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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연출부 박은영
2002-03-20

첫영화, 심심하고 사적인 여행처럼

10mm의 강우량에도 못 미치는 봄비가 벌써 그녀를 40분 이상 늦게 하고 있다. 가뜩이나 기껍지 않은 인터뷰 자린데…. 벌써 기자로부터 두통째의 전화. 영상원 단편작업으로 이미 한번의 매스컴 경험이 있는 그녀로선 구독의 재미를 위해 자신의 말이 토막나는 게 영 재미없다. 느릿한 말투의 사람이 으레 가지는 신중함과 예민함으로 시작된 인터뷰는, 그러나 간간이 터지던 그녀의 낮은 웃음소리로 인해 차츰 물기가 오른다.

‘6박7일의 짜릿한 트루 로맨스’를 천명한 <생활의 발견>은 배우들에게나 스탭들에게나 정말 ‘여행’ 같은 영화였다. “마음을 비우고 푹 쉬는 기분으로”라는 감독의 추임 탓이었는지, 추상미든 김상경이든 후기엔 ‘꼭 여행다녀 온 기분이었’음을 술회케 했고, 연출부 막내 박은영(29)에게도 그랬다. 슬레이트(일명 딱딱이) 치고, 의상과 캐스팅에 관여하면서 많은 이들과 함께했지만 오히려 심심하고 사적인 여행에 가까웠다.

영상원의 교수와 제자라는 인연으로 만나기 전, 홍상수는 그녀에게 한번은 같이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은 상대였다. 그 전, 이미 그의 영화를 통해 그녀는 뭔가 이상한 것, 뭔가 우리나라에선 보지 못한 것을 봤고, 이후 그의 수업 속에서 별다를 것 없지만 콕콕 가슴이 찔리는 그 무언가도 경험했다. 꼭 그의 영화를 닮은 언행을 접하면서 더욱 그와 만나고, 말하고 싶어졌는 지도. 명숙이 경수에게 끌리듯, 경수가 선영에게 끌리듯, 정확히 뭐에 끌리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현재 영상원 연출전공 4학년1학기 마치고 휴학중. 영상원에 진학하기 전, 영상원에 적을 두고 있는 대부분의 노장 학생들이 그렇듯 영화와는 거리가 먼 전공으로 그녀는 이미 하나의 학위를 따 논 상태였다. 공대 화공과 출신의 그녀가 영화를 택한 건 그녀의 말마따나 우연인 듯 의도였고, 그렇게 4년이 무심히 흐르는 듯했다. 하지만 1학기를 남겨놓고 그녀는 휴학을 결심했다. 아무것도 없는데 계속 자신을 쥐어짜는 느낌, 스펀지에 물이 촉촉히 채워져 결국은 흘러넘치듯 나와야 하는데, 작위적으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는 기분은 끝내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생활의 발견>을 찍는 동안 그녀는 내내 머리 끝까지 채워진 느낌이었단다. 지금은 그마저 사라지고 다시 원점이라지만, 느릿한 음성에 배어나는 느긋함은 숨길 수 없나보다. 그녀에게 홍상수의 영향 운운하자 대뜸 “좁디좁은 한국영화판에서 새로운 것, 낯선 것들이 ‘홍상수적인 것’으로 불리는 것은 조금 아쉬운 점”이라며 다양한 말걸기를 시도하는 영화를 통해 그녀가 걸어온 거리만큼, 딱 그만큼의 풍경을 보여주고 싶다고 내비친다.

시기를 정해 일하는 건 질색이라는 그녀는 <버스, 정류장>의 재섭이 그랬듯 가끔씩, 띄엄 띄엄 그러나 멈추지 않고 영화와 함께 ‘생활’해 나갈 예정이라고. 글 심지현 [email protected]·사진 오계옥 [email protected]

프로필

1974년생·영상원 연출전공·<생활의 발견> 연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