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친구의 정규직 아내가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다. 지방에 있는 처가에 아이를 맡기고 주말에만 만나다 보니 아이가 괜찮을지 걱정된다는 것이었다. 이번 달 생활비나 걱정하거라. 태어난 지 여섯달 만에 부모와 생이별을 하고 네살 때까지 외갓집에서 자란(그렇다고 마음 아픈 가정사가 있거나 한 건 아니고, 동생을 임신한 전업주부 엄마가 그냥 키우기 귀찮다고 보낸 거였다) 나는 친구를 말리려고 했다. “괜찮아, 괜찮아. 알잖아, 나도….” “우리 애가 너처럼 될까 봐.” 아, 그래.
팔자에 없는 육아 칼럼을 진행한 적이 있다. 그때 필자였던 고명하신 교수님 두분은 번갈아가며 ‘3. 3. 3원칙’이라는 걸 강조했는데, 아이는 세살까지 엄마가 키워야 하고, 하루 세 시간 아이와 온전히 함께 있어야 하며, 사흘 이상 아이와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된 건가요, 그런데 요즘 세상에 그게 가능하긴 한 건가요. 아니, 일단 교수님 딸도 시어머니한테 애들 맡기고 일한다면서요. (나한테 자기 딸 잘나간다고 자랑하다가 알게 됐다.) 이상한 일이다. 나도 나를 내 탓 하는데 왜 남들이 우리 엄마 탓을 하는가.
집에서 애 안 키우는 엄마가 죄인 취급을 받는 건 동서양이 따로 없다.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의 케이트(사라 제시카 파커)는 밤을 새워서라도 유치원에서 가져오라고 한 쿠키를 구우려고 하는데, 어릴 적에 엄마가 쿠키를 구워주지 않고 슈퍼에서 산 간식을 들려보낸 것이 한이 되었기 때문이다. 뭐, 그런 걸 가지고. 나도 간식에 맺힌 한이 있긴 하다. 동네에서 유행하던 카스텔라 만들기에 재미를 붙인 엄마가 날마다 카스텔라를 한판씩 굽는 바람에 몇주 동안 빵만 먹고 살았던 한. 그다음엔 TV에 나온 감자수프였지, 난 감자 싫어하는데.
어쨌든 아이들을 베이비시터에게 맡기고 직장에 다니는 케이트를 동네 전업주부 엄마들도 나무라고, 바쁘다면서 아침은 챙겨먹는 남편도 나무라고, 애를 넷이나 낳은 남자 동료도 나무란다. 그녀를 욕하지 않는 건 아직 말문이 트이지 않아 욕을 할 수 없는 두살배기 아들뿐, 워킹맘이 아니라 동네북이다.
잡지 <뉴욕>에 따르면 전업주부와 워킹맘이 충돌하는 건 한국의 동네 놀이터에서만이 아니다. 뉴욕 엄마들도 “서로 가진 것을 질투하며 전투를 벌인다”. 그 기사에서 일을 그만둔 뉴욕의 주부는 전엔 아침에 20분 운동하기도 힘들어서 화장을 하느냐 운동을 하느냐 고민했는데, 이젠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동안 요가를 한다고 자랑했다. 좋겠다. 그러고 보니 아이 낳고 바로 출근한 직장 동료는 1년이 지나도 배가 안 들어가서 오래간만에 만난 사람들이 둘째 임신 축하한다고 했었지. 그녀는 운동하느니 잠을 자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아빠가 아이를 키우면 안 되는 걸까, 된다. 그런데도 정규직인 엄마가 일을 그만두는 이유는 뭘까. (사실 나라도 게으르기 그지없는 내 친구에게 아이를 맡기고 싶진 않다는 건 논외로 치자.) <미세스 다웃파이어>를 보면 아빠도 애들 잘만 키우던데 말이다. 파티를 하면 프로 피에로보다 잘 놀고, 일단 정신 차리니까 프로 보모보다 살림도 잘하고 애도 잘 보고, 애들이 엄마보다 좋아하고. 하지만 대부분의 아빠가 로빈 윌리엄스는 아니라는 게 함정이다. 우리 아빠도 엄마가 애 좀 보라고 하면 무조건 라면 끓여 먹이고 배가 꺼지기 전에 황급히 재웠는데, 그로부터 몇년 뒤, 주말부부가 된 다음에 보니까 젊은 시절 자취 생활 10년의 공력을 자랑하며 혼자 온갖 반찬을 해먹고 있었다.
엄마가 집에서 일하는 프리랜서라면 조금 나을지 모르겠다. TV애니메이션 <아따맘마>의 엄마는 지구를 정복하러 나온 괴물 수준의 말썽꾸러기 남매를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우왕좌왕만 하는(그럴 시간에 살림하겠다) 남편하고 키우는데, 날마다 전쟁인 그 생활도 그나마 동화작가니까 가능한 거다. 하지만 영화 <베스트셀러>를 보면 그것도 아니다. 엄정화는 바쁜 베스트셀러 작가이고, <아따맘마>의 엄마는 한가하잖아.
나름 프리랜서인 영화배우 기네스 팰트로가 주장하기를, 워킹맘으로 살려면 프리랜서보다는 출퇴근하는 샐러리맨이 낫다고 한다. 자긴 하루에 열네 시간 일하고 장거리 장기 출장도 많아서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직장인들은 아침에 다 해놓고 나가면 되니 이 얼마나 편하냐면서. 그리하여 당연한 일이 터졌다. 엄마들이 열받았다.
그 인터뷰를 본 워킹맘은 <인디펜던트>에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다. 그래, 아침에 다 하면 되지.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서 아홉시에 사무실에 도착하기 전까지 애들 깨우고 씻기고 먹여서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사이에 내 몸 씻고 머리 말리고 화장하고 옷 챙겨 입으면 되는 거야. 안 되면 그보다 빨리 일어나면 되지 뭐. 네시? 다섯시? 저녁엔 할 일이 없나? 그래봐야 일년에 몇달 일하고 몇 백만달러 버는 프리랜서보다 편하다는 거지, 지금. 워킹맘이 무슨 나폴레옹이냐, 하루에 네 시간 자게.
이 또한 팔자에도 없이 면접관으로 들어간 적이 있다. 상대는 돌이 안 된 아이가 있는 워킹맘, 옆에 있던 다른 면접관은 중학생 둘을 키우는 워킹맘. 나는 물었다. “애가 그렇게 어린데 야근이나 출장에 지장 없겠어요?” 이게 무슨 20세기 중년 남자 임원스러운 질문이란 말인가. 하지만 나는 정말 걱정이 됐다. 그 순간 옆에 있던 워킹맘 상사가 말했다. “애가 없는 거보단 낫지. 여자는 결혼을 안 하면 정서도 불안하고 제멋대로고, 아니, 정원씨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아니야, 맞아. 나 정서 불안정에 제멋대로인데 그건 내 단점 중에서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근데 그건 내가 애가 없어서가 아니라 원래 그런 거야, 원래. 그 신경전 와중에 가장 곤란해진 사람은 노처녀와 아줌마한테 면접 보러 온 워킹맘. 정말 동네북이다.
진짜 효도가 뭔지 알아?
워킹맘이 붕괴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두세 가지 것들
조숙한 자식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했던 가게 주인 아줌마는 시도 때도 없이 애들을 맡기곤 했다. 일곱살과 아홉살짜리 남매. 일곱살짜리가 오는 날이면 일당보다 약값이 더 나간다는 노가다를 뛰는 것 같았지만, 아홉살짜리는 정말 편했다. 과묵하고 수줍고 잘생긴 꼬마였다. 처음부터 이런 상태로만 나온다면 애 키우는 것도 할 만하겠다 싶었다. 그러니까 <…ing>의 민아(임수정) 같은 애라면. 10대 소녀 민아는 담배고 술이고 안 하는 거 없이 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안 하는 게 있으니, 엄마 귀찮게 하는 거다. 효도가 따로 있나. 귀엽거나, 미치지 않게 하거나.
속 좋은 남편 <고스트 앤 크라임>은 미국 드라마 역사에 전무후무한 캐릭터를 창조했으니, 모든 여성 시청자가 생불이라 칭송해 마지않는 남편 조(제이크 웨버)다. 이 남자는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직장인인데, 영매인 마누라(패트리시아 아퀘트)가 잠잘 때만 접신을 하는 탓에 신생아 아빠 수준의 수면 부족에 시달린다. 그래도 아침이면 사과 한마디와 키스 한번으로 마음을 푸는, 조는 살아 있는 불상, 타고난 보살, 모든 유부녀의 성자. 그것도 모자라 애 보기와 저녁 차리기도 잘한다. 남편들이 모두 조와 같았다면 워킹맘이라는 단어는 생기지도 않았을 거다.
적당한 긴장 <미세스 다웃파이어>와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의 공통점은 한 가지, 피어스 브로스넌이다. 잘생기고 매너 좋고 능력있는데, 그래도 애 엄마가 좋다는 남자. <미세스 다웃파이어>에서 가장 슬펐던 장면은 튀어나온 뱃살을 허리띠 위로 끄집어내서 정돈해야 하는 로빈 윌리엄스가 수영장에서 다이빙하는 피어스 브로스넌의, 나온 거라곤 근육뿐인 배를 보는 장면이었다. 저런 상사가 있다면 아침마다 치르는 전쟁에 조금이라도 보상이 될 텐데, 사무실에 있는 거라곤 수십년 전에 이미 도피 유학을 갔다 온 선구자로서 아침마다 한국에서 “굿모닝”을 외치는 사장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