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서른두살의 보습학원 강사 재섭은 거리에서 만난 창녀가 유일한 대화상대이고 자신을 따르는 학생들에게도 냉소적인 농담 따먹기 외에는 별 관심이 없다. 열일곱살의 학원생 소희는 그런 재섭의 내면을 금세 알아본다. 두 사람은 버스 정류장과 전철역을 오가면서 친해진다. 원조교제를 하는 모범생과 아웃사이더 인텔리 사이에 서서히 이해와 사랑이 싹튼다.■ Review 때로는 쉼표 하나가 많은 말을 대신할 수 있다. <버스, 정류장>의 제목 속에 들어 있는 쉼표는, 당신이 어느날 버스 정류장에서 스치고 지나갔을지도 모르는 조용한 여고생과 후줄근한 학원 강사의 모습에 눈길을 한번 주어보라는 조용한 권고다. 휙휙 내달리는 일상의 리듬에 잠시 쉼표를 찍었을 때라야, 낮고 뜨거운 그들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재섭(김태우)은 지나친 침묵과 다변 사이를 오간다. 친구나 동료들에게는 고립을 자초할 수밖에 없을 만큼 말수가 적고 냉소적인 반면, 분필을 들었을 때에는 정답 찍는 법과 함께 그 정답이 엉터리라는 것을 동시에 가르치느라 말이 많고, 삐딱한 선생에게 애정을 표하는 삐딱한 여고생들에게 퉁명스러운 농담으로 적당히 선을 긋느라 바쁘다.
원조교제 하는 우등생 소희(김민정)는 재섭의 분열증을 고스란히 닮았다. 집안이나 학교생활이 모두 겉보기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거기에 잠복해 있는 진짜 거대한 문제들을 예민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한국의 고등학생은 자신이 문제아가 되는 것 외에는 문제를 문제로 드러낼 방법을 갖고 있지 않다.
비단 고등학생뿐이랴. 이성이 말짱할수록 세상 살아가기 어려운 이들이. 이런 사람들은 마치 학원의 정답처럼 세상이 참말이라고 떠드는 것의 위선과 모순을 귀신처럼 알아채고, 쉽사리 무시되는 사소한 말들에 투입된 존재의 무게감에 예민하게 마련이다. 그들은 세상과 타협할 방도를 별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접점만을 남기고(마치 재섭이 가지고 있는 호출기처럼) 나머지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길을 걷게 된다. 이런 부류는 또한 자신들이 세상에 드물게만 존재하는 희귀종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열일곱과 서른둘이 사랑에 빠진다고 해도 의아할 게 없을 것이다.
영화 <버스, 정류장>이 자신의 캐릭터들에 충실하려면 이 소재의 센세이셔널한 측면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게 끌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연 감독은 정직했다. 감독의 시선은 카메라의 앵글을 통해 고스란히 읽힌다. 엔딩 시퀀스에서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재섭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희, 그 두 사람의 모습을 인터컷 없이 하나의 마스터 숏으로 끝내 버티면서 또한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카메라의 시선이 대표적이다. 그들에게 결코 동정하거나 지나치게 감격하지 않으면서 냉정하게 바라보던 감독도 버스를 타고 사라지는 두 사람의 모습은 끝내 외면하지 못했는지, 멀어져가는 버스의 뒤꽁무니를 오래도록 쳐다본다. 감독의 차가움 역시 위장된 상처인 것이다.
한국 대중문화의 핵심적인 흥행 코드인 ‘뽕끼’를 배제한 채 끌어가는 이 영화의 쾌락은 그리 쉽사리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다빈치의 <모나리자>보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소박하고 단정한 그림이 감동적이라고 생각하는 취향이라면, 이 영화의 화면이 구사하는 야심찬 세련미에 미소짓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연 감독과 박기웅 촬영감독, 임재영 조명감독은 손발이 잘 맞았던 것 같다.
<버스, 정류장>의 포맷이 2.35:1 화면으로 결정된 것은 <아메리칸 뷰티>가 별다른 스펙터클 없이 시네마스코프 사이즈를 택한 데서 받은 신선한 충격과 연관이 있으며, 루시드 폴의 음악도 영화의 느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제작진들은 소개했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
이미연 감독 인터뷰
“마이너리티로서의 자각, 피해 가지 않겠다”
다른 사람이 쓴 시나리오로 감독 데뷔하는 것은 최근 추세로 보아 드문 일인데.
영화를 만들 때 가장 중요시하는 요소는 정서와 캐릭터인데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하고 싶은 종류의 이야기였다. 다만 20대 작가의 감성을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에 프리프로덕션 과정에서 내 방식에 따라 나름대로 철저하게 준비했다. 감독이 작품 기획부터 시나리오까지 직접 책임지는 것은 과부하가 걸리는 작업 방식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시인의 말대로 비애가 소량의 독처럼 묻어 있는 캐릭터들이다.
그 독이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웃음) 너무 평범한 인물들이지만 뭔지 모를 긴장과 이완의 묘한 경계에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캐릭터의 특수성에 대한 기대나 추상적인 코드들, 혹은 그 반대로 정통 멜로의 관습적인 요소들을 철저히 피해가고자 했다. 어느 방향으로든 닭살 끼치는 것은 못 견뎌하는 편이다. 두 사람의 만남 속에서 부득이하게 드라마가 생겨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면이 흔들리기 이전의 상태들을 중점적으로 묘사했다. 우디 앨런이나 난니 모레티의 몇몇 영화처럼 쓸데없어 보이는 많은 말을 내뱉으며 거리를 걸어다니는 사람들로 보였으면 싶기도 하다.
카메라의 주력 앵글 몇 가지가 눈에 띄었다. 그것이 상황과 인물을 바라보는 당신의 시선인가.
제작팀들이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나서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상당히 냉정한 분이로군요” 하더라. (웃음) 박기웅 촬영기사는 사전에 모든 로케이션 장소에 나가서 필요한 앵글을 디지 6mm로 담은 뒤 출력해서 내게 보여주었다. 덕분에 현장 변수가 생긴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완벽하게 사전 콘티에 따라 촬영되었다.
최근 평단과 관객이 형성하는 이른바 ‘예술영화’와 ‘흥행영화’ 사이의 이분법이 부담스럽지 않은가.
내가 프로듀서 출신이라서 다른 게 있다면 그 문제에 대해 큰 부담을 느낀다는 정도가 유일할 것이다. 여성감독들도 호쾌한 흥행영화를 내놓아야 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지만, 여성은 결국 마이너리티라는 자각이 최근 몇년 사이에 생겼고 앞으로도 이 문제를 피해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