 있다고 고백한 것이 치명적인 전략적 오류라거나 특정 개혁성향 후보에 대한 표 쏠림 현상이라는 등의 분석을 액면 그대로 수긍하더라도 김근태가 받은 26표는 상식(누구에게도 강요할 생각이 없는 순전히 내 상식이지만) 밖이다. 제주와 울산을 합쳐 총투표자 수 1692명 중에서 26표를 얻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이성적으로 접수가 안 되는 일이다.

물론 김근태의 지지율이 바닥을 헤맨 까닭이 그리 단순한 것만은 아니겠지만, 돈정치, 부패정치에 대한 경종을 울리겠다는 그 고백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면 그 대가치곤 너무 가혹하다. 온갖 방법으로 수십억, 수백억원씩 해먹는 판에 ‘겨우’ 2천만원 받았다고 이런 치도곤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이 부패지수가 세계 상위 몇위에 들 법한 한국사회의 통념으로 따져본다면 어불성설이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온 김근태가 호의호식하다가 야당이 하루아침에 여당으로 변신하는 야합에도 거리낌없이 따라갔던 사람이라고 해도 26표는 너무 적다. 설사 한나라당의 정형근, 김용갑이나 김문수, 이재오 같은 사람이 그런 고백을 했다고 해도 26표밖에 못 받는다면 그리 균형잡힌 사회라고 보기는 어렵다. 김근태와 이근안을 헷갈려 하는 (극소수)대학생들에게조차도 역사적 존재감을 인정받는 김근태에게 가한 구태정치의 테러라면 지나친 비유일까(김근태 광신도의 아전인수로 폄하하지 마시길. 사실 나는 김근태의 존재감을 버거워 하는 노무현 지지자다).

홍보성 기사를 써주는 대가로 돈을 받았다는 스포츠신문 기자들이 검찰 조사를 받고, 일부 제작사, 배급사 관계자들도 불려갔다는 뉴스는 등골이 오싹했다. 자칫 영화계 전체가 비리의 온상인 양 매도당하거나, 물오른 한국영화계 전반에 찬물을 끼얹는 악재로 비화될지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곤혹스러운 것은, 속으로는 발본색원해야 한다고 검찰을 응원하면서도 관행이 어땠다는 둥 그놈의 현실론이 스멀스멀 기어올랐기 때문이다. 내 속에 도사린 양면성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건이 터지자 곧바로 전해오는 양극의 반응을 접하고는 아노미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기자에게 돈을 건네며 들었던 모멸감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만시지탄’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한국영화를 이끄는 숨은 일꾼이며 한식구인 기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은 미풍양속”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행히 영화계에서는 대다수가 자정을 결의하고, 구태를 청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두고 볼 일이지만 연루된 영화인들에게서도 자성하고 근신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확인할 수 있어 안도했다. 기생하고 있는 검은 커넥션을 관행이라는 연막으로 가려보겠다는 미봉책은 용도폐기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호의적인 기사를 대가로 금품을 주고받는 것은 범법여부를 떠나 얼마나 ‘쪽팔리는 일’인가.

김근태의 결단이 빛나는 까닭은 26표라는 혹독한 시련에 정면으로 맞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