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뜻 내가 연장자라는 뜻
속뜻 내 기억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뜻
주석 우리말은 존대법이 이례적으로 발달한 언어다. 상대를 높이는 존대, 자신을 낮추(어 상대를 높이)는 존대, 제삼자를 높이는 존대가 따로 있고, 행동이나 상태를 높이는 존대가 따로 있다. 말의 구석구석, 요소요소마다 높임말의 흔적이 묻어 있다.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는 문장을 접해보셨는지? 어떻게 띄어쓰느냐에 따라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는 건지 아버지의 가방에 들어가는 건지가 달라진다고 들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 문장이 본능적으로 잘못됐다는 걸 안다. “아버지께서~ 들어가신다”고 썼어야지! 저 문장은 띄어쓰기의 중요성이 아니라 존댓말의 용법을 일러주는 예인 셈이다. 존댓말에도 저처럼 호응관계가 있다. 이 호응의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일은 좀 끔찍하다.
모든 게 상대를 존중하는 문화가 발달해서… 라고 말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높임’이란 ‘낮춤’과 한짝이어서 우리말에는 존대만큼이나 하대도 발달했다. 신분제 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신분의 장벽을 말의 격벽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넌 천한 것이니 내게 이야기할 게 있으면 모든 절차를 거쳐서 와. 나를 전하나 폐하, 각하라고 불러. 넌 내가 있는 집 아래[殿下], 섬돌 아래[陛下], 전각 아래[閣下]에 있는 거야. 말의 계층구조란 신분의 계층구조다. 존대법이란 저 신분의 완강함을 확인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대박ʼ편에서 얘기한 “삼천원이십니다, 주문되셨습니다”와 같은 이상한 존대법은, 물신숭배의 표현이면서 신분구조의 재확인이기도 하다. 한 기자가 종업원에게 왜 그런 이상한 표현을 쓰냐고 물었다. 대답은 이랬다. “저도 이상한 거 아는데요. 그렇게 말 안 하면 손님이 화내요.”
21세기판 신분제도를 만든 궁극의 원인은 돈이지만, 그것은 여러 표현형식을 갖고 있다. 자본권력이 자신을 무력한 자들과 구분하기 위해 설정한 표현형이다. 재산의 정도가 첫 번째 기준이지만, 이를 직접 물어볼 수 없으니까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개발한 매뉴얼이다. 출신 지역, 학교, 직장 및 지위, 사는 곳, 나이. 그나마 평등의 요소를 갖고 있는 유일한 요소가 나이다. 이건 시간에 따라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배분되는 것이니까.
말싸움의 결론이 늘 “당신 몇살이야?”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며, 이것이 학벌과 결합해서 나온 말이 “너 몇 학번이야?”다. “학번이 깡패다”란 단정과 짝을 이룬 말이지만, 실은 이상한 질문이다. 몇 학번인지도 모르면서 왜 처음부터 반말일까? 아무리 봐도 상대방이 자신보다는 어려 보인다는 건데, 그래서 그게 논쟁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혹시 그는 청문회에 선 증인들처럼 상대방 앞에서 피해가려는 것 아닐까? 요즘 기억이 자꾸 가물가물해. 가만, 근데 댁은 뉘시더라?
용례 문단의 원로이신 오탁번 시인이 이런 시를 쓴 적 있다. “복학한 어느 학생이/ 학교 앞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시건방지게 떠드는 옆자리 학생에게 말했다 /야! 너 몇 학번이야? 위아래도 없어?” 시인의 대답은 이렇다. “나? 나는 오탁번이다! 어쩔래?” 그랬구나, 이분, 05학번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