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뜻 애인을 다정하게 부르는 말 속뜻 애인을 간절하게 부르는 말
주석 세상의 지도를 만드는 방법이 축척을 쓰는 것이라면 마음의 지도를 만드는 방법은 인칭을 쓰는 것이다. 나(일인칭)와 너(이인칭)를 거리의 기본 단위로 삼고, 다른 모든 사람과 사물들(3인칭)의 거리를 거기에 비추어 측량하면 된다. 사랑이 그토록 중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마음의 세계를 측량하는 데 필요한 기본 척도가 나와 너를 잇는 선분이며, 사랑이 그 최초의 선분을 긋게 해준다.
이 선분의 저쪽 끝에 네가 있다. 너의 변형인 ‘당신’은 본래 이인칭으로 듣는 사람을 보통으로 높이는 말투(‘하오체’라고 부르지만 요즘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들 신기하게 쳐다볼 것이다)에서 쓰지만, 부부 사이에서 존중의 뜻을 담아서 쓰기도 하고 말싸움할 때 낮잡아 이르는 뜻을 담아서 쓰기도 한다. 당신은 ‘當身’이다. 내 앞에서 내 말을 감당하고 있는 바로 그 몸이라면, 좋건 싫건 다 당신이다. 게다가 당신은 삼인칭으로도 쓴다. 앞에서 이미 말한 적 있는 사람을 높여서 부를 때에도 당신을 쓰는데, 이때의 당신은 ‘자기’의 높임말이기도 하다.
한편 자기는 ‘그 사람 자신’이란 뜻을 가진 명사이거나 바로 앞에서 말한 사람을 가리키는 삼인칭 대명사다. 자기는 ‘自己’다. 그 자신에게서 생겨나거나 비롯된 것이라면 모두 자기다. “자기야”라는 호칭은 삼인칭인 자기가 애인을 가리키는 이인칭으로 전환된 것이다. 흔히 이 호칭이 상대방을 내 자신(=자기)처럼 사랑해서 부르는 말이라고 해석하지만 잘못이다. ‘자기’는 일인칭으로 사용된 적이 없다. 애인을 ‘자기’라고 부르는 것은 애인이 내 것이라거나, 내 자신만큼 소중해서가 아니다. 애인은 그 사람 자신이며, 바로 그 사람일 때에만 ‘자기’가 된다.
그러니까 나와 당신을 잇는 선분은 이인칭인 그 사람 자신에게서만 비롯되는 ‘자기’(=그 사람으로부터)이자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인 ‘당신’(=내 앞에 서 있는 이 사람)과 나를 잇는 핫라인이다. 컴퍼스에 비유하면 될까? 나는 금을 긋는 중심이지만 가만히 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거리와 각도를 재는 것은 너의 몫이다.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서 비롯된 힘으로, 그도 되고 그녀도 되면서, 세상을 두루 재는 것이다. 내가 당신을 부르는 것은 그 힘에 대한 찬탄이기도 하다. 자기야, 그대의, 그대에 의한, 그대를 위한 이름아.
용례 <개그콘서트>의 ‘엽기적인 그녀’ 코너에서 황 마담(황승환)은 늘 코맹맹이 소리로 “자, 자, 자, 자기야”를 외치곤 했다. 그 말은 내게 산스크리트어로 된 진언, “타, 타, 타”를 떠올리게 한다. 저 말이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뜻하는 ‘타, 타, 타’에 미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것은 “자(모든 것의 ‘개시’를 선언하는 말), 자(만물의 척도[尺]임을 선언하는 말), 자(우주의 휴식[잠]을 선언하는 말), 자기야(그 모든 게 당신 자신에게서 비롯됨을 선언하는 말)”로 이루어진 진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