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역사만화로 오해할까봐 미리 일러둔다. ‘섹스를 합니다’라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강도하 작가의 웹툰 <발광하는 현대사>는 ‘민주’를 끊임없이 원하는 ‘현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섹스와 욕망과 사랑에 관한 보고서다. 2012년 1월부터 포털사이트 ‘다음’에 연재됐던 <발광하는 현대사>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7월10일부터 IPTV, 디지털 케이블TV, 인터넷, 모바일 등을 통해 서비스된다. <돼지의 왕> <사이비>의 연상호(사진 왼쪽) 감독이 프로듀서로 나서 웹툰에 숨결을 불어넣었고, 단편애니메이션 <사이> <남자다운 수다> 등을 만든 홍덕표(오른쪽)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배급은 NEW가 설립한 콘텐츠 유통 전문회사 (주)콘텐츠판다가 담당한다. 누군가는 강도하와 연상호의 만남에 기대를 걸 테고, 누군가는 ‘19금 애니메이션’이라는 문구에 혹할 것이다. 영화 관계자라면 (주)콘텐츠판다가 첫선을 보이는 ‘VOD 전용 애니메이션’이라는 데 눈길을 줄지도 모른다. 애니메이션 <발광하는 현대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애니메이션으로 탈바꿈한 <발광하는 현대사>는 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 스튜디오 다다쇼를 찾았다. 그곳에서 연상호 감독과 홍덕표 감독을 만났다.
-<발광하는 현대사>는 어떻게 기획하게 됐나. =연상호_일본의 OVA(Original Video Animation)같이 극장용도 아니고 TV용도 아닌, 그 중간 시장을 겨냥한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어떤 작품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예전 <누들누드>처럼 야한 컨셉의 애니메이션을 해보면 어떨까 싶더라. 혹은 일본의 ‘야애니’ 같은 작품들. 일본에선 다양한 애니메이션이 많이 만들어지는데 왜 한국에선 그런 작품을 못 만들까 하는 갈증이 있었다. 그때가 <창>이란 작품을 할 때였는데, <창>의 목소리 연기에 참여한 강도하 작가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본인이 성인만화를 그리고 있다더라. 그래서 웹툰 <발광하는 현대사>를 보게 됐고, 웹툰을 원작으로 한 IPTV용 애니메이션을 만들게 됐다.
-연출 제의를 수락한 이유는. =홍덕표_원작 자체도 좋았지만, 그걸 떠나서 한국의 애니메이션 시장에 대한 아쉬움, 불만같은 게 있었다. 아동용 TV시리즈물 아니면 제작비가 크게 들어갈 수밖에 없는 가족용 극장 애니메이션이 전부 아닌가. 현재의 협소한 애니메이션 시장을 벗어나 새로운 플랫폼,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필요가 있다는 데 동의했다. 더 다양한 소재, 주제의 이야기도 가능할 거라 생각했고.
-강도하 작가의 원작과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가. =연상호_원작과 똑같이 만들었는데도 느낌이 많이 다르다. 홍덕표 감독한테 여성적 감수성같은 게 있는데, 강도하 작가 역시 마찬가지다.
-강도하 작가는 외모도 그렇고 상남자 스타일 아닌가. =연상호_가짜 마초, 그런 느낌이랄까. 의외로 웹툰 <발광하는 현대사>가 여성들한테 인기가 많더라. 여성적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연출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다.
홍덕표_원작의 경우 컷과 컷,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 간극이 크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을 땐 자칫 그 간극이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더라. 대사라든지 연기 톤, 음악 등을 활용해 좀더 친절한 영상언어로 만들려 했다. 또 영화 초반부는 섹스 코미디 느낌으로 흘러가고 후반부로 가면 좀더 진지한 드라마로 바뀌는데, 영화적 장르도 명확하게 하고 싶었다.
연상호_난 옆에서 계속 세게, 더 세게 해야 한다 그랬고.
-무엇을 ‘더 세게’ 표현하길 원했나. =연상호_섹스 신.
-여성적 감수성을 가진 감독한테? =연상호_더 더럽게 해줘라 그랬지. (웃음)
홍덕표_초반엔 섹스 신의 수위를 놓고 고민을 좀 했다. 무난하게 가야 하는 건지 진짜 차지게, 리얼하게 가야 하는 건지.
-웹툰의 그림은 흑백이다. 강도하 작가는 연재 후기에서 작품이 지나치게 야하게 보이는 걸 우려해 흑백으로 표현했다고 했는데. =연상호_우린 풀컬러다. 근데 강 작가 나랑 얘기할 때랑 말이 다른데. (웃음)
홍덕표_애매하게 표현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또 애니메이션이라고 해서 섹스 신을 아름답게, 고상하게 표현하고 싶진 않았다. 노골적이고 동물적으로 그리고 싶었다.
-특별히 애착이 가는 캐릭터가 있나. =홍덕표_민중. 개인적으로 매력적이라 느꼈다.
연상호_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타일 말고. 어떤 여자 좋아하세요, 이런 질문이 아니잖아.
홍덕표_현대와 민주 등 대부분의 캐릭터가 주종관계로 맺어져 있다. 누군가는 지배하고 누군가는 종속되고. 그런데 민중은 아나키스트 같은 느낌이다. 강도하 작가도 그런 의도로 민중을 그린 것 같다. 체제에, 관계에 종속되지 않는 인물. 웹툰에서도 민중은 <브이 포 벤데타>의 가면 이미지와 자주 겹쳐져 등장한다.
-전체 러닝타임은 몇분인가. =연상호_한편당 22분이고, 총 11부작이다. 다 붙이면 220분쯤 되니까 4시간가량 된다.
홍덕표_1년 동안 극장용 애니메이션 4편을 만든 셈이다. 지난해 4월에 작업 시작해서 딱 1년 걸렸다.
-시간이 너무 빠듯했던 것 아닌가. 물리적으로 작업 시간을 단축하는 방법도 필요했겠다. =홍덕표_작품의 핵심 포인트를 명확히 살리려고 했다. 포기할 건 과감히 포기했다. 소모적인 공정도 최소화하려 했고. 애니메이션을 전문으로 하는 분들이 보기엔 영상의 퀄리티가 아쉬울 수도 있겠지만, 일반 관객이 보기엔 전혀 퀄리티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연상호_작품의 완성도나 좋고 나쁨이 그림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자님은 <돼지의 왕>이 더 좋나, <사이비>가 더 좋나?
-(선뜻 대답을 못하고) 글쎄…. =홍덕표_지브리 스타일 아니야? 아님 <겨울왕국>? (웃음)
연상호_<돼지의 왕>과 <사이비>는 영상의 퀄리티 차이가 크게 난다. <돼지의 왕>의 그림이 훨씬 후지다. 그런데 <돼지의 왕>이 더 좋다는 분도 많다. 관객은 그림도 그림이지만 드라마가 얼마나 탄탄한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운영해야 할 제작비가 한정돼 있다면 드라마에 신경 쓰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제작비는 얼마나 들었나. =홍덕표_순제작비 3억원.
연상호_말이 안 되지. 4시간짜리 애니메이션을 3억원에 만들다니.
-얘기를 들어보면 IPTV가 애니메이션 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시장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연상호_노후 보장용으로 생각하고 만들기도 했다.
-보험 같은? =연상호_‘나중에 투자배급사에서 돈 안 대주면 그땐 뭐 하지?’ 이런 생각을 가끔 한다. 만약 <발광하는 현대사>가 IPTV에서 수익을 거둔다면 독립애니메이션 감독들에게 참고할 만한 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홍덕표_수익을 내지 못하면 결국 시장은 사라질 것이다. 작품 내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흥행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수익이 나야 이 시장을 키울 작가들이 계속 나타날 테니까. 거기서 제 2의 연상호 감독도 나올 수 있는 거고.
-연상호 감독과 어떻게 친해졌나. =홍덕표_2001년쯤 영화제에서 처음 만났는데, 연상호, 장형윤 등 당시 애니메이션 하는 사람들끼리 두루 친하게 지냈다. 그나마 두 사람이 애니메이션 하는 이들 중에선 사회성이 있는 감독들이라 자연스레 친해졌다. 서로 나이도 비슷했고.
연상호_보통은 골방에서 잘 안 나오니까.
-스튜디오 다다쇼의 차기작 <서울역>에는 참여하지 않나. =홍덕표_현재로선 계획이 없다. 실사영화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연상호_요즘 ‘실사병’ 걸렸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