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 <단종애사>(전창근 감독)부터 2001년 <친구>(곽경택 감독)까지 단 한 사람에 의해 배우들의 입을거리가 결정돼왔다면 과연 믿을 수 있을까. 무려 47년간 영화 의상에 종사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작품 준비에 여념이 없는 ‘의상 할머니’ 이해윤. 1991년 춘사영화제 의상상(<사의 찬미>)을 비롯, 같은 해 대종상 특별부문상(<은마는 오지 않는다>), 1996년 대종상 의상상(<금홍아 금홍아>), 2001년 여성영화인 공로상 수상이 전부인 그녀는 업적에 비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하였으나 유현목, 신상옥, 김수용 등 시대의 감독들과 함께 하며 현장을 지켜온 영화계의 산 증인이다. 반세기 동안 한국영화에 옷을 입혀온 이해윤 할머니 회고록을 연재한다.
처음부터 의상일을 한 건 아니야. 처음엔 배우로 픽업이 되어 영화를 시작했지. 이규환 감독이 설날 특집으로 만든 <춘향전>(1955)에서 말타는 기생 역이 첫 배역이었어. 그리고 같은 해 또 한편 더 찍었지. 김홍 감독이 우이동 오픈세트에서 <자유 전선>을 찍는데 주증녀를 며느리로 둔 시어머니 역할을 맡았어. 근데 하고 나선 연기가 영 맘에 차지 않더라구. 눈을 너무 자주 깜빡거렸거든.
주위에선 계속 연기를 해보라는데 그만두고 대신 의상일에 관심을 가졌지. 노동은 죽도록 하겠는데 연기는 도무지 힘들어. 그래도 그 인연으로 의상부로 현장 다닐 때도 내내 조연이나 엑스트라로 등장하곤 했어. 배우들 가이다마(대역)도 엄청 했지. 의상은 56년에 전창근 감독이 <단종애사>를 찍는데 현장에 가서 수염이랑 가발을 떠주면서 시작했어. 그땐 의상부가 따로 없었거든. 의상 만드는 사람이 소품도 챙기고 배우들 머리도 다듬어주곤 하던 때였으니까. 지금이야 전문적으로 가발을 만들어 파는 곳이 있지만, 그땐 일일이 진짜 머리카락을 구해와 사람 손으로 떠야 했어.
일을 하다보니까 재미가 붙더라구. 그래서 살살 바지랑 저고리랑 도포에도 손을 댔지. 한복 짓는 거야 기본은 알지. 하지만 시대적인 배경에 맞추자니 세세한 건 알 수가 없었어. 그래서 당시 고등학교 국어책에 나와 있는 한복 그림도 보고, 동덕 고녀(현 동덕여대)의 석교수라고 그 어머니가 궁중예복을 지을 줄 아시는데 그분이 만들어주신 작은 견본을 보면서 만들었지. 또 <단종애사>의 이상철 제작부장이 운현궁 나인과 알아서 그이 덕분에 실물 크기의 도복과 관복, 당의(길이가 무릎까지 오는 저고리의 일종)를 한벌씩 구할 수 있었지. 뿐만 아니라 실제로 궁중 예복의 금박을 찍던 할아버지까지 소개해줘서 다행히 고증이 확실한 의상을 만들 수 있었어.
일이 많아 우리 어머니랑 이모 손까지 빌려 을지로에 있는 영화사 사무실에서 옷을 지었어.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때야말로 정말 ‘시간이 돈’인 시절이었거든. 빨리 찍으면 찍을수록 제작비가 절감되던 때라 늑장을 부릴 수도 없었어. 게다가 돈이라도 많이 주나. 제작비가 절감되면 의상부랑 미술부 예산 먼저 깎기는 걸. 돈이 많더라도 옷감 자체가 귀해서 맘에 드는 물건 구하기도 힘들었어. 한국전쟁 끝난 직후라 어디 물자가 풍족해야지. 있어봤자 광목이랑 인조견, 본견(실크), 그리고 홍콩서 수입돼 온 양단(여러 무늬가 수놓여 두껍게 짜인 비단)이 고작이야. 수입품도 많지 않던 때니까. 질이 나쁘더라도 그걸 가지고 궁리를 하는 수밖에.
분홍색 남자 저고리가 어딨어?
옷감의 질만 문제되는 게 아냐. 나염이 발달하지 않아서 색깔이 형편없었어. 그나마 다행인 게 사극에 쓰이는 옷들은 빨강, 남색, 초록, 노랑색만 있으면 어느 정도 해결이 됐거든. 지금은 TV 사극이나 영화 사극이나 너무 화려하게들 가고 있는데, 실제로는 궁중 예복에 쓰이는 색이 얼마 안 돼. 고증도 안 된 의상을 입고서야 어찌 제대로 된 사극을 만들 수 있겠누. 원래 분홍색은 여자 색이어서 남자 옷에는 쓸 수 없는데도 언제부턴가 떡하니 분홍색 남자 저고리와 바지와 등장하는 것도 고증이 부족한 탓이야. 너무들 공부를 안 해. 내가 일할 땐 지금처럼 자료도 많지 않았어. 의상 연구 서적이 다 뭐야. 비원이나 규장각을 직접 찾아가 꽂혀 있는 장서들을 하나씩 읽어 내려가며 의상에 대해서 공부하곤 했어.
55년을 기준으로 많은 감독이 사극을 만들었어. 한마디로 사극붐이 인 거지. 시대도 다양해서 <단종애사>(1956, 전창근 감독, 조선), <마의 태자>(1956, 전창근 감독, 신라), <왕자 호동>(1962, 한형모 감독, 고구려) 등 조선시대와 삼국시대를 두루 아우르는 작품들이 한꺼번에 제작되었지. 그래서 생긴 일이 의상 바꿔치기야. 62년 한해에 <왕자 호동>과 <인목대비>(안현철 감독), <폭군연산>(신상옥 감독)을 맡았는데 하나는 삼국시대물이고 나머지는 조선시대물이잖아. 사극 한편에 필요한 의상 수가 기본이 200벌인데 그걸 영화마다 따로 만든다면 돈, 시간 할 것 없이 모자라서 안 되거든. 그래서 이 영화에 쓰인 의상을 조금 다듬어서 다른 영화에 또 가져다 쓰고, 다시 가져와 고쳐서 영화 찍고 또 다른 영화에 빌려주고 이런 식이었어.
그러다보니 요령이 생기는 거야. 예를 들어 조선시대에는 바지나 저고리, 두루마기에 단을 대는 게 특징이었고, 삼국시대엔 단이 없었거든. 그래서 <폭군 연산> 찍을 땐 부지런히 바느질을 해서 단을 대고, <왕자 호동>을 찍을 땐 또 부지런히 단을 떼는 거야. 이게 쉬운 일이 아냐. 영화 일정이 서로 겹쳐 있어서 수원성에서는 단을 붙인 채로 영화를 찍고, 밤새워 단을 없앤 뒤에 남한산성의 <왕자 호동> 현장으로 나르는 일을 계속했지. 그 영화들뿐만이 아니야. 현장에서 현장으로 의상 나르는 일을 무려 십년을 했으니 말 다 했지. 그렇게 힘들어도 현장을 떠나는 건 생각도 안 했어. 새 영화를 시작할 땐 늘 희망에 차 있었지.
밤새워 단을 붙였다가 뗐다 했어
만들어 주는 사람도 고생이지만, 그 땐 만든 옷을 입어주는 배우들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그저 땀 한 번 흘리면 갓이고 도포고 색이 빠져 염색물이 줄줄 흘렀으니까. 머리에 쓴 갓에서 꺼먼 물이 뚝뚝 떨어지면 멍 든 것처럼 한복이 얼룩덜룩 해지지, 또 걸치고 있는 옷에서도 색이 빠지니까 피부도 덩달아 얼룩거리지, 감독은 감독대로 제 상태로 해 놓으라고 얼마나 안달을 해대는데. 그럼 한 컷 찍고 옷을 죄다 벗겨서 다시 빨래를 하는 거야. 그리곤 또 입혀서 촬영하고, 얼룩지면 다시 빨고. 이러니 내 정신이 아냐. 주연들 의상 신경쓰다 보니 가끔은 엑스트라들 동정 달아주는 일을 소홀히 할 때도 있어. 그런 날은 꼭 시키먼 동정색이 화면에 부각이 되서 사람 애를 말렸지.
구술 이해윤/ 1925년생 <단종애사> <마의 태자> <성춘향> <물레야 물레야> <사의 찬미> <금홍아 금홍아> <서편제> <친구> 의상 제작 정리 심지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사진 오계옥 [email protected]