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밋빛 환희로 양볼을 물들인 사내아이가 공중으로 솟구친다. 천국에라도 닿을 듯이, 두번 세번, 높게 더 높게. 하지만 황홀한 비상의 순간이 끝나면 우리는 소년의 머리 위에 드리운 지저분한 천장과 발 밑에 깔린 낡은 침대 매트리스를 본다. ‘분홍신’의 포로가 된 광산촌 소년의 동화 <빌리 엘리어트>는 그렇게, 팍팍해서 목이 메는 현실에 대해서는 너그럽고 꿈과 환상에 대해서는 침착함을 잃지 않는 의젓한 영화다.
주인공의 이름이 제목인 영화가 흔히 그렇듯 <빌리 엘리어트>를 짊어지는 것은 열한살 빌리의 채 여물지 않은 어깨다. 남루한 현실과 예술의 희열을 깨지지 않게 한 바구니에 담고자 한 스티븐 달드리 감독처럼, 빌리는 뮤즈의 속삭임과 가난에 지친 가족의 요구를 화해시키려고 애쓴다. 불우한 천재 예술가의 출세기라는 별 수 없이 진부한 드라마에 대한 구원 역시 빌리의 입체적 캐릭터에서 나온다. 엄마를 잃고 무력한 아버지, 무뚝뚝한 형, 치매를 앓는 할머니를 부축하며 살아가야 하는 빌리는 결코 변명하거나 울지 않는 조그만 현실주의자다. 한밤중에 우유를 병째 들이켜다가 죽은 엄마의 잔소리가 귓전에 들려올 때도 소년은 울지 않는다. 가느다란 한숨이 전부다. “엄마가 참 특별한 분이셨던 모양이구나”라는 선생님의 말에도 소년은 눈물을 떨구지 않는다. 그저 공중을 바라보며 “아뇨. 그냥 평범한 엄마셨어요”라고 가만히 도리질을 칠 뿐이다.
여섯살 때 토슈즈를 신었다는 신인 배우 제이미 벨은 빌리가 춤에 홀리는 장면마다 <풋루스>의 앳띤 케빈 베이컨을 무색하게 하는 카리스마를 과시한다. 그러나 아역 배우의 깜찍한 춤 솜씨보다 강한 힘으로 관객을 잡아끄는 것은 예술의 품에 처음 안긴 어린 영혼의 멈칫거림. 아직 그의 피를 요동치게 하는 기운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빌리의 가슴은 리듬이 그를 들어올릴 때마다 성취나 정복의 쾌감이 아닌 자아 소멸의 해방감에 수줍게 떨린다. 그리고 관객은 최초의 피루엣을 성공한 빌리의 입가에 번지는 하늘보다 맑은 미소에 그만 가슴이 설렌다. 이같은 심리적 동화를 부추기는 장치는 마치 빌리의 머릿속에 있는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음악. 티-렉스의 <겟 잇 온> 등 70년대 록 넘버와 차이코프스키의 발레음악 그리고 피아노 연주곡을 엮은 음악은, 갑자기 폭발하는가 하면 누군가 턴테이블에서 바늘을 거둔 듯 중단되면서 소년의 혼란과 격앙을 듣는 이의 심장에 곧바로 옮겨놓는다. 안무가 피터 달링과 제이미 벨이 하루 8시간씩 석달간 매달렸다는 안무도 동작 하나하나가 명사가 되고 동사가 되어 대사를 대신한다.
“켄 로치가 만든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같은”이라는 한 평론가의 표현처럼 <빌리 엘리어트>는 일종의 뮤지컬영화이면서도 환상을 위해 무지갯빛 세상으로 날아가지 않는다. 대신 <빌리 엘리어트>의 판타지는 현실의 갈피에 슬쩍 섞여들며 초라한 골목길 위로 살그머니 내려앉는다. 빌리가 허름한 담벼락을 따라 달리고 도약하는 장면에서 시간을 단숨에 압축하며 조용히 내리는 눈처럼, 동네 언덕길 너머 바다에 아련히 떠있는 흰 돛배처럼. 대니 보일이 추천했다는 <쉘로우 그레이브> <트레인스포팅>의 촬영감독 브라이언 투파노의 카메라는 진중함을 견지하면서도, 중요한 순간들은 더없이 적절한 거리에서 정확히 포착한다. 특히 아들을 알지 못하는 세계로 막 떠나보내는 아버지가 소년을 번쩍 들어올려 터질 듯 끌어안는 한컷의 그림은 백마디 대사보다 마음을 휘젓는다.<빌리 엘리어트>에서 연기와 더불어 가장 빛나는 요소는 절묘한 편집. 빌리가 엄마의 환각을 본 직후 엄마의 ‘대리역’ 같은 윌킨슨 부인과 빌리의 레슨으로 넘어가는 편집이나 빌리와 가족의 이별 뒤에 탄광 리프트를 타고 지하로 가라앉는 형과 아빠의 검은 얼굴을 이어붙인 대목은 객석의 감정선을 파악하는 감독의 예민한 촉각을 실감케 한다.
아직도 많은 영국인에게 죄책감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대처 시대의 탄광 투쟁을 다시 한번 스크린에 불러낸 <빌리 엘리어트>는 마이크 리와 켄 로치를 거쳐 <브래스드 오프>와 <풀 몬티>, 최근 린 램지의 <쥐잡이>까지 이어지는 ‘키친 싱크 리얼리즘영화’, 즉 영국 노동계급 현실을 그린 영화 전통의 끝자락에 서 있다.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권투 글러브를 밀어두고 발레 수업에 몰두하는 빌리의 모습과 시위 장면을 교차 편집한 시퀀스는 분명, 산업사회가 노동계급에 요구해온 전통적 남성상의 붕괴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사이트 앤 사운드>의 클레어 몽크는 <빌리 엘리어트>가 “예술, 문화산업을 통해 후기 산업사회의 절망과 남성성의 위기를 해결하려는 토니 블레어적 해결책”을 따랐다는 ‘깔끔한’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스티븐 달드리 감독은 파업의 기억이 시종 스크린 언저리를 맴돌되 어린 빌리의 눈높이와 시야 안에 머물게 한다. 시위 진압 경찰의 방패 대열에 막대기를 긁으며 어린이들이 등교하는 장면은 한 예. 이따금 부담없이 코미디에 영화의 전경을 양보하는가 하면 영화만의 특권적 미감을 살리는 데에도 공을 들이는 <빌리 엘리어트>의 태도는 켄 로치의 바삭바삭한 리얼리즘과도, <풀 몬티>의 TV적인 스타일과도 사뭇 다르다. “영화 만들기란 믿음이 가는 연기, 감정적 잠재력을 지닌 이미지를 창조하는 일이다. 연극과 달리 많은 위대한 영화들은 잠재의식의 차원에서 작동한다. 영화의 방언은 꿈의 언어다”라는 감독의 말은 <빌리 엘리어트>의 좌표를 짐작게 한다.
15년의 세월을 별안간 뛰어넘는 <빌리 엘리어트>의 후주(後奏)는 신인의 영화답게 미숙하고 가파르다. 그러나 <빌리 엘리어트>는 서툰 피날레뿐 아니라 작은 시대착오들을, 신파조의 눈물을, 또 그 밖의 많은 흠을 용서하게 만드는 영화다. 영화의 종착점에 함께 다다른 관객은 스크린 위의 청년 댄서를 향해 흐뭇하게 중얼거린다. “빌리, 많이 컸구나.” 우리를 그토록 관대하게 만드는 것은 아마 담담하지만 끈질기게 자기 삶에 대한 마지막 존중을 포기하지 않는 빌리와 그의 가족, 친구들의 가쁜 숨결일 것이다.
김혜리 기자[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