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영화제 2월19일 폐막, 금곰상은 파트리스 셰로의 <인티머시>
“괜찮은 영화, 흥미로운 영화는 많지요. 하지만 베를린에서 위대한 영화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요?”
칸과 베니스를 위시한 세계 어느 영화제 상영관보다 월등히 호화로운 포츠담 광장 인근의 극장 로비에서 만난 관객과 기자들은, 하나같이 베를린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또렷한 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이들의 이야기는 치명적 결함이라기보다 베를린영화제가 영리하게 확보한 칸영화제와 차별화된 존재 근거에 가깝다. 역사와 현실의 정치적 뿌리에 늘 한발을 걸치는 영화 선정, 일반 관객에게 문을 활짝 여는 현대적 시설의 상영관, 어느 누구도 1/10을 보기 어렵다는 방대한 작품 수, 할리우드 스타로 대중을 유혹해 파노라마와 포럼 부문까지 힘을 실어주는 행사 설계. 우아하고 햇살 찬란한 칸, 베니스와 어깨를 겨누며 축축한 늦겨울 중유럽에서 베를린영화제를 지탱해온 이 모든 장점 혹은 단점은 지난 22년간 영화제를 지휘해온 모리츠 데 하델른 집행위원장의 마지막 잔치인 올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인티머시> 뜻밖의 수상, <트래픽> 예상밖 고배
그러나 차분하게 치러진 열이틀의 행사에 ‘드라마’가 너무 부족했다는 판단이었을까? 유럽 상업영화도 할리우드의 호적수가 될 수 있음을 광고하는 캠페인처럼 보이는 <문 앞의 적>으로 문을 열고, 제목조차 안성맞춤인 복원판으로 단정히 막을 내린 제51회 베를린영화제는, 지난 2월19일 베를리날레 팔라스트에서 치러진 폐막식에서 만인의 추측을 비켜간 심사결과로 결국 구경꾼들을 놀라게 하는 데 성공했다. 최우수작품상에 해당하는 금곰상의 주인공은 <여왕 마고>를 연출했던 파트리스 셰로 감독의 <인티머시>. 서로의 이름조차 묻지 않은 채 수요일마다 처절한 섹스를 나누는 런던 중년 남녀의 이상한 관계를 느린 발걸음으로 추적한 이 영화는 국제적 네임 밸류를 가진 여배우로서는 전례를 기억하기 힘들 만큼 과감한 정사를 연기해 화제에 오른 케리 폭스에게 최우수여자연기상을 선사했고, 최우수유럽영화에 주어지는 블루 엔젤상까지 품에 안았다. 폐막식에서 트로피를 쥔 파트리스 셰로 감독은 “여러분은 이 상이 내게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 물건인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문을 연 뒤 “지난 수요일 일식 레스토랑에서 포춘 쿠키를 샀는데 그 안에 ‘당신과 함께 머무를 새로운 경험을 갖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써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결코 잊지 못할 경험이라고 믿는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감독상을 받은 린 쳉솅도 뜻밖의 인물이기는 마찬가지다. ‘비틀넛’이라는 대만 특유의 땅콩을 팔거나 패싸움에 말려들며 타이베이 거리를 방황하다가 한국영화 <비트>와 상당히 비슷한 결말에 다다르는 젊은이들의 초상을 그린 린 쳉솅의 <비틀넛 뷰티>는 상영 직후 ‘산만한 연출’이라는 평과 함께 23편 경쟁작 가운데 중하위권의 평가를 받았다.
이 결과를 놓고 관객과 평론가의 아쉬움 어린 시선을 한몸에 받은 사람은 누구보다 <트래픽>의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특히 영화제 2일째 상영돼 기립박수는 못 돼도 “흠잡을 데 없다”는 평을 만장일치로 이끌어냈던 <트래픽>은, 영화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천부적 재능과 다양한 인물과 시공간을 하나의 교향악으로 그러모으는 솜씨가 지난해의 금곰상 수상작 <매그놀리아>를 그대로 상기시켜 수상이 거의 확실시되었으나, 베니치오 델 토로가 최우수남자연기상을 수상하는 데에 그쳤다. 이같은 선택의 배경은 추측이 분분하다. 오스카에 철저히 외면당했던 폴 토머스 앤더슨과 달리 <트래픽>의 소더버그가 작품상 부문과 감독상 후보 더블 노미네이션까지 받았다는 점이 결정에 반영됐을 가능성이 하나. 20세기 폭스 전 사장인 빌 메커닉이 위원장을 맡은 올해 베를린의 심사위원단이 “엄격한 미학적 기준을 고수할 고집쟁이는 없다”는 항간의 평판에 맞서 지나친 자의식을 발휘했을 것이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하지만 미국영화의 연속 수상보다 유럽적 색깔을 간직한 준작의 손을 들어주는 편을 택했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영화제 기간중 다섯명의 다른 비평가들과 함께 별점을 발표한 베를린의 일간지 <타게스슈피겔>의 얀 슐츠-오잘라 기자는 이에 대해 “이는 한 우수한 영화에 대한 평가를 넘어 올해 베를린영화제에서 마이클 윈터보텀, 카트린 브레야, 덴마크 도그마영화 등이 보여 준 유럽영화의 생명력을 반영한 것이다”라는 해석을 들려주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놀라운 연기”라는 모리츠 데 하델른 집행위원장의 영화제 초반 ‘천기누설’에도 불구하고 연기상을 놓친 에마 톰슨도 아까운 탈락자.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위트>에서 삭발을 감행한 톰슨은 난소암에 걸려 불가항력의 상태로 급작스럽게 떨어진 지식인 여성의 내면을 감상주의에 한순간도 호소하는 법없이 단도직입적 연기와 특유의 위트를 섞어 한치 오차없이 소화했다. 브로드웨이 연극을 밀도있게 각색한 <위트>는 영화적으로도 미라맥스의 <말레나>와 <초콜렛>, 컬럼비아사의 <파인딩 포레스터>와 <파나마의 재단사>보다 좋은 평을 얻어 미국 출품작 중 윗줄에 놓였으나 영화라는 점이 핸디캡으로 작용했는지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역동적인 아시아, 밋밋한 유럽
아시아영화를 한발 앞서 소개하고 트로피로 인증해온 베를린영화제는 새로운 반세기에도 아시아영화의 창 자리를 지켜가려는 노력을 보였다. <비틀넛 뷰티>와 나란히 페기 차오가 제작하는 중국 3부작 프로젝트의 한편인 왕샤오슈아이 감독의 <베이징 자전거>는 상영 직후의 호평을 2등상에 해당하는 심사위원 대상으로 수확했다. 영화제 막바지에 상영된 <베이징 자전거>는 비토리아 데 시카 감독의 <자전거 도둑>에 대한 오마주처럼 비치는 담백한 설정을 베이징으로 상경한 소박한 시골 청년과 가난한 집안의 도시 청소년 두 사람에게 옮겨놓은 드라마. 올해 경쟁부문에 출품된 다섯편의 동양영화 가운데 가장 높은 평점을 받은 이 뚝심있는 영화를 통해 왕샤오슈아이 감독은 안정된 연출력을 증명했으며 호연한 두명의 신인 퀴 린과 리 빈은 <비틀넛 뷰티>의 여주인공 안젤리카 리 신제와 함께, 최근 영화제를 통한 마케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샴페인 회사 파이퍼 히직사가 첫 번째 주연급 연기를 선보인 배우들을 대상으로 신설한 파이퍼 히직상을 수상했다. <베이징 자전거>는 베를린에서 소니 픽처스 클래식에 미국 판권을 파는 성과도 올렸다. 남자연기상에 송강호가 물망에 올랐다는 풍문이 마지막까지 나돌아 기대를 모았던 <공동경비구역 JSA>는 수상에는 실패했으나 주제의식과 만듦새에서 전반적 호감을 끌어내 한국 영화산업의 성숙도에 대한 인지도를 높였다.<… JSA>는 <베를리너 모르겐 포스트> 독자투표에서 <초급자를 위한 이태리어>, <트래픽>에 이어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사이드 섹션에서도 아시아영화는 역동적인 면모를 자랑했다. 여느 해보다 아시아 세가 두드러졌던 파노라마 부문의 디렉터 빌란트 스펙은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에서 <눈물>을 최고작의 하나로 꼽았고, 지난 4년간 제작된 베트남영화 10편의 귀중한 컬렉션을 소개해 찬사를 받은 포럼 부문의 울리히 그레고어 디렉터 역시 일본영화 6편의 우수성을 지적하면서 "프랑스영화 40편을 봤지만 건진 게 없다"는 말로 아시아영화의 상대적 우세를 강조하기도 했다.
반면 유럽의 경쟁작들 가운데에는 모험적인 스타일에 도전한 작품은 드물었다. 장터를 배경으로 한 파트리스 르콩트 감독의 사랑 영화 <펠릭스와 로라> 기자회견장은 샤를로트 갱스부르의 참석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실망한 기자들의 외면으로 다소 썰렁했고, 에릭 로메르 영화를 연상시키는 전반부가 갑작스런 폭력으로 급반전되는 카트린 브레야의 <내 누이에게>는 찬반이 엇갈렸다. 이탈리아의 <무지한 요정>은 ‘TV 미학을 벗어난 새로운 이탈리아영화’를 골랐다는 집행위원장의 장담과 달리 소프오페라에 가까운 필치를 선보였고, 클래식 멜로영화에 대한 향수가 담긴 흑백 와이드 스크린 화면으로 촬영상을 수상한 스페인영화 <바로 당신>도 노스탤지어영화라는 밋밋한 인상을 남겼다. 유일한 독일 경쟁작이었던 그리스 합작 <마이 스위트 홈>도 이민들의 정체성 찾기라는 주제를 소극 형태로 풀어내기는 했으나 독일 관객 외에는 그리 따뜻한 반응을 얻지 못했다. 기대를 모았던 <파나마의 재단사>의 존 부어맨, <파인딩 포레스터>의 구스 반 산트, <초콜렛>의 라세 할스트롬, <뱀부즐드>의 스파이크 리, <클레임>의 마이클 윈터보텀 등 이름높은 ‘작가’들은 우연인지 기존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여 대체로 미덕은 있으나 전작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경쟁작 가운데 폴란드영화 <바이저>나 일본 고 리주 감독의 <클로에>는 반응이 매우 저조해 동구영화, 아시아영화에 호의적이었던 전통을 고수하려는 맥락에서 구색을 갖춘 엔트리가 아니냐는 기자들의 험담도 귀에 들어왔다.
미지근한 평에 몸을 담근 유럽영화들 가운데 박하향내 나는 신선한 센세이션을 몰고온 이번 영화제 최대의 스타는 로네 셔픽 감독의 <초급자를 위한 이태리어>. 영화제 초반 관객과 평론가의 사랑을 독차지한 여세를 몰아 영화제 기간중 미라맥스에 미국 판권이 팔린 이 도그마판 로맨틱코미디는 심사위원상을 받았고, 본상 외에 국제평론가협회상과 <베를리너 모르겐 포스트> 독자상을 갖고 귀향했다. 또다른 여성감독인 아르헨티나의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늪>은 가장 우수한 데뷔작에 주어지는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받았다.
이 밖에 올해 폐막식에서는 베를린영화제 상영작을 대상으로 게이-레즈비언영화상을 주는 테디 베어 재단이 모리츠 데 하델른 위원장에게 스페셜 테디상을 헌정했다. 스스로 게이인 데 하델른 위원장은 파노라마 부문의 빌란트 스펙 디렉터와 더불어 어떤 국제영화제보다 퀴어영화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해온 공로를 인정받아 이 상을 받게 됐다. 한편 50편에 달하는 올해 베를린영화제의 퀴어영화 가운데에서는 미국의 <헤드윅과 앵그리 인치>가 테디 베어상을 수상했다.
신세기 베를린, 붉은 주단의 권위는 계속될까
이제 손님을 배웅하고 마당을 쓸어낸 베를린은 본격적으로 모리츠 데 하델른 이후를 구상해야 할 시간을 맞았다. 대중보다 반 발짝만 앞서가는 영화제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베를린을 할리우드영화의 연초 쇼케이스 장으로 전락시키고 더이상 영화제의 부축이 필요없는 이름난 감독들을 되풀이 초대했다는, 데 하델른에게 쏟아진 비판을 새로운 집행위원장은 모조리 접수할 것인가? 북 라인-베스트팔리아 필름 펀드를 이끌며 독일과 유럽영화의 파이낸싱과 프로모션에 8년간 종사해온 인사로서 데 하델른에게 오는 4월 바통을 이어받을 디터 코슬릭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신중한 침묵을 유지하면서도 “혁명은 기대 말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유럽 영화산업 안에서 일하는 친구들과 독립영화감독들과 대화할 것이며, 할리우드와도 대화할 것이다”라고 지난해 말 취임이 결정된 뒤 밝힌 코슬릭은 독일 국내 영화의 비중을 좀 높일지는 몰라도, 질로 폰테코르보에게 베니스영화제 집행위원장직을 이어받아 예술영화 일색으로 출품작을 물갈이했다가 2년 만에 경질당한 펠리체 라우다디오의 실수를 되풀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 <할리우드 리포터>나 독일영화 관계자들의 추측이다.
그러나 코슬릭 위원장에게는 장기적으로 풀어야 할 묵직한 숙제도 있다. 전임자 모리츠 데 하델른 위원장이 각종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지적했듯, 위성 배급 등 기술 발전과 인터넷의 활성화로 영화제의 월드 프리미어가 예전의 중요성을 잃어가는 시대를 맞이해 베를린뿐 아니라 칸, 베니스, 토론토 등의 대형 영화제는 역할과 기능을 처음부터 다시 고민해야 한다는 강박에 직면하고 있는 것. 그간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를 비롯한 유수 영화사의 프로모션 욕구와 맞물려 영화제의 몸통을 살찌우고 외양을 치장해 온 대형 영화제들이 이제는 트로피와 붉은 주단의 권위만으로는 유수한 영화작가와 스타들의 최신작을 독점하기가 어려워질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과연 신임 함장의 지휘 아래 베를린은 칸과 베니스의 그늘 속에서 반 세기 동안 닦아낸 입지를 지키면서 예전 동구와 아시아영화의 발견을 통해 그랬듯 새 동력원을 캐낼 수 있을까. 내년 2월까지 베를리날레를 지키는 곰은 겨울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
베를린=김혜리 기자 [email protected]
▶ 베를린이 발견한 낯선 영화, 날선 영화
▶ 제5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시상내역
▶ 금곰상 수상한 <인티머시>(Intimacy)와 파트리스 셰로 감독
▶ 남자연기상 수상한 <트래픽>(Traffic)과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 심사위원상 수상한 <초급자를 위한 이태리어>와 로네 셔픽감독
▶ 심사위원대상 수상한 <베이징 자전거>와 왕샤오슈아이 감독
▶ <리틀 세네갈>과 라시드 부샤레브 감독
▶ <슈퍼 8 스토리>와 에미르 쿠스투리차 감독
▶ 영화평론가 김소희,베를린영화제 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