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생 인하대 독문과 졸업 방송작가·<무뇌아> <샤이닝> <광우> 각색 <번지점프를
하다.> 시나리오
혀가 말린다. 공개 전, 사건의 전말이 비밀에 부쳐진 채 <번지점프를
하다.>(영화에 마침표까지 있다)는 득달같이 달려드는 잡지사에 한장의 시놉을 공개했다. 남녀의 관계도 남남의 관계도 밝히지 않은 시놉에는,
우산 속으로 뛰어든 운명적인 사랑에 ‘혀가 말리다’, 이런 식으로 두루뭉실한 표현에 난데없는 말의 수수께끼가 끼어들었다. 우성, 열성 실험도
아닌데, 도대체 혀는 왜 말리는 것일까? “그런 말 안 써요?” 고은님씨는 오히려 의아해한다. “애절하다, 예요.” 그에게 세상은 ‘호기심
천국’ 같다. “선생님! 숟가락은 ㄷ인데, 왜 젓가락은 ㅅ인가요?”라고 중학교 때 궁금해서 수업시간에 물었던 일이나, ‘당근이지’라는 말의
유례가 어떻게 된 건가 궁리하던 일은 <번지점프를 하다.>에 일화로 녹아들어갔다. 그런 ‘사소한’ 관찰력과 말 사랑이 <번지점프를 하다.>를
끌어가는 원동력이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도 당신을 사랑하겠다”는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입바른 말이 손 붙잡은 남자 둘이 뉴질랜드에서 번지점프를
하는 거대한 벽화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고은님씨가 시나리오를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99년 봄. 시나리오 작가
공모하는 데 자기소개서를 팩스로 밀어넣고 나니 참여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각색에 열심으로 참여했고, 신망을 얻었고, 머리에 들어 있는
생각을 온전히 풀어낼 기회를 얻었다. 한달만 기회를 달라고 말하고 5일 동안 집중하여 쓰니 시나리오가 되어 나왔다. 그것이 <번지점프를
하다.>. 시나리오 5고가 나온 상태에서 감독이 정해졌다. 시나리오는 한 신(태희가 인우를 비오는 날 발견하는 장면)만이 첨가되어, 한
신의 누락없이, 대사는 편집상의 필요에 의해서만 잘려 공개되었다. 그리고 ‘시나리오 좋다’는 평가가 나왔다. 영화사마다 찾아다니는 발품도
팔지 않았고, 이건 필요없는 것 같다, 이건 좀 막 나가는 것 같다고 시나리오 부분부분이 턱턱 잘려나가는 걸 보는 마음고생도 하지 않았다.
다음 작품도 이미 정해졌다. <번지점프를 하다.>를 제작한 눈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한 시나리오는 ‘액션 판타지 어드벤처’. 이런 경우가 어딨어?
태희가 현빈으로 환생하는 듯한, 하늘에서 떨어진 밀씨 하나가 바늘에 꽂히는 듯한 확률로나 가능한 일. 그런 행운이 따른다면 재능 때문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 같다.
“급하게 쓴 것은 표시가 나고” 닭살스런 대사는 쓰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도 겹치지만, 지금이 행복하다. 인우가 되었다가, 태희가 되었다가, 우는 장면을 쓸 때 울고, 웃는 장면은 웃으며 혼자 원맨쇼 하던
때는 얼마나 막막하고 외로웠던가. 원맨쇼의 결과, 스토리 전체의 책임이 그에게 돌아오는 지금 사람들의 반응에 신경이 쓰인다. “컬트영화인가봐요.”
<번지점프를 하다.>를 10번 넘게 본 사람이 있고,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라는 의아한 시선도 한쪽에 있다. “이걸 판타지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그냥 멜로하고 해요.”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도 상상, 환상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것, 황당해 보이는 스토리로
공감을 얻어낼 수 있도록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믿고 있는 게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
자신이 지금까지 각색하고 쓴 시나리오의 공통점이었다. “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야 바람이 있는 것을 알고, 사람이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서야
절벽이 있다는 것을 안다.” 고은님씨가 <번지점프를 하다.>를 쓸 때 마음에 들어왔던, 언젠가 읽은 소설의 한 구절과 상통하는 말이다.
다음 작품을 기대하는 건, 그런 온전한 자기반영이 묻어나지 않는 상업영화에서 발휘된 그녀의 순발력을 믿기 때문이다. 다음 순간 절벽을 알아버렸다고
해도, 뭐, 그것은 순환하는 궤의 앞바퀴를 물어버릴 것을. 우리는 절벽 끝에 비상이 있다고 그녀의 설득에 홀딱 넘어가버리지 않았는가.
구둘래/ 객원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