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가 외로울까봐 사람이 산다. 외로운 사람들이 모인 도시는, 그러나 자꾸 외로워 보인다. 시린 내 두 다리를 어루만져주고, 쉬게 할 누군가의 손을 만나는 일은 도시의 밝은 면을 보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하지만 수많은 멈춤과 떠남을 통해 그 일을 가능케 하는 공간이 있다. 그곳이 버스 하고도 정류장인 것이다. 버스가 한번씩 덜컹거리며 멈출 때마다 전혀 새로운, 혹은 조금은 낯익은, 하지만 결코 ‘밀지 마세요’라는 두 단어 이상을 허락지 않았던 상대들과 만나고 소통하는 일은 녹록한 일은 아니다.
17살, 세상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소녀와 32살, 세상의 잔재미를 너무 일찍 잃어버린 남자의 만남은 버스와 정류장, 도시와 사람, 그리고 열일곱과 서른 사이에 쉼표를 찍으며 시작된다. 서른의 수줍은 고백이 끝나는 순간, 열일곱의 눈에서 얼어 있던 눈물 방울이 떨어지려는 순간, 아무 음표가 그려져 있지 않은 악보 한마디가 무심히 그 순간을 지키면 다시 노래가 시작된다.
자폐적 서정성이 담긴 ‘루시드 폴’ 조윤석의 노래는, 그렇게 스스로의 쉼표를 간직한 채, 영화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뮤직비디오 <그대 손으로>는 <버스, 정류장>의 영화 속 캐릭터를 그대로 얻어왔지만, 그 안에 조윤석의 감미로운 음악과 공동연출을 맡은 이형곤(34), 김병서(25)의 독특한 상상력이 양념의 형태로 숨어 있어 전혀 다른 맛을 낸다. 화면 속에서는 내내 음악이 환상을 부르고, 환상은 음악의 형태를 띤 채 흘러다니고.
조윤석과 두 감독과의 인연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음악과 화면의 조합이 보통 궁합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다. 연출이 전공인 이형곤과 촬영이 전공인 김병서는 영상원 학부 동기로 3년간 워크숍을 통한 단편작업 안에서 일찍부터 서로의 든든한 ‘버디’였다. 그들이 ‘학생 작품’이란 꼬리표를 뗀 결정적 계기가 조윤석, 아니 조윤석이 솔로 프로젝트 ‘루시드 폴’로 활동하기 이전 몸담았던 언더그라운드 그룹 ‘미선이’의 노래 . 98년와 99년에 활동하던 ‘미선이’가 멤버들의 군입대 문제로 임시 해체되고, 리더 조윤석만 남아 활동을 모색하던 2000년, 평소 미선이의 노래를 좋아하던 김병서와 이형곤은 마침 쌈넷에서 개최한 ‘쌈지 뮤직비디오 콘테스트’에 을 삽입한 뮤직비디오로 연출상을 받게 된다. 그때 제출한 뮤직비디오는 사실 99년 말까지 만들다 포기한 단편을 편집한 것. 그것이 인연이 되어 명필름이 조윤석을 지목했을 때 조윤석은 다시 이들을 부르게 된 것이다.
김병서와 이형곤이 뮤직 비디오를 찍기 전 명필름으로부터 받은 주문은 “영화가 가진 감성을 그대로 이을 것. 따라서 캐릭터는 그대로 갈 것, 단 나머지 연출은 자율에 맡기겠음.”이었다. 준비기간이 일주일 남짓이었으므로 멀티형 작업방식이 절실히 요구됐다. 먼저 재섭과 소희의 캐릭터를 파악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시나리오를 수십번 뒤적이고, 마침내 완성된 가편집본까지 챙겨본 후에도 재섭과 소희에게서 느껴지는 건 단지 ‘쓸쓸함’뿐이었단다. 그러던 중 김병서는 우연히 자신의 정서가 재섭의 것과 비슷하게 닮았고, 이형곤은 소희의 감성이 더 쉽게 다가왔음을 고백한다. 그렇게 김병서의 재섭은 수동성, 침잠, 변화하고자 하는 욕구, 좌절, 불만, 그/러/나 희망으로, 이형곤의 소희는 조소, 가벼움, 진지함, 열일곱살다움, 그/리/고 희망으로 정리됐다. 그리고 뮤직 비디오에서는 이들에게 하나의 성격을 더 보여준다. 재섭은 소희의 희망을 닮기 위해 적극적이 되고, 소희는 재섭의 희망에 응답하며 비로소 조소가 그친 눈물을 흘린다.
하늘과 가까운 정류장이 들어설 옥상과 소희의 자아가 분열하는 모습을 보여줄 공중(公衆)화장실은 이미 지난 단편작업을 통해 일찌감치 재활용이 결정난 상태였고. 나머지 무대가 될 터널과 바닷가 방파제가 문제였다. ‘꿈을 이루기 위해 숨을 참고 뛰어야 하는’ 재섭의 터널과 두 연인의 종착지가 될 환상적이고 평온한 바닷가는 말 그대로 스스로 몸을 드러냈단다. 바닷가 하면 동해쪽이겠다 싶어 무작정 동해안을 달리기를 꼬박 하루. 기적처럼 푸른 바다에 아담한 등대를 지닌 알맞은 장소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더니 다음날엔 터널도 그냥 척 발견돼줬다. 전남 영광에 자리잡은 터널은 마침 미개통 구역이라 제작부의 고민을 덜어줬다고. 나흘 안에 모든 촬영을 마쳐야만 하는 상황이라 영상원 선·후배부터 명필름 제작부 식구들까지 팔을 걷어 부쳤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무서운 힘 앞에서 이형곤과 김병서는 감동받고 또 감동받았다.
이들에게 뮤직비디오는 영상에 가까워지기 위한 첫 걸음일 뿐이다. 다가올 4월부터 김병서는 25세의 어린 나이로 박광수 감독의 영화에서 촬영감독으로 입봉하고, 이형곤은 그동안 머릿속에만 들어있던 아이디어들을 시나리오로 풀어낼 작정이란다. 한편의 시(詩)를 떠올리게 하는 이들의 조용한 감성이 앞으로 어떤 빛깔을 띠게 될지 더욱 궁금해지는 것은 이들이 고작 첫발을 떼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글 심지현 [email protected]·사진 오계옥 [email protected]
프로필
이형곤
1969년생
홍대 시각디자인학과 졸업
영상원 연출전공
3여년간의 단편워크숍
2000년 쌈지 뮤직비디오 콘테스트에서 ‘미선이’의 뮤비로 연출상 수상
2002년 <버스, 정류장> 뮤직비디오 공동연출
현재 시나리오 집필예정
김병서
1978년생
영상원 촬영전공
이하 이형곤과 동일
현재 박광수 감독과 작품 준비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