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는 미디어의 가능성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활용하여 이미지를 구축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무명 시절, 그를 한 프로 레슬링 경기장으로 안내한 프로모터가 “지금 나오는 선수가 모두가 싫어하는 악당”이라고 소개하자, 알리가 “그렇지만 저 악당을 보기 위해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까”라고 되받아쳤다는 일화가 있다. 말하자면, 알리는 언론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유망주 권투 선수는 한둘이 아니다. 60년 로마올림픽 라이트 헤비급 금메달리스트라는 훈장은 필요조건 혹은 충분조건은 될 수 있을지언정 필요충분조건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알리는 KO라운드를 예고하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예언이 맞아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켄터키 청년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마침내 데뷔 4년 만에 세계 타이틀전. 상대는 살인혐의로 복역중 교도소 복싱으로 출발, 정상까지 진격한 소니 리스튼. 35승(25KO)1패의 챔피언과 만난 19승(15KO)의 젊은 청년은 기자회견장에서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는 저 유명한 일성을 터뜨린 뒤, 절대열세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7라운드 KO로 타이틀을 접수한다. 22살의 나이로 세계 정상에 등극한 당시까지의 세계 최연소 헤비급 챔피언 캐시어스 마르셀루스 클레이 주니어(Cassius Marcellus Clay. Jr)는, 격전 다음날 기자 회견을 갖고 이슬람식 이름인 무하마드 알리로 자신의 이름을 개명한다. 이것은, 공인 알리의 건설적 도발이었다. 미국사회의 화약고인 인종문제에 공개적으로 불을 댕긴 것이다. 가장 난처해진 사람은 동양 태평양 미들급 챔피언 캐시어스 나이토. 흑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 사나이는, 알리의 유망주 시절 그의 이름을 따라 예명을 짓고 ‘동양의 클레이’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나, `무하마드 나이토`로까지 개명하지는 않는다. 79년 8월 한국의 박종팔에게 2회 KO패하며 영영 링을 등질 때까지. 7라운드 종료 뒤 더이상 싸우기를 거부한 리스튼의 행적에 의문이 있다며 1년3개월 뒤 마련된 리턴 매치. 알리는 경기 개시 뒤 1분이 지난 시점에서 리스튼을 단 한방의 펀치로 쓰러뜨리고 그것으로 경기 끝.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어떤 펀치가 어떻게 작렬했는지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슬로비디오 판독결과, 예비 동작이 없이 아주 짧게 끊어친 라이트 훅 피니시 블로의 존재가 밝혀졌고, 사람들은 슬로비디오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펀치라 해서 이를 팬텀 펀치라고 명명했다. 65년 5월부터 67년 3월까지 일곱 차례의 KO승을 포함, 세계 타이틀을 무려 아홉 차례나 방어하며 무적으로 군림하던 알리는 67년 4월 미국 정부로부터 선수 라이선스를 뻬앗기고, 70년 10월까지 선수생활을 금지당한다. 기자 회견을 통해 베트남전 징집 기피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알리는 이제 60년대의 사회운동과 반전(反戰)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어, 격동의 시대 한가운데로 떠밀려 나아갔다. 징집 신체검사관이 “알리에게는 정신이상의 징후가 있다. 그의 IQ는 87 정도”라고 언론에 흘리자, 알리는 “그 IQ로 세계 정상에 올랐다면 나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맞받아쳤다. 하버드대학 총학생회가 주최한 강연회에 나가 “오늘 열리는 헤비급 세계 타이틀전을 보러 간 사람보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이 더 많다.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중계카메라가 나를 보려고 이 자리에 와 있다면, 누가 진정한 세계 챔피언인가”라고 열변을 토하던 알리는, 미국 군부와 정보부의 첨예한 감시망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3년을 사회운동과 반전운동으로 시종하며 치열하고 첨예하게 시대와 맞부딪친다. 그야말로 고대 영웅소설의 유형인 `세계와 대결하는 개인`이 아닌가. 마침내 복귀전. 두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고, 알리는 평생의 라이벌 조 프레이저와 세계 타이틀을 놓고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한판 승부를 벌인다. 이 경기의 별명은 세기의 결전(Fight of the Century). 세계 언론으로부터 이만한 관심을 모았던 경기는 그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26전 전승(23KO)의 챔피언과 31전 전승(26KO)의 전 챔피언이 부딪친, 무패의 철권간의 대결이라서? 여기서,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지니는 문화적 의미를 한번 짚고 넘어가자. 서양 문화권에서, 복싱 헤비급 챔피언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로 통한다. 우리식 관념으로는 현역 최강의 공인 무림고수라고나 할까? 알리가 선수 면허를 빼앗긴 뒤, 세계권투협회는 지미 엘리스와 조 프레이저(당시 세계 랭킹 1위)와의 챔피언 결정전을 명한다. 조 프레이저는 “나는 그런 식으로 정상에 오를 수 없다”며 경기를 거부, 랭킹을 9위로 강등당한다. 1년 뒤, 뉴욕주와 일부 주에서는 조 프레이저를 “세계 챔피언으로 인정한다”라는 성명서를 내고, `뉴욕 세계 타이틀전`이라는 경기를 주최한다. 공인 기구의 챔피언과 정신적 챔피언이 양립하던 시대. 70년 2월, 프레이저는 가왕(假王) 지미 엘리스를 5회 KO로 잡고 천하를 통일한 뒤, 알리의 진군을 기다린다. 거대한 다운을 딛고 일어서다
71년 3월8일,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타운. 지난 3년간의 대공위(大空位) 시대를 거쳐, 이제야 진정한 승자가 가려지는 날이다. 어긋나간 관념이 혼란기를 거쳐 마침내 질서를 회복하는 축제의 날인 것이다. 경기전 프레이저는 “나는 챔피언이 아니라 도전자다. 반드시 이겨 세계 챔피언이 되고 싶다”고 전의를 불태웠다던가. 전형적인 아웃복서(알리)와 전형적인 인파이터(프레이저)의 경기는 프레이저의 미세한 우세가 이어지다가, 11라운드에서 알리가 30여초간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이며 무게중심이 기울고, 15라운드 저 유명한 레프트 일발이 알리의 턱에 명중되면서 `거대한 다운`, 그리고 프레이저의 판정승으로 막을 내린다. 그런데 저런, 원고 매수가 이미 마감을 넘었으니 어찌할 거나. 야인(野人) 알리의 방랑과 공포의 흑마왕 포먼의 등장, 포먼의 철옹성을 극적으로 깨뜨린 알리의 킨샤사 대혈전, 프레이저와 알리가 벌인 노웅들의 마지막 대회전 마닐라 대첩 등은 다음 기회 다른 글에서 다루기로 하고 뒷날을 기약할 밖에. 다만, 타의에 의해 전성기의 3년을 차압당하는 불의를 딛고, 다시 정상으로 복귀한 예는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알리의 경우가 유일하다는 사실만은 꼭 밝혀두고 싶다. 바로 그 점이, 그를 가장 위대한 복서로 평가하는 근거라는 점도. 그리고 파킨슨병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우리 챔피언의 쾌유를 기원하면서. 사진제공=아름다운 영화사, 장원재/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비교연극학, 스포츠평론가내가 아는 알리는…“말도 배우기 전부터 재잘거렸죠”“비록 18세였지만 클레이(알리)는 내가 그때까지 만난 인간 가운데 가장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인물이었다. 그건 마치 위대한 배우나 에너지 넘치는 정치가, 내면에 강한 빛을 간직한 사람과 대면하는 경험과도 같았다. 만나자마자 나는 장차 몇 년간 우리가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게 되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스포츠 기고가 딕 샤프 “그 애는 아주 덩치 큰 아기였어요. 무척 활동적이고 온갖 것에 관심을 보였고 항상 뛰어다녔지요. 말도 배우기 전부터 재깔거렸고 6개월이 됐을 때는 이미 강펀치를 날렸답니다.” -알리의 어머니, 오데사 클레이 “그의 가슴 안에 감추어진 정신의 진정한 실체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알리는 그들을 속여넘기고 있다. 사람들은 어릿광대는 절대 현자를 흉내내지 않지만 현자는 광대를 흉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말콤 X “물론 알리는 흑인 기자들에게 더욱 친절했다. 무하마드를 인터뷰하는 일은 종종 그들의 ‘도제 수업’이기도 했다. 다른 어떤 흑인 유명인사 취재원도 무하마드를 인터뷰하는 것 만한 신임을 가져다줄 수 없었던 것이다. 알리는 마이크에 대고 성실히 질문에 답했고 받아 적는 기자들을 위해 말의 속도를 조절하기도 했다.” -작가 노만 메일러 “그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알리는 내게 모든 것을 가르쳐줬고, 우리가 만난 처음 무렵 그는 아름다웠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항상 자신감에 넘쳤으나 내면에는 희미한 불안감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은 권투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복싱에 관한 한 그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알리는 생의 많은 시간을 자신이 누구인지 찾는 데에 보냈다. 신은 우리에게 네 명의 예쁜 아기를 축복해 주셨다. 결혼 열 달 만에 메리엄이 맨 먼저 태어났다. 쌍둥이 라시다와 자밀라, 막내가 무하마드 주니어였다. 무하마드는 절대적으로 아이들을 사랑했지만 그들과 긴 시간을 보낼만한 인내심은 없었다. 그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20분 정도였다. “오, 이 아이는 정말 귀엽군!” 그리고는 “자, 이젠 제발 데려 가”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크게 보아 그는 좋은 아버지였다.” -알리의 아내, 벨린다 알리 “자이레를 방문한 알리는 TV 수상기는 물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그러나 모든 주민들이 그를 아는 동네를 걸어다니곤 했다. 알리를 만난 시민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과 사랑, 그리고 알리가 그들에게 갖고 있던 영향력은 가슴 저린 것이었다.”-퍼디 파체코 박사 김혜리 [email protected]▶ 무하마드 알리는 어떻게 세상과 싸웠는가(1)▶ <알리> 주연배우 윌 스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