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능의 법칙>은 40대 세 여자의 이야기이며 엄정화, 문소리, 조민수가 주인공이다. 신혜(엄정화)는 자기 분야에서 인정받은 방송국 부장이고 미연(문소리)은 좀 부유해 보이는 전업주부이고 해영(조민수)은 다 큰 딸 하나를 두고 사는 예쁘고 아담한 빵집의 주인이다. 그간 한국영화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40대 여주인공들의 출현이라는 면모가 특이한 데다 상당수 관점과 이야기도 그들의 다양한 일상사에서 나오고 있다는 게 특징이다. 다만 그걸 연출하는 감독이 남자다. 그런데 자타가 다 그럴 만하다고 공인하는 분위기다. 그러자 문득 40대 여자들의 이야기를 연출하는, 혹은 그걸 연출하는 데 적임자로 알려진 이 50대 남자의 생각은 어떠한지 궁금해졌다.
-얼마 전 <관능의 법칙> 제작사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를 인터뷰했다. 감독님이 들으면 약간 거북해할 만한 질문도 하나 있었다. =뭔지 안다. 내가 이 영화의 감독으로 “너무 정답 아니냐?”라고 하지 않았던가.
-맞다. 제작자에게서는 “맞춤옷을 입은 것처럼”이라는 표현을 들었는데, 감독님의 입장은 어땠나. 연출을 제안받았을 때 어떤 생각이 처음 들던가. =‘어, 이거, 내가 제일 잘하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 적어도 한번쯤은 다 고민해본 캐릭터들이었다. 그러다보니 큰 어려움은 없었다.
-<싱글즈>(2003)의 연출자였던 점이 크게 작용했을 거다. <관능의 법칙>에는 <싱글즈>의 10년 뒤쯤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고들 말한다. 일단 그 영화를 연출한 입장에서 <싱글즈>는 어떤 영화로 남아 있나. =방송에서 참 많이 하더라. 올해 초에도 한번 했던 모양이고. 간혹 술 제대로 먹고 집에 갔는데 막상 잠은 잘 안 오고 그럴 때 인터넷 포털에 ‘싱글즈’라고 쳐본다. 그러면 그 영화의 대사가 좋다거나 내레이션이 좋다거나 하는 의견들을 많이 접한다. 그때는 딱히 그 여주인공들 나이 또래의 소재가 없었던 것 같다. 이제 막 30대가 되려는 29살 여성들 말이다. 인생의 환절기를 맞이했던 그들의 이야기가 어필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번 영화 <관능의 법칙>이 또 어떻게 보일까 궁금하다.
-<싱글즈>에 출연했던 엄정화와는 이번 작업을 통해 재회한 셈이다. =설렜다. 다른 감독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누군가와 같이 작업한다는 건 그 배우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다. 그 배우의 새로운 덕목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남들이 이미 쓴 그 배우의 이미지를 재차 소비하는 건 싫은 거다. 그래서 나하고 일할 때는 신인배우였는데 나중에 그 배우가 유명해지면 그게 보기 좋다. 실제로 <싱글즈> 이후에 엄정화에게 시나리오가 많이 갔다고 하더라. 지금은 뭐, 말할 것도 없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대단한 배우가 됐다. 동세대 여배우의 수명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톱배우 중 한명 아닌가.
-만나고 나니 서로 <싱글즈> 이야기를 좀 하게 되던가. =안 그래도 <싱글즈> 할 때 우리가 그랬다. 이거 10년 뒤쯤 다시 보면 되게 재미있을 거라고. 엄정화가 <관능의 법칙> 하기 전에 <싱글즈>를 다시 한번 봤나보더라. <싱글즈> 찍을 때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하더라. ‘나는 왜 이렇게 늙었지? 배우 생활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그때가 정말 풋풋하더라는 거다. <관능의 법칙>을 10년 지나서 보면 세 여배우들 전부 또 그렇게 생각하게 될 것 같다.
-배우들의 실제 나이에는 편차가 조금씩 있다. 조민수, 엄정화, 문소리 순이다. 배역을 나눌 때에도 고려가 있었나. =세 사람이 대학교 기숙사에서 같이 생활한 선후배라고 가정했다. 4학년과 1학년들. 그렇게 해서 조민수가 언니, 엄정화와 문소리는 친구, 마흔일곱과 마흔셋넷 정도. 세명 다 동년배로 설정하는 건 무리가 될 거 같았다. 배우의 자연적인 나이를 영화 속 인물에게 입히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조건 자주 만나고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술도 자주 마신다.” 남성감독으로서 여성영화를 연출하려면 여배우들과의 ‘소통’이 중요하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한 적 있다. 어떤 유명한 남자배우는 그러더라. “남자배우라면 다 여배우들하고 술도 자주 마시고 그러는 줄 아는데 우리도 그런 기회 얻기 힘들다”고. (웃음) 그러니 어쩌면 말한 내용은 특별한 소통의 비결일 수도 있겠다. =특별할 것까지야 뭐, 회식 자리 같은 걸 말하는 거다. 영화에서 세 주인공은 20년 넘게 친하게 지내온 사람들 아닌가. 그러니 촬영 직전부터 친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반면에 <싱글즈> 때 장진영과 김주혁 커플은 촬영 전까지도 일부러 덜 친하게 지내도록 했다. 그들은 영화에서 처음 만나 알게 되는 사이니까. 음, 그리고 역시 촬영 때는 회식을 많이 해야지, 회식을. 회식이 자꾸 없어지는 추세라 안타깝다. (웃음)
-<관능의 법칙> 찍으면서는 회식을 더 못했을 것 같다. (웃음) 표준근로계약서를 이행한 첫 번째작품이었으니. 다들 저녁 식사를 집에 가서 먹었다고 들었다. =선례를 남기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표준근로계약서는 아직까지도 되게 느슨한 형태의 시작일 뿐이다. 이행한다면서 여전히 과거 관행대로 하는 경우도 많다. 내가 무대인사 때 우리는 표준근로계약 이행하여 찍었다고 자꾸 말하니까 심재명 대표가 강조하지 말라고 하더라. 다들 사정 때문에 못하는 거지 그거 이행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사람 어디 있겠냐며. 생각해보니 그렇더라. 아직 현실에 적용하는 데 문제들이 남아 있는 거다. 2∼3년 더 바짝 신경쓰면 정착될 것 같다. 지금은 어쨌든 최소한이지만 진화를 하는 게 중요한 거다. 내가 들을 때마다 설레는 말이 있다. 충무로를 존경하는 직장으로 만들자는 거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 완성된 영화와 시나리오 사이에 달라진 건 없나. =내용은 거의 같다. 구조를 조금 바꿨다. 영화에서는 열고 닫는 역할을 조민수로 정했다. 예컨대 세 인물을 골드미스(신혜), 가정주부(미연), 싱글맘(해영)이라는 식으로 나눌 수 있는데, 엄정화가 맡은 신혜가 관객의 선망이나 동경을 끌어내는 인물이라면 조민수가 맡은 해영은 관객의 보편적 동일시를 끌어내는 인물이기를 바랐다.
-일반 관객과 영화를 함께 봤는데 의외로 젊은 여성관객이 조민수쪽에 공감을 많이 했다. =아무래도 자기들 또래인 딸(전혜진)이 등장하기도 하고. 엄마와 딸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그런 것일 수 있겠다.
-주인공이 세명이다 보니, 일종의 균형감이랄까, 비율의 묘랄까 하는 것들을 생각했어야 할 것 같다. =한 여성의 자아를 세 인물이 나눠 갖고 있는 셈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옴니버스 구조처럼 가는 건데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그걸 한번 해보면서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그게 가장 고민이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처럼 공통의 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그런 영화가 아닌 거다. 신 순서에 따라 많이 다르게 느낄 거 같아서 각각의 순서와 배열을 많이 고민했다. 그렇게 해서 편집 작업 후반부에 바꾼 것 중 하나가 문소리, 이성민 부부의 장면이다. 두 사람이 시골집에서 우리의 관계가 ‘의리냐, 사랑이냐’ 이러는 게 있는데 시나리오에서는 앞부분에 있었지만, 그걸 뒷부분에 넣기로 했다.
-세 배우의 연기의 결에 대해서는 각각 어떻게 느꼈나. =감독하면서 제일 어려운 게 이게 오케이인지 엔지인지 판단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왜 엔지인지 납득시키는 거. <싱글즈> 때였는데 한참을 그걸 설명하려고 해도 잘 안 되더라. 그런데 엄정화가 “예, 알았어요. 한번 더 갈게요” 하더니 내가 설명하려고 했던 그걸 딱 하더라. 이번에도 그런 장면이 있었다. 몸이 간지러워서 긁적이는 장면이 있는데 엄정화가 상대 배우가 프레임 아웃하고 나자 자기 배를 슥 한번 긁어주는 거다. 그때 감정이 확 살아나더라. 되게 예민한 거다. 문소리의 경우는 어떤 장면에서든지 힘이 세다. 예각의 연기를 한다고 할까. 그만큼 몰두하게 하는 힘이 있다. 너 이거 안 믿어, 믿어. 그러면서 다가오는 힘. 그런 힘이 상대배우 이성민과의 좋은 호흡으로 나왔다. 조민수는, 경우의 수가 워낙 많을 정도로 다양하다. 가령 차가움과 따뜻함을 동시에 지녔고 어떤 때는 연약해 보이다가 어떤 때는 강해 보이는 그런 식이다.
-보조적이라고는 해도 남자배우들의 연기가 좋다. 특히 이경영과 이성민. =이재윤도 잘한다! 세명의 여배우가 다 정해진 다음에 남자배우들을 정했다. 첫 촬영날이었는데 (이)경영이가 내 손을 자기 심장에 갖다대더라. 콩당콩당 뛴다고. 정말 그렇더라. 한 수십년 만에 하는 멜로다, 이 나이에 베드신하게 해줘서 고맙다, 그러더라.
-그런데 전반적인 면에서는 사건의 발생과 해결 등등 영화가 피상적으로 느껴진 게 사실이다. =그건 아쉬운 부분이다. 예를 들면 넣고 싶은 걸 못 넣은 것도 있다. 내 친구가 약국을 한다. 1천원짜리 같은 거 받을 거 아닌가. 언젠가 보니 창구 뒤편에서 다 꾸겨진 1천원짜리를 한장 한장 좌우 앞뒤 펴서 정리하는 걸 본 적이 있다. 해영의 제과점 장면에서도 그런 모습을 묘사해볼까 했는데 못했다. 사람 사이의 침 튀기는 느낌, 그런 거 좀 부족한 거 아니냐는 지적은 <싱글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어려운 선택인 것 같다. 어찌해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엔딩이 따뜻한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
-어떤 장면이 마음에 남나. =세 여주인공이 해영의 집 안에 있을 때 그 안의 온도가 참 좋다. 자기들끼리 농담하지 않나. 요절할 팔자네, 요절이라는 뜻을 모르네, 그러면서. 그리고 여배우는 아니지만 경영이가 침대 아래 무릎을 꿇고 해영을 안아주는 장면도 좋다. 이 장면에서는 의견들이 분분했다. 병원에서 막 나온 여자와 과연 섹스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겠느냐 등등. 하지만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봤다. 다만 갑작스러운 저항감을 없애기 위해 대문에서부터 경영이 안아주고 하면서 집으로 들어서는 쪽을 택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이 장면을 향해 있다고 봐도 된다. 그러고나서는 엔딩에서 좀더 밝은 발걸음으로 나서자, 하는 거였다. 40대 여성이 주인공이다 보니 약간의 판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각본을 쓰지 않고 연출만 하는 것으로 아는데, 혹시 병행하기를 원하지는 않는가. 앞으로는 어떤가. =어떤 오해가 있다. 감독이라면 전부 각본을 자기가 쓰고 싶어 한다는. 제발 내가 시나리오에 손 안 대고 연출만 고민할 수 있는 좋은 시나리오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상업영화 감독들도 아주 많다. 나도 그렇다. 산업적인 측면에서는 감독과 각본이 분리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뭔가 좀 가볍게 마무리하자는 뜻에서 “40대 여자들은 관능의 법칙으로 살고, 그러면 50대 남자들은 무엇의 법칙으로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실은 그냥 반쯤 웃자고 한 소리였는데 의외로 감독의 답변은 진지했다. “40대를 불혹이라고 하지 않나. 유혹을 이기는 나이라고. 그 나이에 느낀 건데 도처에 유혹이다. 지천명이니 이순이니 다 비슷할 거다. 그런 건 다 평균 수명 40살일 때 했던 이야기들일 거다. 자기가 느껴서 그런 말이 나온 게 아니라 그래야 한다는 규범 같은 것일 거다. 그런 거 다 때려치워야 하지 않을까. 요새 나는 나이 들어간다는 걸 많이 생각한다. 내 친구들을 보며 그들이 올드해졌다고 느낄 때도 있다. 남자가 말 많아지고 남의 말 잘 안 들으면 그거 올드해진 거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흥미를 계속 만들고 그 재미에 빠지려고 한다. 그 재미를 계속 추구하다 보면 세계관도 확장되겠지. 2년 전인가 2NE1에 완전히 빠져서 별걸 다 찾아본 적도 있었다. 빅뱅도 그랬고. 그런 식의 소소한 재미를 놓치지 말고 길들여지지 않으면서 객관이 아니라 주관의 자세로 살아야지.” 어쩌면 여기에 훤한 답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50대의 남자가 40대 여자들의 이야기를 만들 줄 아는가. 그게 그의 재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