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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김소희의 베를린의 상념들
2002-03-02

타자의 이해와 관용, 그 머나먼 길

가로지르기

장거리 비행 도중에는 때때로 기내 모니터에 지도를 띄워놓고 열심히 날아가는 비행기의 현 위치를 표시해준다. 서해 상공으로부터 중국 대륙과 시베리아를 거쳐 우랄산맥을 넘고 유럽 각국의 국경선을 횡단하는 비행기의 움직임은, 베를린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이 단지 국경뿐만 아니라 여러 겹의 사회문화적 경계들을 가로지르는 여정임을 드러내는 하나의 은유로 보인다.

전혀 새로운 관계망 속으로 뚫고 들어가 영화의 에너지를 수신하고 나의 반응을 송신하는 커뮤니케이션은 그 형식과 내용이 평소와 크게 달라질 것이다. 교신의 과정에는 부득이하게 낯섦과 오해라는 잡음도 끼어들 것이다. 그러나 창조적 오독의 자유, 차이에 대한 너그러움을 한껏 선물하는 것은 영화제의 미덕이기도 하다. 올해의 베를린영화제 또한 “영화를 통해서 타자에 대한 관용과 이해를 증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그러나 공항을 드나드는 이들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보는 관점을 제도화하고 있는 검문검색은, 국경을 넘어 조우한 사람들 사이의 상호 이해가 녹록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하는 장치이다. 세계무역센터 붕괴의 여파는 내 필통에까지 미쳤다. 검색대에서 걸린 연필깎이 칼이 여러 나라의 비행장을 홀로 헤맨 끝에야 본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왔다.

모든 유로화는 반짝인다

베를린영화제가 표방한 ‘다양성의 수용’이라는 모토는 유럽의 현재를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패권적 자본주의와 종교 근본주의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맹목이 지닌 전율할 파괴력을 보여준 9·11 테러는, 인류가 공존의 법칙을 모색하지 않으면 공멸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 전 지구적인 이슈를 다루는 정치성을 통해 명성을 확립하고 유지해온 베를린영화제가 이 사실을 놓칠 리 없다.

또한 2월은 유럽연합(EU)의 단일통화인 유로화가 모든 나라에서 의무적으로 사용되는 첫달이기도 하다. 숫자를 표기한 앞면은 디자인이 동일하고 뒷면은 나라마다 제각각 기량을 뽐낸다. 경제체제를 인위적으로 통합하고 하나의 공동체로 나아가려는 유럽연합의 움직임은 50개주가 하나의 국가를 이루게 된 미합중국의 탄생만큼이나 거대한 정치적 사건이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유로화는 모든 동전과 지폐들이 반짝거린다. 통합의 실험이 아직 초보단계라는 뜻이다. 그 수많은 차이와 경계, 갈등을 유럽은 어떻게 공존시킬 수 있을까. 베를린 경쟁부문에 선발된 영화들은 예외없이 이 주제에 집중하고 있다. 주인공들은 민족적, 문화적, 언어적, 계급적, 성적, 가족적, 인종적, 역사적, 정치적, 제도적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다.

<버닝 인 더 윈드>(Burning in the wind, 원제 Brucio Nel Ventro, 감독 실비오 솔디니, 이탈리아·스위스 합작, 경쟁부문)는 영화의 수준이 평범하고 감정 과잉의 멜로드라마임에도 다언어·다민족 사회에서 변방을 전전하는 개인의 고독과 고립감을, 그리고 잘 정돈된 듯 보이는 차가움이 실은 타인과의 교신을 기다리는 열망의 침묵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인물들을 둘러싼 환경을 정치나 이데올로기 탓으로 돌리지 않고 각 개인의 치열한 삶의 행보를 통해서 작고 소중한 이해에 도달한다는 것이 경쟁부문 영화의 한결같은 특징이다.

해피엔딩은 삶에 대한 낙관적인 판타지를 선사하지만 자주 반복되면 지루해진다. 올해 경쟁부문에 별반 화제작이 없었던 것은 과도한 통일성에의 강박 때문인지도 모른다.

공간과 걷기

갑자기 베를린 거리의 조용함이 의식된다. 잿빛 하늘 밑의 낮은 소음도는 이 도시의 질감을 독특하게 만든다. 덜 시끄러우면 걷고 싶어진다. 걷는 사람은 시간의 부자다. “걸어서 하루에 30km를 갈 때 나는 내 시간을 일년 단위로 계산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3천km를 날아갈 때 나는 내 인생을 시간 단위로 계산한다.”(<걷기 예찬>에 인용된 레지스 드브레)

<구름 아래서>(Beneath Clouds, 감독 이반 센, 호주, 경쟁부문)는 공간과 걷기에 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수작이다. “반항은 노예의 고귀함”이라고 말한 이가 니체이던가. 호주 원주민-아일랜드 혼혈인 소녀와 순원주민 혈통인 소년이 각각 집과 소년원을 빠져나와 무작정 시드니로 향한다. 돈이 없는 그들은 하염없이 걷는다. 걷기를 통해 소년과 소녀는 자아의 감각적 두께를 재발견한다. 그들에게 고통과 위로를 번갈아 선물하는 호주의 자연 공간은 황량함과 권태 역시 하나의 조용한 관능적 쾌감이라는 생각에 동조하도록 만든다.

독일의 영화감독 베르너 헤어초크는 자신이 존경하던 영화사가(映畵史家) 로테 아이즈너가 중병으로 앓아눕자 한겨울의 3주 동안 기도하는 심정으로 파리까지 걸어가 문병했다고 한다. 헤어초크의 경건함을 흉내내며 세계영화들 사이를 걸어다녀보기로 한다.

400편의 영화가 수십개 극장에서 상영되는 환경은 부득이하게 개인적인 프로그래밍을 강요한다. 나는 영화와 공간이 x축과 y축으로 벌어진 채 움직이는 이 장에서 12일의 시간 동안 오로지 내 자신의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3차원의 만남을 순열조합한다면 수천 가지의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이곳 혹은 저곳의 이런 혹은 저런 삶을 엿본다. ‘멀티’플렉스라는 이름에 비해 참으로 단순한 접점만을 허락하는 상업영화관과 달리, 영화제는 높은 엔트로피 속에서 다양한 경로(multi-path)를 창안하게 만든다.

시간

<상대성>(Relativity)이라는 영화의 표를 끊었다가 어떤 이유론가 보지 못했다. 보지 않았으니 내용은 알 리 없고, 영화 제목 치고는 희한한 ‘상대성’이라는 말이 상대성에 대한 사념을 촉발시켰다. 대륙과 대양을 횡단하는 비행은 ‘과거로부터 미래로 흘러가는 질서정연한 시간’이라는 개념에 혼선을 가져온다. 6일 오후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비행기에서 잠을 자고 베를린에 도착했는데 그곳은 다시 6일 저녁이다.

사실 시간이란 일직선으로 흐르는 무언가가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서 움직이는 주름 잡힌 장이라고 한다. 현대과학은 시간과 공간의 통합, 혹은 시간의 부재를 수학적으로 입증했다. <안나와 헨리의 영화가 있는 다락방>(비외른 소르틀란 지음)이라는 동화책은 이 사실을 간명한 비유로 설명한다. 주름 잡힌 치맛자락에 매달려 있는 벼룩이 친구에게 자랑한다. 나는 지금 한순간에 저 우주의 끝을 보고 왔노라고. 어떻게? 치맛자락을 움켜쥐어 이쪽 끝과 저쪽 끝을 만나게 하면 벼룩은 가만히 앉은 채 순식간에 우주의 주름을 횡단하게 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조신의 꿈은 우리 영화사에서 반복적으로 만들어진 몇몇 소재 중 하나다. 신상옥 감독의 <꿈>(1955)이 대표적이다. 극락의 정원에서 평화롭게 비질을 하던 조신이 욕망을 가진 역동적인 존재로 변해서 생로병사와 탐·진·치를 겪다가 죽음의 순간에 ‘진짜 현실’ 곧 극락의 법당 안으로 되돌아온다는 거대한 우화는, 단순한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삶의 비밀, 우주의 신비에 관한 한국적 진술이 아닐까.

그러나 무엇이 진짜 현실인가는 우리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인다. 우리는 믿고 싶은 것만 믿기 때문이다.

60년대 불러들이기

올해 베를린영화제에는 두개의 특별 프로그램이 있었다. 하나는 독일영화를 장사되게 하고 싶다는 ‘독일영화 조망’ 부문이고, 다른 하나는 ‘60년대 유럽 회고전’이다. 디이터 코슬릭 체제의 원년인 베를린영화제가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하면서 유럽의 60년대를 소환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히틀러와 우파(UFA) 스튜디오 체제가 버티고 있는 1930∼40년대로는 결코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위대한 독재자>(The Great Dictator, 감독 찰리 채플린, 1940)라는 풍자코미디를 폐막작으로 택한 독일인들의 갈등이 안쓰럽다. ‘60년대 유럽 회고전’의 로고필름은 몇명의 젊은이들이 아슬아슬해 보이는 철골 프레임 위에 올라앉아 휘파람을 불며 다리를 까딱거리는 흑백필름 한 조각을 사용했다. 젊음, 불량스러운 도발, 높고 위태로운 이상의 이미지이다. 68혁명을 정점으로 하는 60년대가 유럽 대륙 전체에 끼친 영향은 한마디로 ‘모든 것을 바꾸었다’는 말로 요약된다. <업 더 정션>(Up The Junction, 감독 켄 로치, 영국, 1965)은 유럽의 60년대를 한눈에 느끼게 한다. 젊은이, 여성, 노동계급, 로큰롤과 춤, 스피드에의 매혹과 죽음이 영화의 한복판으로 부상하고 거리로 뛰쳐나와 흔들거리는 카메라는 68의 에너지를 충실하게 반영한다.

60년대 영화를 되돌아보는 것은 지금 유럽사회의 주류이자 중심으로서 사회 전 방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대의 정체성을 질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회고전 상영관에 젊은이들은 많지 않다. 자신의 독일식 성을 ‘바이러스’라고 바꾼 젊은 감독과 그의 친구가 영화제 건물 안 카페에서 농담을 주고받는다. “베를린영화제의 전통? 할리우드 스타에 연연하는 거지.” “날씨가 제법 화창한 건 전통으로부터의 혁신이군.” 우리에게 60년대의 4·19세대와 386으로 불리는 광주항쟁 세대가 있고, 그들이 이른바 신세대들로부터 받는 정체불명의 반격이 있듯이, 지금 유럽의 젊은이들은 68과 구별되는 새로운 혁명을 꿈꾸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68이 지속되는가 혹은 꿈꾸기에는 대륙 전체가 늙어버린 것일까. 김소희/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 ▶ 제52회 베를린영화제 수상결과

▶ 제52회 베를린영화제 결산

▶ 베를린에서도 재연된 <나쁜 남자> 논쟁

▶ <블러디 선데이>의 폴 그린그래스 감독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 베를린에서 발견한 보석 5편

▶ 영화평론가 김소희의 베를린의 상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