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막눈 삼디기>는 부모를 일찍 잃고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초등학생 엄삼덕을 그린 동화다. 아이들은 이학년이 되도록 글자를 깨치지 못한 엄삼덕을 “까막눈 삼디기”라 놀려댄다. 씩씩한 연보라가 시골에서 전학 오고 엄삼덕을 돕기 시작한다. 며칠 전 이학년이 된 김단이 그걸 읽고 있기에 내가 물었다. “단이 일학년 때 삼디기 같은 친구 있었어?” “응, 김은혜(가명).” “글자를 몰랐어?” “글자도 모르고 말도 잘 못하고 바지에 똥 싼 적도 있어.” “그래서 친구들이 놀렸어?” “친구들이 만날 놀리고 남자애들은 때리고 그랬어.” “뭐라고 놀렸어?” “바보 멍청이, 더러운 애라고.” 김단은 기억이 새로운 듯 표정이 심각하다. “단이는?” “난 은혜하고 친하게 지내고 은혜를 도왔어.” “단이가 그랬어. 어떻게 도왔지?” “너희들 그러면 나빠, 은혜도 우리와 같은 일학년이고 우리 친구야, 글자도 이제 곧 배울 거야, 그러고.” “또.” “때리는 남자애들 내가 때려주고.” “단이처럼 은혜를 도와주는 친구가 또 있었어?” “응, 한명, 아니 두명인가. 그런데 내 단짝 세명이 은혜가 더러운 애라고, 더러운 애하고 놀면 나하고 같이 안 놀겠다고 해서….” 김단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흔히, 어른들(특히 배웠다는 어른들)은 어른들이 감당하는 거대 세계의 개념들을 아이에게 가르치고 아이가 그 개념과 관련한 실제의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착각하곤 한다. 아이에게 개념만을 가르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를테면 한 아이에게 미 제국주의가 아프가니스탄 인민들에게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지 똑 부러지게 말하게 만드는 데는 삼십분이면 족하다. 그러나 아이에게 아이가 감당할 수 없는(그리고 아직은 감당할 의무가 없는) 그런 거대 세계의 제국주의가 아닌 제가 감당하는 실제 세계(형제나 동무들 따위와의)에서 제국주의에 해당하는 것을 분별하고 반대하는 능력을 갖게 가르치는 데는 장구한 노력이 필요하다. 한 사람의 가치가 우주의 가치보다 덜하지 않다 말하듯 아이를 키우는 일은 마치 우주를 키우는 일과 같다.
사정은 그러한데, 용감무쌍하게도 나는 두 아이를 키운다. 아홉살 먹은 여자 김단과 여섯살 먹은 남자 김건. 나는 그들이 세상이 우러러보는 별난 사람으로 자라기를 눈곱만큼도 바라지 않지만 세상의 공정함을 좇는 사람으로 자라기는 간절히 바란다. 나는 그들이 사람다운 사람으로 자라길 바란다. 자본주의적 이기심이 가장 고결한 품성으로 추앙되고 남의 것을 빼앗는 능력이 사회적 능력으로 설명되는 세상에서 사람다운 사람의 유일한 요건은 공정함을 좇는 것이라 나는 믿는다. 나는 아이들에게 공정함을 좇는 습성(이어야 한다. 80년대 청년들의 경과가 보여주듯, 이십여년 동안 자본주의적 이기심의 범벅이 된 채 대학에서나 얻는 공정함의 추구는 어설픈 것이다)을 길러주려 애쓴다. 그들의 모든 행동에 한껏 방임적인 나는 그 지점 부근에서 언제나 민감하고 긴장되어 있다. 세상은 이미 아이들에게 24시간 내내 남의 것을 빼앗아라 가르치고 또 되새긴다.
그런 미친 세상에서 아이에게 공정함을 좇는 습성을 갖도록 가르친다는 건 기나긴 게릴라전과 같다. 먹을 것이든 놀 것이든, 아이들의 작은 세계에서 소유문제를 둘러싼 다툼이 발견될 때 나는 어김없이 개입한다. 잔뜩 골이 난 아이들을 달래가며 천천히 토론해 나가다보면 아이들은 결국 ‘남의 것을 빼앗는 놈은 나쁜 놈’이라는 결론을 스스로 내린다. 나쁜 놈은 사과하고 반성한다. 약한 친구를 괴롭히는 놈에게 꿇지 않고 맞서야 한다, 맛난 게 생겼을 때 다른 형제나 친구를 먼저 생각한다, 청소 따위 궂은일을 할 때 빠지는 건 다른 사람에게 시키는 것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결론을 내려간다. 그들이 어른들과 다른 단 하나는 제가 내린 결론을 지키는 일을 명예로 안다는 점이다. 어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지키지 않는다. 나는 우주를 키우다 우주만큼 많은 내 위선을 깨닫는다. 김규항/ 출판인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